"소주 한 병.. 아니 두 병 주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를 주문하던 정현이.
"너.. 술 많이 고팠구나?"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정현이의 눈치를 살피며
농담을 건넸건만 정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알바생에게 건네받은 소주 뚜껑을 열고 있었지.
"야야 무슨 첫잔부터 자작이야
너 까먹었구나? 오늘 내 축하.."
"그래 축하! 축하한다고! 축하.. 해.. 대리 된 거."
말끝을 살짝 떨며 또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정현이.
"너 왜 이러냐?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무 말 없이 소주를 넘긴 정현이는
이내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나를 쳐다봤어.
"축하한다고.. 이게 왜 어렵지..?"
아까부터 옆에서 정현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민차장과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싶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정현이를 바라보는 나.
그렇게 우리 술자리는 시작되었어.
어느덧 쌓여가는 술병들.
많이 마셨냐고?
"야.. 뭔 술을 물처럼 마셔.."
"그래. 우리 정현이 오늘 너무 달리네?
도리 승진한 게 그렇게 좋아?"
민차장의 말에 소주잔을 쾅 내려놓고는
나를 한번 강하게 쳐다보는 정현이.
약간은 충혈된 눈으로 나를 쏘아보는
정현이었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모습이었어.
"좋아! 너무 좋아! 내 친구 대리 달았는데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알아?"
갑자기 빈 소주잔과 소주병을 양손에
각각 들고 일어나는 정현이
"이거 마시면 우리 친구하는 거다?"
정현이의 행동에 당황해 민차장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민차장은 그냥 받아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
"뭐냐? 전에처럼 이거 마시면 사귀는 거다?
라고 해야 내가 그때처럼 뿜기라도 하지..."
"받아! 이거 마셔야 친구 되는 거야!"
아빠의 농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손에
잔을 쥐어주며 술을 따라주는 정현이.
평소 같지 않은 정현이의 모습에
사실 무섭기까지 했던 것 같아.
"나.. 나 화장실 좀..."
손에 든 잔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잔을 확 들어올리며 내게 내미는 정현이.
"어디 가! 이거 마시고 가! 나랑 친구 안 할 거야?"
어느새 정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민차장이
정현이를 감싸 안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지.
"도리. 다녀와. 정현아~ 천천히 마시지~
너 좀 취한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나 안 취했어. 내 잔 왜 안 받아? 왜?
나랑 친구하기 싫어?"
민차장의 말에 화장실로 가는 내 등 뒤로 울려 퍼지는
정현이의 목소리. 화장실로 가던 아빠는
발걸음을 옮겨 흡연실로 향했어.
'도대체 뭐가 문제야? 왜 저래 갑자기?'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안 되는 거야.
그냥 나는 평소처럼
'우아! 너 대리네? 이제 도대리님인가? 어때
대리된 소감이?'
재잘거리며 진심으로 축하해줄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도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말이지.
담배를 끄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자리로 돌아가는데
멀리서도 알 수 있었어. 민차장 품에서 오열하고 있는
정현이의 모습을 말이야..
"언니. 나 진짜 열심히 살았다? 일도 열심히 하고.."
"알지.. 우리 정현이 입사했을 때부터 언니가
늘 옆에 있었잖아."
"나 도리 되게 좋아해. 그렇게 착한 애가 어딨어.
내가 그동안 봤던 사람들과는 너무도 달랐어
정말 얘는 내가 친구해도 되겠다. 친구 하고 싶다. "
"도리 착하지.."
"그런데 난.. 친구가 가장 기쁜 날 축하한다고..
축하한다고.. 그 한마디도 못 해줬어.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내가 뒤에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차장의 품에
고개를 묻고 울부짖는 정현이.
순간 민차장과 눈이 마주쳐 정현이에게 다가갈까 했지만
고개를 살짝살짝 젓는 민차장의 모습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옆 빈 테이블 의자를 꺼내 앉아서 둘의 모습을 지켜봤어.
"도리 대리 발령 소식 듣고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게 뭔지 알아?"
자세를 고치며 술잔에 술을 채워 목으로 넘기는 정현이.
"크아.."
한동안 소주잔을 쳐다보며 말이 없던 정현이는 다시 두 뺨 위로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어.
"나는..? 나는..? 나는 이었어...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도리가 먼저야? 나는 그동안 뭐 한 거야?"
"우리 회사 여직원 진급 느린 거 알잖아.. 너 일 잘하고 성격 좋은 거
전직원이 다 아는데? 우리 회사에 너 싫어하는 사람 없어."
"아냐 언니. 난 그걸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야..
정말 친구라고 생각한다면서 나는 그 순간 도리를 미워했어.
그리고. 그게 결국 나를 미워하게 만들었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
그거 아니?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다는 말?
무슨 말도 안 되는 표현이야. 그런 느낌이 어딨어 라고
누누이 얘기하며 살아왔는데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 말이야..
"도리.. 나도 알아. 어린 나이에 아빠 되고
빚 때문에 고생하고, 회사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는데 이제 조금은
나아지려고 하고 있는데.."
또 술잔을 집어들려고 하자 정현이의 팔을 잡으며
저지하는 민차장.
"왜? 나 술 마실 거야. 내 인생이 너무 짠하고 짠내..
아니 짜증나서 짠을 안 할 수가 없다. 언니 짠!"
말없이 바라보던 민차장 정현이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었던 걸까 말없이 잔을 들어 정현이와 건배를
해주는 민차장이었지.
"짠! 역시 우리 언니밖에 없다. 헤헤"
"어휴.. 그만 마셔 도리가 욕해.."
"도리.. 욕하겠지..? 실망했겠지..?
나랑 친구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더 이상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어.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서 정현이의 등짝을
후려갈기다시피 쳐버렸지.
"뭐 하냐? 내 욕했지? 너 아주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고 있네?"
"컥! 컥... 너.. 여자를.. "
갑작스런 나의 공격에 사레라도 들렸는지 한동안
기침을 하던 정현이.
"누가 여자야! 너 내가 남자로 보이냐?
친구끼리 남녀가 어딨어?"
그리곤 정현이가 마시려고 채워둔 소주잔을 집어들어
한번에 넘겨버렸지.
"캬~ 됐지? 이제 우리 사귀는 거다?"
"어?"
"아.. 친구.. 말이 왜 그렇게.."
아빠의 행동에 잠시 얼이 빠진 듯 멍하니 있다가
첫 만남 때 일이 생각나는지 크게 웃어버리던 정현이.
잠시 후 웃음이 그친 정현이는 아무 말 없이 빈 잔에
소주를 채워 넣고 있었어.
"그래서 뭐.. 안 해줘?"
"뭐를.."
"차장님 뭐예요. 오늘 나 축하해주기로 한 자리 아니었어요?"
그제서야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살짝 한숨을 쉬며
잔을 들어올리는 민차장.
"휴.. 이거 뭐 축하파티 분위기가 이렇게 다이나믹해서야.."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는 정현이. 다시 한번 정현이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말을 이었지.
"뭐 해? 안 해?"
"어? 뭐.. 뭘..?"
"건배사!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오늘은 안 할래.. 근데 너.. 혹시 다 들었어..?"
아빠의 행동이 조금은 오버스러웠던 걸까?
민차장에게 얘기했던 걸 혹시 듣지 않았나
불안해하는 모습이었어.
"뭐를? 내 욕하는 거?"
"어.. 음.. 아니?"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아 할 거야 말 거야 건배사"
아빠의 재촉에 맞장구치던 민차장.
"그래. 한번 들어보자 오늘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정현이 건배사를 못 들었네."
여전히 소주잔을 매만지던 정현이. 뭔가 결심했다는 듯
억지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높이 들었어.
"흠흠..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우리네 인생이 짠하고 짠내나서 짠을 안 할 수 없다 짠!"
-짠-
진짜 축하파티는 정현이의 건배사와 우리들의
목소리로 그제서야 시작될 수 있었지.
"이모... 여기.. 택시 좀 불러주셔..야겠는데요...?"
정신을 내보내려고 하는 건지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건지
머리는 전후좌우로 랜덤하게 흔들면서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계속 재잘대는
정현이.
"김과장! 그 나쁜노옴! 내 친구 괴롭히기나 하고!
잘됐어! 그러니까 짤리지!"
"그래그래.."
"엘리베이터 걸은 그만둔 거야? 왜? 월급 안 준대?"
"그거 월급 받고 하던 거 아니다.."
"애기가 몇 살이지? 이모가 어디 보자.. 용돈.."
"에헤이 이 사람.. 뭐 이런 걸.."
도윤이 나이를 물으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보던 정현이.
"... 현금이.. 도리야 혹시 카드 돼?"
"아오.. 되겠냐? 차장님 애 좀 어떻게 좀 해줘요."
술자리 시작 때와는 다르게 뭐가 그리 재밌는지
마치 영화 관람이라도 하듯 팔짱을 끼고
웃으며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차장.
"웃음이 나와요? 지금.. 하아.. 이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냐?
집에나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쓰러지면 좀 업고 데려다줘 도리 힘 좋지 않아?"
"하아.. 제가 그거 한번 해봤는데요.. 성인 여자 업는 거..
그거 사람이 할 게 못 되더라고요.. 영화가 사람 다 망쳐 정말"
"누굴 업었길래?"
"있어요.. 우리 아버지의 처의 자녀분.."
"처에.. 자녀.. 풉.. 너도 취했구나~ 도리도 농담 잘하는 애였네?
사무실에서 조용조용하길래 그냥 그런 앤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라면 아닌, 그냥 스치려면 스칠 수 있는 그 말이.
아빠를 잠시나마 멈칫하게 만들었어.
"누구나 가면을 쓰잖아요. 회사용, 집용, 친구용.
근데 이 자리에선 친구용을 써도 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런데 그것도 가면이라 난 좀 별론데"
민차장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민차장의 잔에 소주를 채워준 뒤
잔을 들어 부딪히고는 술을 넘겼지.
"그게 진짜 제 모습이랑 가장 가까워요"
언제 쓰러진 건지 테이블에 걸쳐 엎드려 있던 정현이가
벌떡 일어나며 말을 건넸어.
"어? 라면? 아니야 배불러.. 오징어 하나 더 시킬까?"
"하아.. 너 몸무게 몇 근이나 나가냐..."
늦은 저녁 시간, 늦은 술자리.
술집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 지나다니던 차들도
어느새 줄어버린 시각.
우리도 슬슬 자리를 마무리하고 있었지.
"자~ 가자.."
"아 잠깐마안~ 오징어 아직 안 나왔어 이모~ 여기 오징어.."
"자! 자! 여기 나왔다! 오징어 외계인 좋아하냐?
여깄잖아 오징어!"
"어... 아니 외계인 말고.. 먹는 거..."
우리 둘 모습이 웬만한 코미디 프로보다 웃긴지.
이제 배까지 잡고 웃어대는 민차장이었지.
"2차! 2차! 노래방 가자! 내가 오늘 같은 날 꼭 불러야 되는
노래 리스트가 있거든?"
짐짝 메듯이 한쪽 어깨에 들쳐 메었음에도 바둥거리며
재잘대는 정현이.
"하아.. 차장님 애 진짜 제가 데려다줘야 돼요? 야! 너 집이 어디니?"
"후후훗 됐어~ 택시만 태워줘 내가 데려다줄게."
술집 앞 대로변. 그날따라 택시는 왜 그렇게 안 잡히던지.
계속 들쳐 메고 있기 힘들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쳐 놓은 정현이.
바닥에 다소곳이 누워 자고 있는 정현이를 보니 미안하기도 하면서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 게 이상한 데서 양가감정이
들더라고.
"택시 왔다. 정현아? 일어나봐. 집에 가야지?"
"우.. 웅? 어! 어어어 가자가자! 2차!"
"아니.. 2차가 아니라.. 집에 가야지~ 얼른 타자~"
정현이를 택시에 태우는 민차장을 보며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에 땀에 쩌든 채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데
"어맛? 정현아!"
아빠에게 휘청이며 달려오는 정현이가 보이는 거지.
"야! 도리!"
어느덧 가까이 와서는 삿대질을 하며 아빠를 부르는 정현이
왠지 모를 이상한 분위기에 침을 꼴깍 삼키는데 갑자기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던 정현이었어.
"도리! 내 친구! 승진 축하해! 너~ 대리 됐다고 나랑 안 놀아주면
나 삐질 거야!"
그 말만 남기고 비틀거리며 다시 택시로 향하던 정현이.
그날 정현이의 그 한마디는 그날 정현이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는 데
충분했던 것 같아.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와~ 우리 도대리님 첫 출근이네?"
"아.. 왜 이러실까 대리 사모님?"
"헤헤헤 ... 우리 헤어져... 나 지금 오글거렸어.. 아저씨 때문에..."
엄마의 장난스런 출근 인사에 그대로 맞받아쳤더니
한순간 싸해진 엄마의 얼굴.
"헤어져야지~ 이따 퇴근하고 또 만나고~ 이따 봐~ 도윤이도 이따 보자~"
"바바~ 압하~ 바바~"
그렇게 엄마와 너의 인사를 뒤로하고 회사로 향했어.
"... 도대리님.. 이건 좀..."
"도리야.. 단무지 관리 좀 해라.."
"도대리.. 안 창피하냐..?"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내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이더라고 가까이 다가갔더니 한마디씩 하는 거야.
"네? 무슨.. 아? 하아.. 야! 이게 무슨 짓이야!"
"어 왜? 맘에 안 들어? 다른 걸로 해올까요? 도대리님?"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나 쪽팔려 죽으라고? 너 뒤졌어!"
"아.. 아니 아니.. 야! 잠깐만 나 실내화 벗겨졌.. 으악!"
"아오 재능 낭비를 이따구로 하냐고!"
벗겨진 실내화를 아예 손에 들고 사무실 밖으로 도망치는 정현이와
그 뒤를 쫓는 나.
"요이요이 단무지 새끼는 또 뛰.. 이건 뭐야? 너도 합세했냐? 이건 또 뭐야?
왜 쓸데없이 퀄리티가 좋아?"
아빠 모니터에 대문짝만하게 그리고 이쁘게 디자인까지 입힌
출력물 한 장을 남기고 말이지.
/ 도대리님 입신양명하심을 경하드리옵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