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논란의 도마복음

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네 권을 통해 예수를 만납니다.

예수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떻게 죽었고 부활했는지를 읽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예수의 전기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는 예수의 곁을 따라다니던 기자가 그날그날 기록한 취재수첩이 아닙니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먼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전해지고, 갈릴리에서도 전해지고, 안디옥에서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말씀이 먼저 있었고 기록은 나중에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가 실제로 했던 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 질문 앞에서 아주 흥미로운 문서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도마복음입니다.

도마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서와 상당히 다릅니다.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예수의 탄생도 없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여행기도 없습니다.

수난 이야기도 없고 십자가 사건도 없으며 부활 이야기도 없습니다.

대신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예수의 말씀 114개가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가라사대’만 모아놓은 바카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을 읽다 보면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었던 익숙한 말씀들이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겨자씨 이야기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가 나옵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한다는 말도 나옵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없습니다.

말씀만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이게 재미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그 말씀 앞뒤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어디에 있었고, 누가 찾아왔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고, 제자들이 무엇을 물었는지가 나옵니다.

그 사건 속에서 예수가 말씀합니다.

도마복음에는 그 사건이 사라지고 말만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궁금해집니다.

처음부터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말씀이 먼저 있었고 이야기가 나중에 붙은 것일까요?


말씀이 먼저였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죽은 뒤 수십 년이 지나 기록되었습니다.

그동안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구술로 전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공동체가 토씨 하나까지 똑같이 전했을 리는 없습니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한 문장으로 전해졌던 말씀이 다른 공동체에서는 두 문장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그 말씀이 나온 상황까지 함께 전해졌을 것이고, 어떤 곳에서는 말씀만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공관복음서를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같은 사건과 같은 말씀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것을 성경의 결함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것이 전승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사람의 입으로,

공동체에서 공동체로,

예수의 이야기가 이동한 흔적입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의 기억도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를 직접 보았던 사람들의 증언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오랫동안 전해온 이야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복음서 저자가 그것들을 선택하고 배열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뼈라면 제자들의 기억과 공동체의 전승이 살이 되고, 복음서 저자의 편집과 신학이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우리가 지금 읽는 복음서입니다.


Q는 찾으면서 왜 도마복음은 무시합니까

신약학에는 유명한 가설이 있습니다.

Q자료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하면 두 복음서에 함께 등장하지만 마가복음에는 없는 예수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 외에 또 다른 공통자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가상의 자료를 Q라고 부릅니다.

Q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실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가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 가운데 하나로 오랫동안 연구되어 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Q의 중요한 성격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모아놓은 자료였을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문헌이 실제로 발견되었습니다.

도마복음입니다.

물론 도마복음이 Q라는 말은 아닙니다.

도마복음이 마태와 누가가 사용한 바로 그 문서였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모아놓은 어록집이라는 형태의 문헌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은 중요합니다.

도마복음을 다섯 번째 정경복음서로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도마복음의 114개 말씀이 전부 예수의 육성이라고 주장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도마복음 역시 의심하고 비교해야 합니다.

어떤 말씀은 매우 오래된 전승일 수 있고, 어떤 말씀은 후대 공동체의 생각이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경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Q는 가설인데 연구하면서, 실제로 발견된 예수 어록집은 ‘위경’이라는 이름 하나로 덮어버린다면 이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카라의 신분이 아닙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지팡이는 가져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복음서 자체도 예수의 말씀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달라졌다는 흔적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여행할 때 지팡이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합니다. 신발도 신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다릅니다.

신발도, 지팡이도 마련하지 말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지팡이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뭐라고 말했을까요?

지팡이를 가져가라고 했습니까?

가져가지 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성경의 모든 문장을 한 글자까지 완벽하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질문은 곤란해집니다.

그러나 구술전승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아주 가볍게 떠나라고 가르쳤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여러 공동체를 거치면서 각자의 삶과 환경 속에서 전해졌을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신발이 꼭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돌이 많은 길을 걸어야 했을 테니까요.

어떤 지역에서는 지팡이가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험한 길을 걷거나 뱀과 같은 위험한 동물을 막아야 했을 테니까요.

실제로 그런 지리적 이유 때문에 차이가 생겼다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가능성입니다.

같은 예수의 가르침도 공동체의 현실을 통과하면서 구체적인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록 자체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가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발도 핵심이 아닙니다.

예수가 무엇을 가르치려고 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필요한 것을 잔뜩 준비하고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

가볍게 떠나라는 것.

그게 말씀의 중심일 수 있습니다.

지팡이는 돌입니다.

신발도 돌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그 안에 있는 금입니다.


성경은 금광입니다

저는 앞서 성경을 금광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금광에 들어가면 온통 금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흙이 훨씬 많습니다.

돌도 있습니다.

자갈도 있습니다.

그 속에 금이 있습니다.

성경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세계관도 있습니다.

신화적으로 기록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비유도 있습니다.

역사적 기억도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도 있습니다.

공동체의 상황도 들어 있습니다.

오랜 시간 구술로 전해지며 달라진 흔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광산에 들어가 눈에 보이는 돌멩이를 전부 금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아닙니다.

금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한 일을 합니다.

돌을 버리지 못합니다.

흙도 버리지 못합니다.

모두 금이라고 해야 성경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모든 이야기가 현대 과학의 의미에서도 사실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설명하려 합니다.

복음서 사이에 차이가 발견되면 어떻게든 서로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나라도 인간적인 흔적이 발견되면 성경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그러느라 엄청난 시간을 씁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흙은 흙이면 됩니다.

돌은 돌이면 됩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금입니다.


그런데 금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문제는 여기입니다.

무엇이 금입니까?

어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고 어떤 말씀은 당시 인간의 생각인지 어떻게 구별합니까?

이 질문 때문에 다시 어려운 신학으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를 배웁니다.

그리스어를 배웁니다.

사본을 비교합니다.

문헌의 연대를 연구합니다.

고대 근동의 역사를 공부합니다.

Q자료를 연구합니다.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서를 비교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이건 휴대폰과 비슷합니다.


모든 사람이 반도체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반도체를 만들 줄 모릅니다.

CPU가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릅니다.

전파가 어떻게 음성정보를 전달하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운영체제의 소스코드는 더더욱 모릅니다.

그래도 휴대폰을 사용합니다.

전화합니다.

문자를 보냅니다.

사진을 찍습니다.

길을 찾습니다.

휴대폰을 사용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반도체 공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반도체를 연구하는 사람은 필요합니다.

통신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들이 오랜 시간 연구해서 우리 손에 휴대폰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면 됩니다.

성경도 비슷합니다.

성서학자는 원문을 연구하십시오.

고대어를 연구하십시오.

사본을 비교하십시오.

도마복음을 연구하십시오.

Q를 연구하십시오.

복음서의 편집과정을 연구하십시오.

그 작업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밟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결과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입니다.


예수의 삶을 보면 됩니다

금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까?

예수를 보면 됩니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병든 사람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여자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돈을 어떻게 바라봤습니까?

권력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원수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했을 때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이미 충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의 삶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살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 히브리어가 필요합니까?

가진 것을 나누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어 문법을 알아야 합니까?

약자의 몫을 빼앗지 말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Q자료의 존재를 증명해야 합니까?

용서하기 위해 도마복음의 정확한 편집연대를 알아야 합니까?

자기 욕심에서 돌아서기 위해 삼위일체의 형성과정을 공부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의 삶을 내 삶에 적용하면 됩니다.

그게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논란의 도마복음.png


그런데 기독교는 사용법보다 내부구조를 가르칩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날 기독교에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예수는 단순하게 살았는데 우리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신학을 만들었습니다.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정통과 이단을 나누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문장이 왜 틀릴 수 없는지 설명했습니다.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논쟁했습니다.

기적이 과학적으로 가능한지를 논쟁했습니다.

예수가 신인지 인간인지 논쟁했습니다.

어떤 세례가 옳은지 논쟁했습니다.

어떤 교리가 정통인지 논쟁했습니다.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인지 아닌지를 논쟁합니다.

물론 연구할 수 있습니다.

저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믿는 일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휴대폰의 내부구조를 평생 공부하면서 전화 한 통 걸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반도체의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면서 휴대폰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앙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평생 성경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미워합니다.

매주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돈을 움켜쥡니다.

신학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약자를 외면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정확하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처럼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고 휴대폰에 관해서만 평생 공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도마복음이 정경이냐는 질문보다

그래서 저는 도마복음을 보면서 엉뚱한 질문에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도마복음은 진짜 복음서인가?

가짜 복음서인가?

정경에 넣어야 하는가?

영지주의 문서인가?

도마가 정말 썼는가?

물론 중요한 학문적 질문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찾을 수 있는가?

도마복음에 기록된 어떤 말이 마태와 마가와 누가에도 남아 있다면 비교해보면 됩니다.

어느 쪽이 더 오래된 형태인지 연구해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붙기 전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금을 발견하면 가져오면 됩니다.

도마복음이라고 모두 금일 이유도 없습니다.

정경복음이라고 모두 금일 이유도 없습니다.

바카라의 표지가 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기준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이 금인지 모르겠다면 예수를 보십시오.

도마복음에서 무엇이 금인지 모르겠다면 예수를 보십시오.

예수가 삶으로 보여준 것과 통하는지 보십시오.

사람을 살리는지 보십시오.

사랑으로 향하는지 보십시오.

약자의 곁으로 향하는지 보십시오.

자기 욕망에서 돌아서게 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향하게 하는지 보십시오.

그것이 제가 성경이라는 금광에서 찾고 싶은 금입니다.


금을 찾았으면 광산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금을 찾았으면 광산에서 나와야 합니다.

평생 금광 안에서 금의 성분만 분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았다면 이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성경 안에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찾아내어 성경 밖의 내 삶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무시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읽자는 것입니다.

도마복음을 성경에 넣자는 말도 아닙니다.

이용할 수 있는 자료라면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신학을 없애자는 말도 아닙니다.

신학이 자기 자리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신학은 예수를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예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예수를 가리키는 바카라입니다.

성경 자체가 예수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다시 아주 단순한 자리로 돌아옵니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모두 반도체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휴대폰을 잘 사용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성서학자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삶을 살아보면 됩니다.

성경으로 예수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를 보면 오히려 성경이 단순해집니다.

그러니 도마복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태복음도 펼쳐놓고,

마가복음도 펼쳐놓고,

누가복음도 펼쳐놓고,

요한복음도 펼쳐놓고,

도마복음도 펼쳐놓으십시오.

흙은 걷어내고 돌은 치우십시오.

그리고 금을 찾으십시오.

그런데 금을 찾았다면,

그만 들여다보고 주머니에 넣으십시오.

광산 밖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사십시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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