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기독교와 다른 예수


예수는 기독교인일까요?

이상한 질문입니다.

예수는 기독교의 주인공입니다. 교회마다 십자가가 걸려 있고,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끝납니다.

성탄절에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부활절에는 예수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예수가 살아 있을 때 기독교라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유대인의 성경을 읽었으며 회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교를 만들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단을 만들지도 않았고 교회 조직을 설계하지도 않았습니다. 예배 순서를 정하지 않았고 성직자의 직급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성탄절을 지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가 한 일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예수의 출발점은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가 죽고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의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형태의 예수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을 결정하는 데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남긴 사람을 한 명 꼽는다면 저는 베드로보다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수제자였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가톨릭이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이해하는 것과도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영향력입니다.

어떤 사상이 살아남아 오늘날 기독교의 신학적 골격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바울의 영향은 엄청납니다.

더구나 바울은 역사적 예수와 함께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와 갈릴리를 걸은 적도 없습니다.

예수의 산상설교를 현장에서 들은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먹는 모습을 직접 본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주장한 예수와의 만남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적 체험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예수의 삶보다 예수에 대한 해석이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펼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먼저 읽습니다.

그다음 사도행전이 나오고 바울서신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먼저 예수의 삶과 말씀이 기록되었고, 나중에 바울이 그것을 읽고 신학적으로 해석했겠구나.

그런데 역사적 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초기 서신들은 대체로 서기 50년대부터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 보는 마가복음은 대체로 서기 70년 전후로 봅니다.

마태와 누가는 그보다 뒤, 요한은 더 뒤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바울이 예수에 관한 전승을 몰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바울은 예수의 말씀으로 전해진 몇몇 내용을 알고 있었고 이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복음서가 완성되기 전에 바울의 신학은 이미 편지로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삶이 글로 정리되기 전에 예수에 대한 신학이 먼저 글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차이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삶보다 예수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바울서신을 읽어보면 놀라울 정도로 역사적 예수의 생애가 적게 등장합니다.

예수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어떤 비유를 들었는지,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삭개오에게 어떻게 했는지, 사마리아인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같은 복음서의 수많은 장면은 바울의 논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부활은 무엇인가.

율법은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인가.

은혜는 무엇인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자신이 세우거나 관계한 공동체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에서 성 문제와 분쟁이 생겼습니다.

답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놓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답했습니다.

결혼 문제가 생겼습니다.

답했습니다.

예배와 은사 문제가 생겼습니다.

답했습니다.

부활을 놓고 논쟁이 생겼습니다.

답했습니다.

갈라디아에서는 할례와 율법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 답했습니다.

그 답변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성경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교리서를 만들겠다고 앉아서 조직신학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바울이 구축한 신학적 토대는 이후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는 삶을 남겼습니다.

바울은 그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를 따라 사는 문제보다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점점 커졌습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와 기독교가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종말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종말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아주 가까운 사건으로 기대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재림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

고린도전서에서는 더욱 분명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또 말합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바울의 실제 삶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결혼 문제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가능하다면 자신처럼 혼자 지내는 것을 권합니다. 물론 결혼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절제하기 어렵다면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않는 편을 권합니다.

왜일까요?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나뉩니다.

반면 독신자는 주님의 일에 더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고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충분히 이해되는 선택입니다.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뒤 주님이 돌아오고 지금의 세상이 끝난다고 확신한다면 저라도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집이 무슨 소용입니까.

재산이 무슨 소용입니까.

결혼과 미래 계획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남은 시간을 전부 거기에 걸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점에서 저는 오히려 바울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믿은 것에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문제는 하나입니다.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죽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바울이 기대했던 시간 안에 예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다렸던 종말은 오지 않았지만, 종말을 기다리며 쓴 바울의 신학은 남았습니다.


예수는 종말을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예수와 바울의 결정적인 차이를 봅니다.

예수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저는 이것을 “곧 세상이 끝난다”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삶의 방향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향하던 삶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던 사람이 이웃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

미워하던 사람이 보복하지 않는 것.

많이 가진 사람이 자기 것을 나누는 것.

약자를 밟고 올라가던 사람이 그 사람의 곁에 서는 것.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

그게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순간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뒤에 입장하는 놀이공원이 아닙니다.

재림 뒤에야 열리는 국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는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종말의 날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였습니다.

바울은 곧 올 종말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라고 했습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곧 끝난다”가 아니라 “지금 시작하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기다리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바울 이후 기독교는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이야기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했습니다.

죽은 뒤 어디로 갈 것인지가 중요해졌습니다.

예수가 언제 다시 올 것인지도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재림이 오지 않자 그 지연을 설명하는 신학도 필요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석 위에 해석이 쌓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커지자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조직에는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권위가 생겼습니다.

교리가 생겼습니다.

정통과 이단을 나누었습니다.

예식이 생겼습니다.

절기가 생겼습니다.

건물이 생겼습니다.

제도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2천 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기형적으로 변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 어느 순간 예수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는 성탄절이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탄절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12월 25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 역시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초기 교회부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 것도 아닙니다.

후대 기독교가 만든 전통입니다.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예수가 하라고 하지 않은 것은 이렇게 열심히 하면서, 예수가 하라고 한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교회가 가득 찹니다.

예수의 탄생을 찬양합니다.

캐럴을 부릅니다.

선물을 나눕니다.

예배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실제로 가르친 원수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나누지 않습니다.

자기 욕망에서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예수가 명하지 않은 생일은 성대하게 기념하면서 예수가 명한 삶은 살지 않는 종교.

저는 여기서 예수와 기독교 사이의 거리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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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관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막대한 부동산과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예배당을 짓습니다.

더 큰 건물을 세웁니다.

재정을 축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때로는 교회의 성장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을 읽으면 이상합니다.

부자 청년이 찾아왔을 때 예수는 말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는 재산을 잘 보존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재산을 보존하고 늘리는 데 너무나 능숙해졌습니다.

교회에 돈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돕는 데도 돈이 들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도 돈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교회에 들어온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부유한 교회란 자산이 많은 교회입니까?

아니면 많이 흘려보내는 교회입니까?

예수라면 수백억 원짜리 교회 건물을 보고 정말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내 교회가 크게 성장했구나.”

저는 오히려 다른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왜 아직 가지고 있느냐?”


우리는 예수를 너무 많이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를 찬양합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기념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놓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예수가 누구인지 수없이 공부합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해 정교한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를 이렇게 많이 말하는데 왜 예수가 가르친 삶은 점점 찾기 어려워지는 걸까요.

어쩌면 기독교는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것들로 예수를 가려버린 것은 아닐까요.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예수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설명하다 보니 어느 순간 설명이 예수보다 커졌습니다.


“주여, 주여”

그래서 저는 예수의 이 말씀이 무섭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이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예수를 부릅니다.

“주여, 주여.”

심지어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종교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놀라울 정도로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했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저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넓은 문 밖에 세상이 있고 좁은 문 안에 기독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좁은 문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는 바로 이어서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을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넓은 문에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기독교 자체가 넓은 문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할 수도 있습니다.

헌금할 수도 있습니다.

성탄절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가 살았던 방식과 전혀 다르게 살 수도 있습니다.

이보다 넓은 문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를 따르지 않고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문.

예수와 다르게 살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문.

예수는 있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없는 문.

저는 그것이 넓은 문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좁은 문은 교회 문이 아닙니다.

예수가 걸었던 길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는 기독교와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아주 불편한 결론에 도착합니다.

예수는 기독교와 상관없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예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지금 기독교라고 부르는 거대한 종교체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교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교단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성탄절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예배당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성직계급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관한 신학시험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예수가 가르친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도 예수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예수와 더 가깝습니까?

저에게는 이 질문이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보다 중요합니다.

“무슨 교리를 믿습니까?”보다 중요합니다.

심지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습니까?”보다 먼저입니다.

예수와 기독교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기독교를 지키는 것이 곧 예수를 지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교리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도 틀릴 수 있습니다.

교회도 틀릴 수 있습니다.

2천 년의 전통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틀렸다고 해서 예수의 가르침까지 틀리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기다렸던 재림이 그의 생전에 오지 않았어도,

“회개하라”는 예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부자가 되어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라”는 예수의 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탄절이 없어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그대로입니다.

삼위일체를 몰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없어도 예수의 길은 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독교를 통해 예수를 보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예수를 통해 기독교를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예수와 같으면 따르고,

예수와 다르면 기독교를 버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예수는 기독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나라를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옳다고 믿고,

자기 삶을 돌이켜,

예수가 걸었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길에 기독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든 없든,

예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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