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으신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까?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간절히 구하면 응답하신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좋은 온라인 게임에 취직하게 해달라고,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자녀가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심지어 스포츠 경기에서는 양쪽 선수들이 모두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두 사람이 같은 회사의 마지막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둘 다 기독교인이고, 둘 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결국 한 사람만 합격했다.

하나님이 합격한 사람의 기도만 들어주신 것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셨을까?

기도를 더 오래 한 사람? 믿음이 더 좋은 사람? 교회에 더 열심히 다닌 사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기독교인들은 흔히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참 편리한 대답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하고,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응답이 된다.

그렇다면 기도가 실제로 결과를 바꾸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따라 세상일을 바꾸어주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한다고 시험 결과가 바뀌거나, 경쟁 상대가 불합격하거나, 상대 팀이 패배하도록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도는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우리가 기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예수는 기도에 관해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8)

나는 이 말씀이 기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미 알고 계신다.

우리가 병들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고, 생활이 어렵다는 사실도 알고 계신다.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전지한 분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열심히 설명한다. 마치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다는 듯이 말이다.

“하나님, 제가 지금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 이번 시험은 꼭 합격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아이가 아픕니다. 제발 고쳐주세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계실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토록 원했던 일을 이루고도 후회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간절히 바라던 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이렇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을까?’

물론 얻지 못한 것은 모두 필요 없는 것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병을 치료받지 못해 죽는 사람도 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비극까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외면했다거나, 내가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렇다면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행위가 아닐 것이다.


예수는 기도했지만 죽었다

기도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겟세마네에 있다.

예수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 역시 인간이었다.

죽음이 두려웠고, 고통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하나님은 예수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며,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의 죽음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과 예수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다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것이 곧 그 일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로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기도했을까?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계셔서?

아니면 하나님을 설득해 죽음을 피하려고?

예수의 기도를 다시 읽어보자.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는 자신의 소망을 숨기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하나님께 이야기했다.

그러나 자신의 소망을 반드시 이루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것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두려움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는 죽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예수의 기도는 실패한 것일까?

기도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행위라면 실패한 기도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죽음을 피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 두려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다시 확인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해 내 뜻을 이루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돌아보고, 그분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하나님은 예수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굳이 그 마음을 말씀드렸을까?

나는 바로 여기에 기도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게는 필요 없지만 나에게는 필요하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필요한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왜일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는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대화가 필요 없어질까?

아니다.

오히려 가까운 관계일수록 대화가 중요하다.

“오늘 힘들었어.”

“당신이 보고 싶었어.”

“고마워.”

상대방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야기한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상대방과 마음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기도도 그렇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께 말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알고 계시지만,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싶고, 내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싶다.

감사한 일이 있으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다.

때로는 하나님께 화가 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나 내가 직접 말씀드리는 것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나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의 첫 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필요성이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행위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을 걸어도 대답을 듣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왜 막혔을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과 대화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돔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께 의인이 악인과 함께 죽어서는 안 된다며 거듭 질문하기도 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성경 속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떨까?

하나님께 질문해도 대답을 듣지 못한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의견을 주고받을 수도 없고, 모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도 없다.

왜 그럴까?

나는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인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인지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지금 우리가 성경 속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기도는 무의미한 행위일까?

대답을 듣지 못하는 상대에게 계속 말을 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막혔다고 해서 관계까지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화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기다릴 것이다. 다시 말을 걸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 대답이 없다면 결국 말을 걸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대화가 사라지고, 관계도 멀어질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말을 거는 일까지 멈춘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기도는 그 막힌 대화를 다시 이어보려는 시도다.

오늘 대답이 없었다고 내일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일도 대답이 없다고 그다음 날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계속 말을 거는 것이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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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것과 들어주는 것은 다르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과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자주 혼동한다.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교회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시험에 합격했거나 병이 나았거나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일까?

아니다.

듣는 것과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듣고도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다.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나는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고 믿는다.

물론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에 기도한다.

여기서 믿음은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이다.

기도는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다.


하나님께 이야기하다 보면 나를 돌아보게 된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행위라면, 그 관계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나는 여기서 기도의 두 번째 필요성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옳은 일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 이야기하다 보면 질문이 달라진다.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일까?’

‘내가 하려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을 내 뜻에 따르게 하려는 것일까?’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직접 대답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기도하는 중에 떠오른 생각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예수가 보여준 삶과 가르침이다.

예수는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자신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을 그 가르침에 비추어볼 수 있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는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었는데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내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는 않았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단순한 자기 성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자기 성찰은 일기를 쓰거나 명상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기도가 다른 이유는 그 질문을 하나님 앞에서 던진다는 데 있다.

나는 하나님과 대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한다.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시더라도 말이다.


기도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여기서 기도의 세 번째 필요성이 생긴다.

바로 삶의 변화다.

기도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생각해 보자.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런데 기도를 마친 뒤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떨까?

미워하던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욕심대로 행동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면 그 기도는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는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회개는 잘못했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깨달았다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는 선택을 해야 한다.

기도는 그런 변화를 이어가도록 돕는다.

왜 기도를 계속해야 할까?

우리는 한 번의 결심으로 평생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제 욕심을 버리겠다고 결심했어도 오늘 다시 욕심을 낼 수 있다.

어제 누군가를 용서했어도 오늘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니 계속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된 방향에서 돌아서고, 다시 옳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

기도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다.

하나님께 말을 걸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도의 가치를 삶의 변화라는 성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기도했지만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미워하고,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에도 기도는 필요하다.

우리는 완벽해진 뒤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이다.


두세 사람이 모이면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기도를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성경 구절을 잘못 읽은 영향도 있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18장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20)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합심기도의 근거로 자주 사용한다.

두세 사람이 모여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읽어보면 이 말씀은 소원 성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태복음 18장 15절부터 예수는 공동체 안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친다.

먼저 혼자 찾아가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공동체에 알리라고 한다.

그런 다음 땅에서 매고 푸는 일에 관해 말씀하고,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루게 하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자신도 함께한다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여러 사람이 모여 시험 합격이나 사업 성공을 위해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약속이 아니다.

공동체가 잘못을 바로잡고, 판단하고, 용서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문제와 연결된 말씀이다.

실제로 바로 다음 장면에서 베드로는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예수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답한다.

이 흐름을 보면 중심에 있는 것은 소원 성취가 아니라 공동체의 바카라임과 화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구절만 떼어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으로 사용한다.

기도에 관한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마태복음 7:7)

이 말씀을 읽으면 무엇이든 구하기만 하면 주신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는 이어서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느냐고 묻는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한다. (누가복음 11:13)

이 말씀들을 자신이 원하는 물질적 결과를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은 무리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움직이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도록 가르쳤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기도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할 수 있고, 밥을 먹으면서도 할 수 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슬픈 일이 있을 때도 할 수 있다.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말을 하나님과의 대화를 멈추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지 못한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고 해서 말을 걸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려면 계속 말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예수가 가르친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다.

기도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 성찰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만약 기도를 단순히 자신을 변화시키는 도구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필요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변화할 수도 있고, 여전히 부족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다시 하나님께 말을 건다.

기도는 완성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대답이 없어도 기도한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달라는 부탁에 따라 하나님이 세상일을 바꾸어주신다고 믿지 않는다.

기도한다고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한다고 병이 반드시 낫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이미 내 마음을 알고 계신다.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고 계신다.

그러니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했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말을 걸어도 대답을 듣지 못한다.

그 침묵이 왜 계속되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평생 하나님의 대답을 직접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기도할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감사한 일을 이야기하고, 내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할 것이다.

때로는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돌아보고, 내가 걸어가는 길이 옳은지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것이다.

예수가 보여준 삶을 조금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기도는 하나님에게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끊임없는 시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으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시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하나님,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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