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부활보다 먼저인 삶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소크라테스, 공자, 붓다, 예수를 꼽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네 사람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이 조금 이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덕을 탐구했습니다.

공자는 인간관계와 슬롯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두 사람은 인류의 사상과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붓다와 예수는 조금 다릅니다.

두 사람 역시 위대한 가르침을 남겼지만, 단순히 세상을 이해하거나 올바른 삶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삶 자체를 바꾸려 했습니다.

붓다는 깨달음을 이야기했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습니다.

붓다는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했고, 예수는 욕심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비슷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삶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를 살펴보면 예수가 왜 특별한 사람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예수처럼 살아야 하는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붓다는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불교는 사성제와 팔정도, 연기와 무아 등을 통해 그 깨달음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은 집착과 갈애에서 비롯되며, 집착을 소멸시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아주 단순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불교에는 훨씬 정교한 철학과 다양한 수행 전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그 깨달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꿉니까?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도 인간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바를 실천하며 살았다고 불교 경전은 전합니다.

그렇다면 붓다가 깨달았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아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핵심 가운데 하나가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도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붓다와 예수는 같은 말을 한 것일까요?

저는 출발점은 비슷하지만 도착점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을 버린 다음에는 무엇을 합니까?

붓다는 인간의 고통을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원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얻어도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얻은 것에 익숙해지면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러니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붓다는 이를 위해 수행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붓다는 극단적인 고행을 경험한 뒤 오히려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쾌락과 고행이라는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였습니다.

또한 불교의 수행이 반드시 세상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재가자의 삶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교에서 수행과 깨달음, 해탈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집착에서 벗어나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지향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는 욕심을 버리고 세상에서 벗어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세상에서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갈까요?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약한 사람의 곁에 서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비워낸 자리에 사랑을 채우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에도 자비가 있습니다. 붓다 역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타인의 해탈을 돕는 보살의 삶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붓다는 자신만을 위해 살라고 했고 예수만 남을 위해 살라고 했다는 식의 비교는 옳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고통을 낳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욕심에서 돌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과 사람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처럼 살기 위해 특별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처럼 살라는 말을 들으면 부담부터 느낍니다.

어떻게 예수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는 평범한 인간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저는 예수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도 배웠고, 성장했고, 두려워했고, 자신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처럼 사는 일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처럼 살기 위해 기적을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거나 죽은 사람을 살릴 필요도 없습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지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어려운 신학을 공부하거나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말은 참 쉽습니다.

물론 실천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고 싶고, 손해 보고 싶지 않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마음을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양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나눌 수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말은 모든 욕망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잘못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잘못입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고, 여행을 다니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잘못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것,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 자신이 옳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

그것이 욕심입니다.

욕망은 삶을 움직이게 하지만, 욕심은 삶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에게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 즐거움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참 멋지게 살았습니다

예수의 삶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혼인잔치에 참석했고, 세리와 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과 식사했습니다.

제자들과 길을 걸었고, 친구를 사귀었고, 사람들의 슬픔에 함께 울었습니다.

때로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했습니다.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가르침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일에는 화를 냈고,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단호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멋진 사람입니까?

그는 돈이 많아서 멋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학위를 받거나 세상을 놀라게 할 철학 체계를 완성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을 사랑했고, 욕심에 휘둘리지 않았으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예수의 삶이 편안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오해받았고, 배척당했고,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불행한 삶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이 그에게는 기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랑을 나누는 삶.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아도 되는 삶.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삶.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짓밟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이 왜 불행하겠습니까?

오히려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우리는 예수처럼 살면 모든 것을 잃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예수처럼 살지 않기 때문에 정작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더 많이 가지려다가 사람을 잃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다가 평안을 잃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는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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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르침은 지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예수의 가르침이 가진 특별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그 가르침은 지금 실천할 수 있고, 그 결과도 지금 우리 삶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면 미움에 사로잡혀 있던 마음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면 도움을 받은 사람의 삶이 실제로 달라집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욕심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앞세우면 관계가 달라집니다.

물론 모든 일이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베풀어도 배신당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아도 손해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려도 가난할 수 있고, 남을 위해 살다가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자신이 그랬습니다.

그러니 예수처럼 살면 반드시 성공하고 행복해진다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사람.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가진 것을 나눌 줄 알고, 미움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고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멋진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바로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죽은 뒤에야 옳았는지 알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달라지고,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먼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된다는 예수의 말씀도 저는 그런 의미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여러분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4의 뜻)

바울에게 부활은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도, 그 복음을 믿는 신앙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바울이 전한 구원의 메시지 역시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바울과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정말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도 헛된 것입니까?

예수가 가난한 사람을 사랑했던 일이 헛된 일이 됩니까?

원수를 용서하라고 가르쳤던 말씀이 무의미해집니까?

자신의 욕심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던 결단이 아무 가치 없는 일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부활이 없었다고 해도 예수의 삶은 여전히 가치 있습니다.

그가 보여준 사랑은 사랑이고, 그가 실천한 용서는 용서이며, 그가 선택한 선함은 여전히 선함입니다.

예수의 삶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반드시 부활이라는 사건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부활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자리를 바로잡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는 부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고, 죽었으며, 그다음에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삶이 먼저였습니다.

부활은 그다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순서를 바꿉니다.

부활을 믿어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아야 신앙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처럼 살아가는 일은 뒤로 미룹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처럼 사는 삶이 구원과 부활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처럼 사는 것 자체가 이미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삶을 살기는 싫어하면서 죽은 뒤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지금은 내 욕심대로 살고 싶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고,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죽은 뒤에는 영원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싶다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죽은 뒤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 나라일까요?

혹시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보상만 원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살았습니다.

그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가 옳다고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지금부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가 보여준 삶을 따라가기보다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의 결과를 얻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구원받고 싶고, 부활하고 싶고,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물론 그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지금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를 지금 살아갈 생각이 없다면,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예수처럼 멋지게 살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가 특별한 이유를 기적에서 찾고 싶지 않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기 때문도 아니고, 물 위를 걸었기 때문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살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부활했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모든 사건을 제외하더라도 예수는 충분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쳤고,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평범한 우리도 살아갈 수 있는 삶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물론 평생을 살아도 욕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를 내려놓을 수는 있습니다.

내일 또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회개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예수처럼 살기 위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살고 싶습니다.

돈도 벌고 싶고, 좋은 일도 하고 싶고, 제가 가진 재능으로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싶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남의 것을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제 뜻이 옳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외면하지 않고 싶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 미움에 제 삶을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예수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증명하기 위해 그의 부활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말에서, 행동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드러납니다.

물론 예수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멋져 보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어리석다는 말을 듣고, 손해를 보고,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삶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지 않는 사람,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고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며, 두려워도 옳은 일을 선택하는 사람이야말로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예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지를 보여준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저는 부활하기 위해 예수처럼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처럼 사는 것이 이미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려는 것입니다.

구원과 부활은 그다음에 하나님께 맡길 일입니다.

예수는 죽은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보려 합니다.

예수처럼.

멋지게.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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