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

by김작가씨작업소

영원한 지옥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국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도 있고, 그리웠던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부모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었더니 지옥에 계신다고 합니다.

영원히 그곳에서 고통받으셔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부모님이 지옥에 계시든 말든 천국의 행복을 누리시겠습니까?

저라면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천국에 도착했는데 그 순간부터 지옥이 시작된 셈이니까요.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공의로운지 알게 되기 때문에 슬프지 않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부모님이 마땅히 벌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부모님이 영원히 고통받아도 괜찮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형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걸까요?

아니면 가족에 대한 기억을 지워주시는 걸까요?

그것도 이상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야 행복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떻게 완전한 사랑의 나라일까요?

기억을 지워야 행복해진다면 그곳에 있는 나는 과연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요?

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교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설명하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회복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정말 회복되었을까?

성경에는 모든 것을 잃었다가 회복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욥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를 잃습니다.

건강까지 잃고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은 욥에게 이전보다 두 배의 재산을 주십니다.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도 얻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욥이 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끝납니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결말입니다.

고난을 이겨낸 의인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을 회복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욥에게 새로 태어난 열 명의 자녀가 먼저 죽은 열 명의 자녀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양 천 마리를 잃었다가 이천 마리를 얻으면 재산은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다릅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죽은 아이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각자 고유한 생명입니다.

욥이 새로 얻은 자녀들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먼저 죽은 자녀들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요?

그 아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잊을 수 있었을까요?

욥기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물론 욥기의 저자가 욥의 슬픔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명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자는 재산과 자녀를 다시 얻는 장면을 통해 회복을 표현하고, 그 뒤에 남았을 상실의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욥기 저자가 하나님의 회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봅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정말 이런 것일까요?

잃어버린 것을 다른 것으로 보상해 주는 것. 죽은 자녀 대신 새로운 자녀를 주는 것.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여기는 것.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라는 금광

저는 성경을 금광에 비유합니다.

금광에는 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흙도 있고 돌도 있습니다.

금을 얻으려면 그 안에서 금을 찾아내야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기록한 바카라입니다.

저자마다 지식이 달랐고, 문화가 달랐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랐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당시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회복을 묘사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재산보다 더 많은 재산을 얻고, 자녀도 다시 얻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과 회복을 보여주는 방법이었겠지요.

그렇다고 그 표현이 하나님의 회복을 완전하게 설명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욥기를 버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욥기에는 의로운 사람도 고통받을 수 있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무조건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도 제기합니다.

그것이 욥기에서 찾아낼 금입니다.

그러나 욥기 저자가 묘사한 회복까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영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영원한 형벌을 가리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해하고 기록한 그 표현만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 계획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문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 문자가 가리키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부활하면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까?

예수는 부활한 사람들에 대해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22:30)

누가복음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부활한 사람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으며 천사와 동등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천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인간은 더 이상 죽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달라지는 것이 수명뿐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9절에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던 것처럼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흙의 형상을 입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왜 악인이 잘살고 의인이 고통받는지, 왜 하나님이 악인을 즉시 벌하지 않으시는지,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여 하늘의 형상을 입는다면 어떨까요?

예수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고, 우리 역시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오래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온전히 이해하고 닮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닐까요?

지금은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이런 뜻을 가지고 계셨구나.”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의 의문들에 대한 답을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성경이 부활 이후의 모든 지식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성경의 여러 말씀을 연결해 생각하는 부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생각하면 천국과 지옥의 문제도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부모님이 지옥에 계셔도 슬프지 않은 이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부활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이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지옥에 계십니다.

저는 부모님이 왜 벌받고 계시는지 압니다.

그분들이 살아오면서 어떤 죄를 지었고, 그 죄로 인해 누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도 압니다.

그러니 부모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을 면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닮은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부모님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라면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공의뿐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 계획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1조 년 동안 벌을 받게 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이 저지른 악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부모님을 새롭게 부활시키십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부모님이 벌받는 것을 막아달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과 영원히 헤어진 것처럼 절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마땅한 벌을 받고, 결국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회복을 모두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는 애통하거나 아픈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억을 지워서 눈물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상실 자체를 해결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png



무한한 생명 앞에서 1조 년은?

1조 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작 수십 년, 길어야 백여 년에 불과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1조 년은 사실상 영원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무한한 생명을 얻었다면 어떨까요?

1조 년은 여전히 엄청나게 긴 시간입니다. 고통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무한한 생명에 비하면 끝이 있는 시간입니다.

1조 년이 지나도, 100조 년이 지나도, 그 이후에 살아갈 시간은 끝없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원처럼 느끼는 시간이 무한한 생명을 사는 존재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심판과 끝없는 형벌도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긴 형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형벌이 반드시 끝없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영벌’이라는 표현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성경 해석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1조 년이라는 구체적인 형벌 기간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리 길고 엄중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회복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종 결말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시는 분일까?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실까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 것일까요?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고 싶지만 구원하지 못하시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룰 능력이 없는 분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할 수 있지만 구원하지 않으시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말씀과 충돌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씀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을 억지로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는 것이 왜 회복의 가능성을 영원히 닫아야 한다는 뜻이 될까요?

인간이 유한한 삶에서 하나님을 거부했다고 해서 무한한 시간 동안 영원히 회개할 수 없다고 단정할 이유가 있을까요?

자신의 죄를 온전히 깨닫고, 피해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그 가능성을 영원히 닫아버리셔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여기서 영벌을 절대적인 교리로 주장하는 태도에 근본적인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겠다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뜻조차 이루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피조물 가운데 끝내 회복시키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니요.

그래서 그 피조물을 영원히 고통 속에 가두어두신다니요.

그것이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일까요?

저는 오히려 하나님을 무능한 존재로 묘사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다면서 정작 그 능력에 한계를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말씀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실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태도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벌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려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교리가 하나님을 높이려는 의도와 달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제한하는 결론에 이른다면, 그 교리를 다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을 우리가 모를 뿐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대해 얼마나 오랫동안 심판받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죽음 이후에도 회개의 기회가 어떻게 주어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새롭게 부활하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 과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하나님도 그 방법을 모르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흙의 형상을 입고 있습니다. 유한한 시간을 살고, 제한된 지식으로 세상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조차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어디까지 단정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등장하는 몇몇 표현을 붙잡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을 모두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확신 아닐까요?

저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실 능력이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방법을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결국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회복시키실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를 설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 편에 서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천국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부활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아직 지옥에 계십니다.

저는 부모님이 왜 벌을 받는지 압니다. 그 벌이 정당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부모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을 면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영원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압니다.

언젠가 부모님이 자신의 죄를 온전히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할 것이며, 하나님이 그분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야 행복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영원한 고통을 외면해야 행복해지는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며, 하나님의 뜻이 끝내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죽은 자녀 대신 새로운 자녀를 얻는 것으로 회복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하나님의 회복은 그보다 훨씬 큽니다.

잃어버린 존재를 다른 존재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존재 자체를 끝내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증명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모두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함께 믿을 때 어떤 결론을 향하게 되는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나님이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이 실패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겠습니다.

월, 금 연재
이전 13화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