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썸바디와 썸씽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대답이 제각각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틀린 대답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는 예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해석하고, 부활의 역사성을 논증하고, 구원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습니다.

여기서 두 개의 영어 단어를 꺼내고 싶습니다.

Somebody와 Something.

Somebody는 어떤 사람입니다. Something은 어떤 일, 어떤 사건입니다.

예수를 Somebody로 바라보면 질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엇을 좋아했을까?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무엇을 가르쳤으며, 왜 그런 삶을 살았을까?

반면 예수를 Something으로 바라보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예수는 왜 죽었을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일까? 부활은 실제로 일어났을까?

그 사건이 나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물론 두 관점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을 먼저 바라보느냐에 따라 신앙의 모습은 크게 달라집니다.

저는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보다 예수라는 사람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였습니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이었을까요?

기독교는 예수를 특별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를 특별한 존재로만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예수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사람이었으니 특별하게 살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대소변을 가렸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울었을 것이고, 누군가 먹여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몸이 더러워지면 씻겨주어야 했고, 혼자 걸을 수 없었으니 누군가 안아주어야 했겠지요.

그도 우리처럼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아기였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넘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말을 배우고, 세상을 알아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예수가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지혜가 자랐다는 것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키가 자랐다는 것은 그의 몸 역시 우리와 같은 성장의 과정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는 예수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배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로 이 땅을 걸어 다닌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배우며 자신의 삶을 살아낸 인간이었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음서는 예수의 어린 시절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언제 자신의 사명을 자각했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어떻게 경험했는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의식이 생겼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왜 하필 나일까. 내가 정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혼란스럽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오래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기도하고, 시험을 겪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확인된 예수의 성장 과정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떠올려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고민하고 성장하는 예수가 처음부터 모든 답을 알고 있었던 예수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집니다.


예수는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예수는 사람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가 전한 말씀은 분명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예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어부를 만나고, 세리를 만나고, 병든 사람을 만나고, 가난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중 몇몇은 제자로 삼아 함께 다녔습니다.

그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혼인잔치에도 참석했습니다. 사람들과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세리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과도 어울렸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근엄한 얼굴로 설교만 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웃기도 했을 것이고, 제자들과 농담도 나누었을 것입니다.

길을 걷다가 피곤하면 쉬었을 것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즐거웠을 것입니다.

성경에 그 모든 일상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진짜 인간이었다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물론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릴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도 울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죽음이 가져온 이별과 슬픔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그 눈물이 좋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슬픔을 멀리서 관찰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슬퍼했습니다.

그런 예수에게 이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단지 사명을 마치고 떠나야 할 곳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웃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고통과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자체를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나 찾아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 말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흔히 죽은 뒤에 가는 천국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도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 나라가 먼 미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삶에서 시작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라고 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재물을 쌓아두는 일보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단순히 잘못한 일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욕심과 내 이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가르친 것을 말로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던 사람들의 곁에 섰습니다. 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과 식사했습니다.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았고,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며 가르침을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가르침과 삶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설명한 사람이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먼저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 것은 부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하기 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다음에 죽었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순서가 그렇습니다.


예수도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의 삶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 겟세마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괴로워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는 예수가 심히 놀라고 슬퍼하며 자신의 마음이 죽을 만큼 괴롭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다시 식탁에 앉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나고, 아직 전하지 못한 말씀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에게도 소중한 일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물론 복음서는 예수가 바로 이런 이유로 죽음을 피하고 싶어 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저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에게도 자신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자신의 뜻이 없었다면 이런 기도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저는 이 짧은 문장에 예수의 위대함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두려움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두려웠지만 따랐습니다.

자신의 뜻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뜻이 있었지만 끝까지 관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하는 순간 예수의 결단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신이니까 할 수 있었던 일.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니 가능한 일.

어차피 부활할 것을 알았으니 감당할 수 있었던 일.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의 고뇌도, 두려움도, 결단도 그 무게를 잃습니다.

반면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예수도 두려웠습니다. 예수도 살고 싶었습니다. 예수도 자신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선택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가 더욱 위대해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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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Somebody보다 Something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가 죽고 부활한 뒤, 그의 제자들은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중요한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예수의 생애를 자세히 소개하기보다 십자가와 부활이 갖는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라는 사람의 삶과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이 함께 전해졌습니다.

이후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로 성장했습니다.

교리가 정리되고, 교회 조직이 만들어지고, 예수가 누구인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도 이어졌습니다.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누구인가.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리와 종교적 권위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일이 그의 인간적인 삶을 이해하는 일보다 앞서게 된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를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이 곧 예수의 권위를 낮추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예수가 인간이었다고 해서 그의 위대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위대해집니다.

우리가 겪는 두려움을 겪고, 우리가 품는 욕망을 품고, 우리처럼 사람들을 사랑했던 인간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라는 Somebody보다 예수에게 일어난 Something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보다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가르쳤는지보다 그의 죽음이 어떤 구원의 효력을 갖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가 살아낸 하나님 나라보다 그를 믿고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처럼 살지 않아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삶은 본받으면 좋은 모범 정도가 되고, 구원과 부활을 믿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 되어버립니다.

Somebody는 희미해지고 Something만 남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모르면서 그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예수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 모르면서 그의 십자가가 무엇을 위한 죽음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의 삶을 건너뛰고 그의 죽음만 붙잡는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를 믿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서 저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모순을 발견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죽은 뒤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예수처럼 사랑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일도 어렵고,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는 일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받고 싶습니다.

부활도 하고 싶습니다.

천국에도 가고 싶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면서 죽은 뒤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 나라일까요?

혹시 죽지 않는 삶, 고통이 없는 삶, 영원히 행복한 삶만 원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라면, 그 통치를 지금은 거부하면서 나중에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됩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의 순서가 뒤집힌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순서를 거꾸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부활부터 경험한 다음 예수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죽은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살아보겠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인간이 선한 삶을 얼마나 실천했느냐에 따라 부활을 얻을 자격이 결정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가 살아낸 삶을 거부한다면, 그 믿음은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예수가 옳다고 믿는다면 예수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역시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섰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입니다.

회개란 결국 그 선택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자신의 뜻만 관철하려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인간 예수를 사랑합니다

저는 예수를 생각할 때 십자가와 부활만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던 아기 예수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말을 배우고, 걸음을 배우고, 세상을 알아가던 어린 예수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했을지도 모를 청년 예수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걷고,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던 예수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예수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두려움에 떨며 기도하던 예수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는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조금 더 살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예수를 사랑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예수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에 두렵고 괴로웠지만 끝내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던 예수 말입니다.

그런 예수를 생각할수록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삶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예수를 통해 보여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구원과 부활보다 예수의 삶이 더 가치 있습니다.

구원과 부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가치 있는 삶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이 없었다면 그의 죽음도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살아내지 않았다면, 부활 역시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길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에 그를 사랑합니다.

예수가 받은 구원과 부활을 바라기 전에, 예수가 살아낸 삶을 먼저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살아보고 싶습니다.

Somebody와 Something.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가 살아낸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먼저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저는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믿는 데서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옳았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가 옳았기에 그를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기에 그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예수를 믿는 이유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에게 일어난 구원과 부활의 사건(Something)을 믿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고뇌하고 결단하며 하나님 나라를 먼저 살아낸 예수(Somebody)를 사랑하고 그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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