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리 축하해?"
여느 때와 다름없던 출근길.
집을 나설 때도,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전혀 다를 게 없었어.
"이 새끼~ 이제 같은 대리라고 막 들이대는 거 아냐?
야 알지? 너랑 나랑 보이지 않는 선 너 그거 넘으면 안 된다?
형이 뭐라고 불러줄까? 대리님?
아냐 아냐~ 가만 생각해 보니까
대리님은 아닌 것 같아. 너한테 님 자 붙이긴 싫네...
너도 별루지? 그냥 전처럼 도리라고 부른다?"
어깨를 툭치며 장난치듯 축하해 주는 경태형.
"도리~ 너무 열심히 뛰는 거 아냐? 그러다 넘어져~"
평소 친하지도 않던 직원들의 축하들.
기분이 좋았냐고?
글쎄...
솔직히 기쁘기보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난 항상 여기 있었는데.
매일 출근했고.
매일 일했고.
매일 똑같이 그들과 함께 했는데
대리가 되고 나서야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었단 걸 알게 된 것 같았거든.
그런 생각들이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지.
"너 왜 대리야?"
"어?"
갑자기 나타난 정현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평소와 다른 멍한 표정으로 아빠에게 물어왔어.
"아니.. 갑자기 너 왜 대리야?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
이미 진급 사실을 알고 있었단 걸 눈치챘던 건지,
아니면 그냥 찔러보는 건지. 뭐가 됐던 본인에게
얘기를 하지 않았단 게 서운했던 걸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멋쩍게 웃으며
말했지.
"나도 몰랐지... 말단 나부랭이가 알리가 있냐~"
"너 왜 대리... 야?"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더니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터덜 터덜 돌아와 말없이 자리에 앉던
정현이.
'귀띔이라도 해줄걸 그랬나...'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괜히 얘기했다가
"뭐? 인마 그거 그냥 술김에 한 소리지~"
라고 팀장님이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
나만 이상한 놈 되는 상황이 되지 않았겠어?
"도대리. 회의 좀 하자."
"네.. 네? 회의요?"
들고 있던 다이어리를 아빠바카라상에 잠시 내려놓고
글씨와 표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A4출력물을
아빠에게 건네던 권과장.
"어. 부장님 하고 민차장님 모시고 회의실로 와"
"아 넵! 알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회의실로 발길을 옮기는 권과장.
권과장이 떠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정현이가 눈에 들어오는 거야.
"아~ 갑자기 웬 회의지? 그것도 왜 나만?"
아빠의 짜증 섞인 질문에 평소 같으면 맞장구치며
조잘 댔을 정현이 임에도. 웬일인지 모니터만
응시하며 아무 말이 없었어.
"야?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어.."
"갑자기 무슨 회의를 한다고.."
"내가 어떻게 알아?"
한숨 쉬듯 퉁명스럽게 얘기하는 정현이.
"아직도 삐졌냐? 야아~ 나도 몰랐다니까?"
"회의.. 안 들어가세요?"
"어? 아.. 가.. 가야지.."
기분을 풀어주려 일부러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에
오히려 더 딱딱하게 회의 안 가냐며 묻는 정현이.
정말 평소와 너무 다른 정현의 모습에 당황스럽다가도
서운하기도 한 게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어.
"도대리 어제 얘기했던 버그는 내가 확인했어.
문제없이 잘 돌아가던데? 앞으로는 두 번 확인 안 하게
잘 체크해 줘."
"네.."
한 부서에 간부급 인사만 모인 회의실.
개개인적으로 보면 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인데
회사라는 공간, 직급이라는 위치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더라고.
더군다나 회사에 들어와서 회의 자체에 참여하는 게
아빠는 처음이었고 말야.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원급 특히 아빠 같은 말단 사원일 경우에는
회의에 껴주지도 않았거든. 전 직원 회의면 모를까...
"그리고 지금 나눠드린 유인물에 보시는 것처럼
도리 대리가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는 이번 상반기까지..."
나눠준 출력물을 보면서 혼자 뭔가를 계속 이야기하며
회의를 진행하는 권과장.
'뭐..라는 거야..'
분명 내가 하는 일이고, 내가 관계된 일인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더라..
"목표로 하는 완료 시점은 여름휴가기간 이전인 7월 말.
테스트 기간 포함 하여 최종 아웃풋은 빠르면..."
'와.. 7월.. 일만 하란 소리구나...
벌써 내일 모레면 4월인데..'
"빠르면 5월, 늦어도 6월 말까진 완료하여
2~3주간 테스트 및 버그 수정을 거친 후 최종검수하여
서비스될 예정입니다."
'자.. 잠깐.. 5월?'
권과장의 말은 다시 정리하면 시간이 얼마 없다.
야근을 하던 주말을 반납하던 어떻게든
뼈를 갈아 넣어서라도 해내라 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져 숨이 막힐 정도였지.
"이.. 이의 있습니다?"
아빠의 한마디에 안 그래도 무거웠던 회의실 분위기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확 얼어붙기 시작했어.
"이의?"
"아.. 아니 질문.. 질문 있습니다. 말이 헛..."
왜 말이 그렇게 나왔는지. 엄숙한 분위기가 마치
티비나 드라마에서 보던 법원처럼 느껴졌던 건지,
아니면 속마음이 그대로 나온 건지. 아빠의 발언에
도끼눈을 뜨며 쳐다보는 권과장에게 단어를 정정하는
아빠였어.
"질문해봐"
"이제 곧 4월인데.. 5월까지 완성하라는 건..."
"하라는 건?"
"..."
아빠도 모르게 꿀꺽 넘어가는 침.
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
갑자기 시작된 정신없는 아빠의 신체 활동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까지 잊어버리게 만들기
충분했지.
"아.. 아닙니다. 해보겠습니다."
당황하는 아빠와 채직질 하는 권과장을 보며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회의 내내 웃고 있던
팀장님.
"좋아 좋아~ 아~주 좋아~"
갑자기 더욱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어.
"우리 부서 엘리트들만 여기다 모였네?
앞날 창창한 거 보이냐? 어? 도리야?"
'부서는 모르겠고 깜깜한 내 앞날은 보입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억지로 삼키며
아무 말 없이 팀장님을 향해 웃어 보이는 아빠였어.
그때였어.
회의가 너무 숨 막혀서 미쳐 신경 쓰지 못했는데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살짝 기대 있던 민차장의
모습이 눈에 띈 거야.
뭔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랄까?
맘에 안 드는 표정이랄까?
"응? 도대리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고 있다는 걸 눈치라도 챈 걸까? 갑자기
웃는 얼굴로 일순간 변하던 민차장.
"아닙니다..."
민차장의 질문에 내게로 집중되던 모두의 시선은
더 이상 아빠가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기 충분했지.
"그러니까 오늘 회의 목적은 업무 브리핑인 거죠?
도대리 진급기념 회의 체험도 일부 있고?"
'아...'
지나가듯 살짝 던진 민차장 말에 이 회의가
왜 진행 되었는지 그제서야 이해가 되더라고.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좋아요. 끝났으면 나가시죠? 부. 장. 님.?"
"야~ 부장 말고 팀장이라고 부르라니까?"
팀장님의 앙탈이랄까? 땡깡이랄까?
장난스런 말과 함께 끝나버린 회의.
"도리 먼저 나가. 정리하고 나갈 테니까."
"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야 내가 하고 나갈게. 앞으로 열심히 해보자."
"네..."
내가 하겠다는데도 굳이 끝까지 뒷정리를 자초하는
권과장. 불편하지만 어쩌겠니. 억지로 회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도리야~"
"네?"
아빠를 불러 세우는 권과장.
"며칠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네? 어떤.."
"이익관계. 잊지 마라 우린 이익관계다."
그놈의 이익관계. 권과장이 강조하는 이익관계라는
그 말이 어찌나 듣기 싫던지.
그 말은 말야. 아빠의 열정도, 아빠의 기대도,
아빠의 희망도 모두 부질없다고, 아무 의미 없다고
부정해 버리는 버튼 같은 느낌이었어.
그 말만 들으면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으니
말이지.
"네.."
"가서 일 봐 그럼."
'하아...'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흡연실로 발걸음을
옮겼어.
"이쪽으로 올 줄 알았지!"
"어? 차장님?"
흡연실문을 열자마자 아빠를 기다리고 있던 건
흡연실에 비치된 의자에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민차장이었지.
"어휴.. 담배냄새. 전에 내가 정현이한테
밖에서 기다리지 왜 안에서 기다리냐고 뭐라 했는데
역시 사람은 자기가 그 입장이 돼 봐야 돼? 그치?"
알다가도 모를 말을 건네는 민차장.
'빨리 안 들어가면 또 권과장이 뭐라 할 텐데...'
괜히 주머니 속 담뱃갑을 주무르다
결국 담뱃갑을 꺼내 민차장에게 살짝 보여주며
물었지.
"저 담배 한 대만 피우면 안 될까요...?"
아빠의 소심한 질문에 환하게 웃던 민차장.
"응! 안돼. 나 나간담에 펴."
"네..."
환하게 웃길래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당연히 될 거다라고 생각했다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제일 허탈한 것 같아. 그치?
"뭐 하실 말씀이라도.."
"음.. 하실 말씀이라기보다..."
"혹시 권과장님 때문이라면 전 괜찮습니다."
"응? 권과장이 왜? 너 괴롭혀?"
"아?"
솔직히 다 말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보던
민차장.
당연히 권과장 일 때문일거라 생각해서 얘기했던 건데
졸지에 고자질 쟁이가 될 상황에 놓여버린 거야.
하지만 다행히도 장난이었다는 듯 살짝 웃으며 말을
잇는 민차장이었지.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네? 저한테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민차장.
"내가 정말 아끼던 가방이 있거든? 너무 좋아서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자주 들고 다녔어."
"오.. 비싼 건가 봐요?"
"응? 아니야. 꼭 그런 건 아닌데 왜 있잖아. 이유 없이
맘에 들고 이유 없이 좋아지는 거. 그리고 사실
의미가 좀 있는 가방이었거든"
회사에서 민차장과 이렇게 사적으로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역시 대리다니까 민차장도 나한테 하는
대우가 바뀌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런데 말야. 얼마 전에 선물로 되게 비싼 가방을
하나 받았지 뭐야? 전에껀 되게 싸구련데.."
"아~ 그럼 그거 들고 다니시면 되잖아요? 오늘 아침에
들고 오신 거 그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빠의 질문에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젓더니
말을 잇는 민차장.
"내 고민은 그거야. 좋은 가방이 생겼으니 이전에쓰던
낡은 가방은 버려야 할까? 내가 엄청 좋아했고,
추억도 많이 깃든 가방인데. 어디 고장 나지도 않았고"
"그걸 왜 버려요? 버릴 거면 저주세요.
아니 저도 주지 마세요."
왜 화가 났을까? 가방을 버려야 할까라는 민차장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던 것 같아.
"그거 버리면 분명 후회할걸요? 물론 고장 나거나..
그리고 의미가 있는 가방이라면서요. 그거 버리는 순간
의미도, 추억도 다 버려지는 거라고요."
"그치?"
"제가 오래 산건 아닌데요.. 살다 보니까 느껴지는 게
다른 거 다 버려도 추억. 이건 절대 버리면
안 되는 거 더라고요. 의미가 있다면 더더욱이요."
"좋아~ 도리말대로 해야겠네? 오늘 저녁에
오랜만에 정현이랑 셋이 술 한잔 할까? 축하파티해야지?"
"차장님이 사시는 거예요?"
"너.. 이제 애 봐야 돼요~ 집에 가야 돼요~ 이거 안 하네?
시간이 흐른다는 게 이게 참 무서운 거야 그치?"
술을 사주냐는 물음에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민차장.
"이제 적응돼서요. 와이프도 주말에 휴가 주면 돼요."
"적응된다는 것도 참 무서운 거고.. 일단 퇴근 후에 보자.
담배피고 들어와."
그 말만을 남기고 흡연실을 떠나는 민차장.
권과장의 이익관계란 말도 어느덧 잊혀지고
'오늘 저녁 뭐 사달라고 할까?'
라는 생각만 신나게 하고 있던 아빠였어.
"아휴~ 이럴 거면 회의를 왜 부른 거야?"
"..."
자리로 돌아와 평소처럼 정현이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아빠.
평소라면 맞장구치고 자기가 더 짜증 난다는 듯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수다를 떨었을 정현이 임에도.
무슨 일인지 모니터만 응시하며 마우스를 흔들뿐
아무 반응이 없었지.
"너 어디 아파?"
"네?"
"아픈 거 맞네. 네 라니? 너 갑자기 왜 이래?"
"아.. 어.. 너.. 대리.."
"야! 친구사이에 그런 게 어딨어. 난 또 뭐라고
그래서 그런 거야 지금까지?"
겨우 그 이유 때문에 나한테 거리 두었다는 생각에
괜히 서운하고 속상해 소리를 질러버린 아빠.
시간이라도 멈춘 듯 잠시 아무런 미동도 없던
정현이 눈으로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볼을 지나
턱까지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어.
"야.. 화낸 거 아니야... 그냥 서운해서.."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어깨를 두드려줘야 할지
안아줘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뒤에서 민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니들 또 사랑 싸움하니?"
살짝 짜증 섞인 그라나 너무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민차장.
"그나저나 정현아 도대리가 가방 버리지 말라던데?
의미 있고 추억이 있는 걸 버리면 후회한다나?"
눈물을 흘리던 정현이는 민차장에게로 시선을 옮겼어.
"뭐.. 도대리는 그런 사람일 거라고. 본인이 그렇게
타인을 설득할 정도니 말야."
결국 몸을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내던 정현이.
몸을 일으켜 도망치듯이 사무실 밖으로 뛰어 나가더라고
"저이저이. 단무지새끼. 이젠 대놓고 뛰 다니네."
뛰어나가던 정현이와 사무실입구에서 부딪힌 팀장님.
살짝 짜증스럽게 혼잣말을 하며 자리로 가서 앉으시더라고.
정현이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아 민차장에게 물었어.
"차장님 정현이 왜 저럴까요?"
잠시 고민하던 민차장. 한마디를 남기고 자기 자리로
걸음을 옮겼지.
"글쎄? 이따 술 먹으면서 물어보던가?
그나저나 어떻게 끌고 나가지?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