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할까?
인류가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질문이다.
철학자들은 논증했고, 과학자들은 우주를 탐구했으며, 종교인들은 신의 존재를 증언했다. 수많은 바카라이 쓰였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한 것도 아니다.
물론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두 주장의 가능성이 똑같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가진 지식만으로는 이 논쟁을 끝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신이 존재하는지 반드시 알아야 할까?
더 정확하게는, 신이 존재한다고 반드시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이자 창조주이며,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당연하다는 대답이 이상하다.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신을 믿어야 한다는 의무는 별개의 문제다.
설령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우리가 그를 숭배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의 요구가 과연 옳은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하물며 그 존재 자체가 증명되지 않았다면?
그런 신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간이 벌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오히려 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로 유명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에게 이런 질문이 주어졌다.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는데 하나님이 왜 자신을 믿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러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증거가 부족했습니다.”
나는 이 대답이 무척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믿기 싫어서 믿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신이 없기를 바라서 부정한 것도 아니다.
자신이 가진 이성과 지식으로 판단했을 때 신의 존재를 확신할 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러셀에게 벌을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피조물이다.
스스로 자신의 지능을 선택하지 않았고, 태어날 시대와 장소도 선택하지 않았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종교를 접하게 될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배운다. 누군가는 이슬람 국가에서 알라를 배운다.
누군가는 불교 가정에서 자라고, 누군가는 종교를 접할 기회조차 없이 살아간다.
인간이 가진 이성에도 한계가 있다.
같은 증거를 보고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의 존재가 너무나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를 누구나 확신할 수 있도록 드러내지 않은 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원에서 제외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자신이 만든 존재에게 한계를 주고, 그 한계 때문에 발생한 결과를 그 존재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믿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정했다면, 모든 인간에게 충분히 믿을 만한 근거를 제공할 바카라임도 하나님에게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믿지 못한 바카라임을 인간에게만 물을 수 없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공의로운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믿을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인간에게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원한 형벌을 내린다면, 그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두 가지 중 하나다.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에게 불공정한 조건을 요구하는 존재이거나, 애초에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거나.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분은 인간이 자신을 믿었는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판단하실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이 나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만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머리로 인정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것일까?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모세와 아론 앞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한다.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본문이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야훼 이외의 초자연적 힘에도 의지하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런 세계에서 야훼는 자신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명령한다.
나는 이 말을 단순히 다른 초자연적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선언으로만 읽지 않는다.
사람들이 신이라고 떠받드는 존재들이 있다 해도, 그것들이 야훼와 동등한 신일 수는 없다는 선언으로 읽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이든, 사람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다른 영적 존재든, 그것들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에게 충성하라는 명령도 있다.
그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른다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십계명을 다시 보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 계명들을 지키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할까?
아니다.
무신론자도 살인하지 않을 수 있다.
도둑질하지 않을 수 있다. 거짓말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탐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인가, 하나님이 옳다고 정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인가?
나는 이 질문의 답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기독교가 가장 크게 잘못 이해한 말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로 ‘믿음’이다.
기독교에서는 흔히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고, 그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가르친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정말 그런 뜻일까?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소크라테스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이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그의 가르침을 신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예수가 옳았다고 믿는 것이다.
그가 가르친 사랑이 옳고, 용서가 옳고, 욕심을 버리라는 말이 옳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옳다고 믿으니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정보를 사실로 인정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가 보여준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행위가 아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자신의 욕심을 중심에 놓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이 옳다고 정한 삶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죄인이라 손가락질받는 사람들과 식사했으며,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섰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고 부활을 믿으면서도 정작 그가 보여준 삶은 외면한다면, 그것을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이다.
놀라운 말이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전히 예수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예수에 관해 무엇을 믿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일까?
나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리는 신앙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의 결과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고민했고, 그 결과가 교리로 정리되었다.
문제는 교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돕는 수단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신앙의 목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
예수의 죽음은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했는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가, 행위로 받는가.
이 질문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런 논쟁에 몰두하는 동안 예수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친 삶의 변화가 뒷전으로 밀려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교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단이다.
특정한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그다음 문제가 된다.
생각해 보자.
평생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정직하게 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확신하고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매주 교회에 나가고 기도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약자를 무시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
기독교가 첫 번째 사람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올바른 신앙고백을 했다는 이유로 구원을 약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와 얼마나 닮아 있을까?
물론 기독교 안에도 믿음에는 반드시 삶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는 전통이 있다.
나는 그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신앙의 경계를 나누는 데 사용되는 것은 여전히 교리적 고백인 경우가 많다.
예수처럼 살아가는 무신론자보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기독교인을 더 하나님에게 가까운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그 판단이 거꾸로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에게 가까이 사는 것은 다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도 다르다.
교리가 이 차이를 지워버릴 때, 기독교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예수에게 가까이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원죄와 예정론, 대속과 구원에 관한 교리들이 잘못 결합하면 인간의 삶보다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나 교리적 믿음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 구원받을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으며, 예수의 죽음이 죗값을 대신 치렀으니 그것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면, 인간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놓이게 될까?
물론 모든 교회가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원죄와 예정론, 대속을 이해하는 방식도 교단마다 다르다.
그러나 나는 어떤 교리든 인간의 바카라임을 약화하거나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이해된다면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면, 그 자유의지는 실제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욕심을 따를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이웃을 해칠 수도 있고 도울 수도 있다. 미워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다.
그 선택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
그런데 구원이 결국 특정한 신학적 명제를 믿었는지에 달려 있다면, 인간이 살아온 삶은 무엇이 되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은 신학 시험의 답안지를 채점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너는 내가 유일신이라는 것을 믿었느냐?”
“예수가 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느냐?”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였느냐?”
이런 질문에 정답을 맞힌 사람만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삶보다 인간의 지식을 평가하는 분이 된다.
그것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 않은 지식 말이다.
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판단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묻는다면 오히려 이런 질문일 것이다.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네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했느냐?”
“네 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을 때 어떻게 했느냐?”
“너는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켰느냐?”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이 질문들이 훨씬 자연스럽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예수의 가르침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하고 싶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틀린 말이 될까?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가르침이 무의미해질까?
용서와 자비, 정의와 사랑이 갑자기 가치를 잃게 될까?
그렇지 않다.
예수가 보여준 삶의 가치는 신의 존재 여부와 별개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예수가 부활했는지는 신앙인에게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고 해서 예수가 가르친 삶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다.
부활을 설명하지 못해도 용서할 수 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고, 사람들에게 지금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바로 그 나라를 살아보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
예수가 옳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살아보는 것이다.
그 삶이 어떤 세상을 만드는지 우리는 지금 확인할 수 있다.
모르겠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나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믿는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 문제로 논쟁할 수는 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원하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분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알고 계실 것이다.
인간에게 충분한 확신을 주지 않았으면서 확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는 분이라면, 그분에게는 공의의 결함이 생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데 목말라하는 분이 아니다.
그분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정한 삶을 살아가는 일이라고 믿는다.
예수는 그 삶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가 보여준 삶보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쏟아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앞세웠고, 그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으로 규정했다.
정작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
과연 누가 하나님에게 더 가까운가?
나는 기독교가 이 질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이 존재하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예수가 옳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