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다는 건...

by도리

익숙해진다는 건 참 무서워?

그렇지 않니?


왜 그렇게 됐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건지.


의심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내 일부가 되어버리는 거거든.


그 익숙해진 것들이

처음부터 좋았을 수도 있고,

정말 싫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야.


만약 그것들이.

정말 내가 끔찍이도 싫어했던

모습들이라면..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면..


그건 익숙해진 걸까?

익숙해졌으니 정말 괜찮아진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치이고 다치고 노출돼서

덤덤해진 걸까?


참 우리네 인생같지 않니?




"도리! 또 조네? 정신 안 차리냐?"



업무 시작한 지 30분 정도 됐나?

쏟아지는 졸음에 고개를 꾸벅거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아빠가

못마땅한지 조금은 화난 말투로

아빠에게 짜증을 내는 권과장이었지.



"너 요즘 습관된 것 같다? 밤에 뭐 하길래

회사에서 자?"


"애 때문에..."


"애는 세상에서 너 혼자 키우냐?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


"죄..죄송..."


"그 죄송하단 말 좀 안 하면 안 되냐?

맨날 죄송 죄송. 죄송하면 죄송할 짓을

하지마!"



아침부터 또 왜 이렇게 난리인지.



'하아.. 오늘 아침엔 떨어졌나..?'



정말 미진이 말대로 주식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지.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놓고는 탕비실로

들어가는 권과장.


정신 차려야겠단 생각에 양 뺨을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고 있는데



"왜! 왜 이래? 자해는 안 돼!"


"... 넌 또 뭔 소리야...."



내 양팔을 붙잡으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정현이었지.


잠시 후


탕비실에서 컵을 들고 나오는 권과장.

한 걸음.. 한 걸음..

그 걸음은 아빠를 향해있었어.



"작업은 어디까지 됐니?"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로 물어오는

권과장.



"죄송합니다. 아.. 아직 기획서 파악 중에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파악하겠습니다."


"그래. 천천히 꼼꼼히 살펴보고 해.

잘하고 있다."


"..."



잘하고 있다는 격려와 함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자기 자리로 이동하는 권과장



'뭐야.. 그새 오른 거야?'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아니 그냥 모르고 싶은

권과장 그 자체였던 것 같아.


권과장이 자리를 뜨자.

이번엔 민차장이 머그컵을 들고

아빠 자리로 찾아왔어.



"도리? 바쁘네?"


"아? 차장님. 안녕하세요?

머리..스타일 바꾸셨네요?"


"아닌데? 안 바꿨는데? 바뀐 것 같아 보여?"


"아.. 그럼 목걸이 바꾸.."


"그것도 아닌데.."



분명히 뭔가 평소와 달라 보이는 민차장.



"아! 그럼 화장을..."


"... 너 지금 스무고개하니?

도리가 내가 많이 편해졌나 보구나?"



근데 그게 뭔지 확실히 모르겠는 거야.

계속 헛다리만 짚을 뿐이었지.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민차장은 살짝 줄어든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을 건넸지.



"우리 태권브이 만들기로 했다며?"


"네?"


"부장님이 그러던데? 너 기획서 보여주니까

우아.. 태권브이를 만들으라고요?

이랬다면서?"


"알고... 계시네요...?"



그때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귓속말을 하는

정현이



"나도 알아..그거 디자인.. 내가 할거야...."


"아..."


"요이 요이 단무지새끼 또 일 안 하고

떠들고있어!

엥? 민차장, 너도 애네랑 같이노냐?"



방금 흡연실에서 나오신건지 담배냄새

풀풀 풍기면서 우리쪽으로 웃으며

다가오는 팀장님.



"다들.. 알고계시네요?"


"뭐가? 아~ 내가 말했잖아. 단무지, 민차장,

권과장, 너 이렇게 한팀 만들거라고."


"아직 미확정이고 비공개라고도 하셨죠..."


"... 도리 이새끼 이거 많이컸다?

시비 거는 거야? 너 지금 나 괴롭히는 거냐?"


"..."



웃으며 배를 주먹으로 살살 샌드백 치는

복서처럼 툭툭 치며 장난을 치는 팀장님.



"아휴.. 팀장님이 괴롭힘 당할 분이세요?

자. 도리 그만 괴롭히고 일하러 가죠?

도리? 이따 점심에 정현이랑 밥 먹으러 가자?"


"네? 넵!"



그렇게 팀장님 등을 떠밀며 자리를 뜨는

민차장이었지.



"뭐? 니들 나 왕따시키냐? 나도 데려가

이것들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조금은 징징대며

끌려가는 팀장님이었지만 말야.



"오전 시간 엄청 기네? 도리. 뭐 먹을래?"


"비싸고 양 적은 거요~"


"..."



민차장의 물음에 장난스럽게 던진 한마디.



"오! 비싼거 좋다! 근데 도리야.

왜 양 적은 거야? 비싸고 양도 많으면

안 돼?"



"양이 적어야 계속 먹어서 돈이 많이 나오지~"



정현이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차장.



"나.. 아직 내가 산다는 얘기 안 했는데?

도리 돈 많이 벌었나봐?"



언제나 그랬듯이 누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주는 민차장이었지.


한참 거리를 서성이며 고민하다가

시간때를 놓쳐버려 어딜 가도

대기열이 어마무시하게 긴 거야.

결국 제일 줄이 짧은 분식집으로 들어갔어.



"미안하네. 비싼 거 못 사줘서?"


"우와.. 차장님 뒤끝 있으시네요?

이건 몰랐다. 일기장에 적어놔야지?"


"... 정현아 도리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아빠의 행동이 웃겼던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었던건지 살짝 웃으며

정현이에게 말을 건네는 민차장.



"도리가~ 점점 사람 되어가고 있어.

처음엔 돌멩이처럼 넵! 알겠습니다!

아무거느으아 즈알 먹습니이두아앗!

이랬는데 요즘은 말랑말랑한

카라멜 같아. 그것도 아주 느끼한..."



정현이의 말에 어깨에 손을 올려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어.



"그거..칭찬이지?"


"아.. 아마도..?"



각자 자기 몫의 라면과 두 줄의 김밥

그리고 떡볶이. 그렇게 풍족하게

우리의 식사는 시작됐지.



"이집은 다른 분식점 같지 않게

떡볶이가 많이 매워? 요즘 애들은

매운 거 잘 먹나?"


"언니 요즘 매운 떡볶이가 유행인 거 몰라?

떡볶이가 만 원이 넘어가길래 도대체

뭐가 다른 거야? 하고 시켜봤다가

너무 매워서 다른 세상 사람 될 뻔했잖아..."


"너 매운 거 못 먹었잖아? 잘 먹네?"


"근데 묘하게 맛있더라고? 먹다 보니까

적응돼서 이제 이 정도는 후훗.. 우습달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열심히 라면을

흡입하고 있다가 문득 번쩍 하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사레가 들려버렸지 뭐야...



"컥컥.. 아! 알았다."


"아 깜짝이야! 뭐? 뭔데? 뭘 알아?

나도 좀 알자. 응?"


"무.. 물 좀!"



정현이가 급하게 따라준 물을 시원하게

원샷하고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어.



"차장님. 원래 금색 귀걸이 하지 않았어요?

은색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빠의 말에 살짝 웃는 민차장.



"뭐야. 아직까지 내 달라진 점

찾고 있었던 거야? 너야말로

뒤끝 긴데?"



"아니~ 아까부터 뭐가 다른데 했는데

지금 보니까 귀걸이였네~ 맞죠?"



아빠의 말에 괜히 귀를 한번 만지작하던

민차장.



"맞아~ 원래 은색 별로 안 좋아하는데

딸이 용돈 모아서 사온 거야. 다른 것도

해보라고. 그래서 한 번 해봤어. 어때?

잘 어울려?"


"와..언니 나 진짜 몰랐다...

언니가 금 귀걸이만 하는 것도..

도리 너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은데?"



정현이의 칭찬 아닌 칭찬에 살짝 어깨가

들썩이려고 하는데



"나도 물 좀"



민차장이 아빠 옆에 물통을 가리키며

물컵을 내미는 거야.

물을 받아 든 민차장.



"익숙해서 그러지. 항상 옆에 있고

항상 그 모습이니까."


"익숙하면 더 잘 알아채야 되는 거잖아요?

정현이 니가 잘못했네~"



아빠의 장난스러운 질바카라에 입술을 내밀며

나 삐졌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현이. 그런 정현이가 귀엽다는 듯이

양볼을 살짝 잡아당기는 민차장이었지.



"아니? 오히려 반대야.

익숙하니까 작은 변화는 잘 몰라.

맨날 보던 하늘인데 구름이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 누가 기억해?"


"그죠? 그거 일일이 기록하는 사람 아니면"


"비라도 내리거나 눈이라도 내리면

그때 아는 거지.

아, 오늘 하늘이 달랐구나."



민차장의 말은 늘 그렇듯 아빠를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데 충분했지.



"뭐해? 다 먹었음 가자?"


"응? 저 아직 다 안 먹.."


"어? 너 다 안 먹은 거였어? 멍하니 있길래

다 먹은 건 줄..."


"하아.. 김밥 두 개밖에 안 먹었는데에!"



이미 텅텅 비어있는 김밥 그릇과

떡볶이 그릇. 그리고 두 볼 가득 음식물을

넣고 씹고 있는 정현이였지.


사무실 안.


밥 먹고 한참 졸릴 오후 1시 20분.

졸면 또 권과장이 혼내겠지 싶어

담배도 피워보고 세수도 했는데도

무거워지는 눈꺼풀은 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점점 내려앉고 있었어.



"도리!"


"헛.. 아.. 안 졸았습니다."



뒤에서 살짝 의자를 흔들며 말을 거는

권과장.



"이제 죄송합니다! 이거 안 하네?

졸리지? 커피 마셨냐?"


"아..아직.."


"그래?"



그 말만 남기고 또 자리를 뜨는 권과장.



'뭐야.. 상한가인가..? 아니면 조울증..!?'



잠시 후 커피를 들고 나타났어.

아리송한 눈빛을 보내는 아빠를 본건지

못본건지. 커피를 건네는 권과장이었지.



"쉬엄쉬엄해라. 전에도 말했지만

건강은 누가 따로 안 챙겨준다."



커피를 받아 들자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에 가서 앉는 권과장.


한동안 키보드 앞에 올려놓은 커피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



"그 아저씨 츤데레 아냐?"


"뭐? 뭔데레? 그건 또 뭐야?"



퇴근 후. 씻기 위해 옷을 벗으며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데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엄마가 아빠에게

말을 걸었지.



"그.. 나쁜 남자? 막 잘해주는데

뭔가 쑥스러워서 괜히 퉁퉁거리는..

어..맞나 이게 그 뜻이..?

아무튼 그런 거 아닐까?"


"... 어 아니야.. 하아..

갈수록 왜 자꾸 이러냐..."


"흥! 또 면박줬어. 나쁜 개도리."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물이나

한 잔 마실까 싶어서 냉장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에 붙은 가스요금

미납 고지서가 보이는 거야.



'뭐야..'



별생각 없이 금액을 확인하고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렸지.



'다행히 월세는 냈는데 뭐...

그리고 어차피 안 내면 또 날아올 텐데...

그때 내면 되지...'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


전기세 낼 돈이 없어 연체하다 결국 전기가

끊어지던 그날 밤이 생각나더라고.


컴컴한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울면서

소리지르던 그날 밤.


도희가 와서 속상한 마음을 억지로

눌러가며 전기세를 내주던 그날..



'이것마저 익숙해진 건가...'



그 생각은 결국 아빠를 공포로 밀어넣기에

충분했지.



/"익숙하니까 작은 변화는 잘 몰라."/



민차장의 말처럼 지금 이 상황이, 가난이

어느새 내 일부처럼 자리 잡아

적응이 되고 익숙해져 버린 거라면

나는 평생 계속 밑으로만 떨어지겠구나.


난 고작 월세 밀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할 만큼. 그리고 다른 걸 덮어버릴 만큼

이 상황에 익숙해져버렸구나.


그리고


내가 좀 더 변해야 되겠구나.

비바람을 몰고 오던, 태풍을 끌어오던

뭐라도 해야겠구나.



"냉장고 앞에서 뭐 해? 눈싸움해?"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엄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어.



"응? 아니. 씻어야지... 보일러 좀 틀어줘"


"웅!"



그렇게 욕실 문을 열고 걸음을 내딛는데

속에서 끌어오르는 말이 아빠도 모르게

큰소리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어.



"마누라!"


"웅? 조금 기다려야 되는데?

바로 안 따듯해져~"


"나 열심히 살거다! 조금만 더 고생해

내가 다 보상해줄 거야!"



아빠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엄마.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했어.



"응! 나는 도리아저씨 믿어!"







이전 28화시동(始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