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신? 혹은 인간?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는 인간입니다.

저는 예수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잠시 세상에 내려온 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먼저 완성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독생자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죽고 부활한 뒤에는 성경이 그를 또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맏아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독생자는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맏아들에게는 동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생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났으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조금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누가복음 2:52)

키만 자란 것이 아닙니다.

지혜도 자랐습니다.

히브리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8)

지혜가 자라고 순종을 배웠습니다.

예수 자신도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마가복음 13:32)

이 문장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성장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배웠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전제하는 순간부터 설명이 복잡해집니다.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했고, 완전하지만 지혜가 자랐으며, 처음부터 완전한 순종을 가지고 있었지만 순종을 배웠다고 설명해야 합니다.

어쩌면 성경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성경 속 예수를 설명하기 어려워진 것은 아닐까요.


예수도 사람에게 배웠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한 이방 여인이 예수를 찾아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처음부터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마태복음 15:24)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단지 여인의 믿음을 시험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장면에서 예수가 여인을 시험하고 있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인간 예수가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장면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이방 여인의 절박함을 만났습니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달라졌습니다.

예수가 처음부터 완벽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으면 이 장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람을 통해 배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도 하나님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갔습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의 부족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더 옳은 것을 발견했을 때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예수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하나님이 왜 울어야 합니까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는 울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요한복음 11:35)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 가운데 하나지만 저는 이 짧은 문장이 예수라는 사람을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친구가 죽었습니다.

친구의 누이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울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이상해집니다.

생명과 죽음의 질서를 만든 존재가 하나님입니다.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을 일으킬 존재도 하나님입니다.

게다가 요한복음의 예수는 잠시 뒤 자신이 나사로를 살릴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웁니까?

물론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결과를 몰라서 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가능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인간으로 읽으면 그런 추가적인 설명조차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슬펐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죽기 싫었던 예수

저에게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겟세마네입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가 기도합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가복음 14:36)

이 기도를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는 죽기 싫었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고통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장에는 분명히 두 개의 뜻이 존재합니다.

내 뜻.

아버지의 뜻.

예수 자신의 뜻은 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예수가 인간이라면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까?

왜 자신이 세운 구원의 계획을 자신에게서 거두어달라고 간청합니까?

물론 삼위일체와 양성론은 여기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구별되는 위격이고 예수에게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 복잡한 설명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먼저입니까?

예수를 인간으로 놓으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가 자란 것은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배운 것은 배웠기 때문입니다.

모른다고 말한 것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운 것은 슬펐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다고 기도한 것은 정말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은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실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장면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한 인간의 일생입니다.


신이 죽었다면 무엇이 그렇게 놀랍습니까

엄청난 부자가 하루 동안 노숙자 체험을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돈을 쓰지 않고 길에서 잡니다.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습니다. 추위와 배고픔도 경험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 말합니다.

“나는 노숙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내일이면 따뜻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배고픔은 경험했을지 몰라도 “내일도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절망은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잠시 인간이 되어 30여 년을 살다가 죽고 다시 원래의 신적 자리로 돌아간 것이라면 무엇이 다를까요.

신이라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다시 살아날 것을 압니다.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선택한 죽음과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인간 예수라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의 두려움이 진짜였기 때문에 용기가 의미가 있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진짜였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인 선택이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 순종이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는 스스로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 13:30)

또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로마서 10:9)

주어를 보십시오.

예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인간 예수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부활은 신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고린도전서 15:20)라고 부릅니다.

첫 열매라는 말은 뒤에 열매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

맏아들이라는 말 역시 뒤에 동생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먼저 갑니다.

우리가 그 뒤를 따라갑니다.


독생자에서 맏아들로

이것이 제가 예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예수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독생자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 구원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그는 우리의 맏아들이 됩니다.

성경이 “독생자가 부활하여 맏아들로 신분이 바뀌었다”고 직접 한 문장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본문을 연결해서 제가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결은 중요합니다.

예수 혼자 하나님의 아들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로마서 8:16)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와 우리는 영원히 다른 종류의 존재가 아닙니다.

신과 인간이라는 두 종족이 아닙니다.

예수가 먼저 갑니다.

우리가 뒤따릅니다.

예수가 맏아들이고 우리가 그 동생이 됩니다.


흙의 형상에서 하늘의 형상으로

고린도전서 15장은 이 구조를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첫 사람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9)

저는 이것이 인간 창조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성된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선택하고, 실패하고, 다시 돌아서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먼저 끝까지 걸어간 인간이 예수입니다.

자기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의 공의로.

그 방향으로 끊임없이 돌아섰습니다.

저는 그것을 ‘회개한 삶’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수가 죄 많은 인간이었다가 어느 날 잘못을 뉘우쳤다는 뜻이 아닙니다.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절정이 겟세마네입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자기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서는 삶.

예수는 그것을 끝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하늘의 형상을 입은 첫 인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난 첫 열매.

많은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맏아들.

저는 예수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사탄은 누구를 시험했습니까

광야의 시험도 이 관점에서 보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사탄은 예수에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마태복음 4:3)

다시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마태복음 4:6)

“네가 하나님이거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모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훼방하려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 자신을 시험합니까?

반대로 예수가 하나님의 계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인간이라면 이야기는 자연스럽습니다.

이 인간을 무너뜨리면 됩니다.

자기 능력을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게 만들면 됩니다.

권력을 탐하게 만들면 됩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선택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틀어집니다.

시험이 진짜 시험이 되려면 실패의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실패할 수 없는 신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유혹하는 것이 무슨 시험입니까.

그러나 배고픈 인간에게는 시험입니다.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인간에게 세상의 나라와 영광은 시험입니다.

그리고 인간 예수는 그 시험에서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위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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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그렇다면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한 구절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한복음 10:30)

그런데 이 말을 곧바로 “나와 아버지는 동일한 존재이다”라고 읽어야 할까요?

같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2)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이유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예수와 하나님처럼 하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라기보다 같은 뜻과 목적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쉽게 말하면 같은 편입니다.

한 팀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뜻을 품고 같은 방향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하나됨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요한복음 14:9)

이것 역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왕명을 전달하는 신하를 생각해 봅시다.

신하가 백성 앞에서 왕의 명령을 읽습니다.

입을 움직인 사람은 신하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누구의 말입니까?

왕의 말입니다.

그렇다고 신하가 왕은 아닙니다.

예수 자신도 말합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요한복음 7:16)

또 말합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요한복음 12:49)

그렇다면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을 반드시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고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약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돈과 권력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원수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어서 하나님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삶으로 살아냈기 때문에 그에게서 하나님이 보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이 말씀도 자주 인용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요한복음 8:58)

그러나 요한복음은 첫 장에서 이미 태초부터 무엇이 있었다고 말하는지 밝힙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로고스입니다.

저는 이것을 태초부터 예수라는 인격이 존재했다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자유를 통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미리 정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리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초부터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인간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면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인가.

그 계획과 뜻이 로고스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복음 1:14)

하나님이 인간으로 변신했다는 뜻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한 인간의 삶으로 현실이 되었다고 저는 읽습니다.

그 인간이 예수입니다.

예수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예수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신이 인간이 된 존재가 아니라, 태초부터 존재했던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삶으로 이루어진 첫 사람입니다.


도마는 왜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을까

물론 성경에는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본 도마는 외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한복음 20:28)

저는 그 고백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죽었습니다.

분명히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살아서 자기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광경을 직접 본 인간 도마가 예수를 향해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합니까.

저라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마의 고백과 예수의 존재는 다른 문제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자식이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이를 끌어안고 내가 외칩니다.

“오, 하나님! 하나님 감사합니다!”

혹은 나를 죽음에서 구해준 사람을 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 같은 사람입니다.”

그 고백이 거짓입니까?

아닙니다.

나에게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고백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신약성경은 예수의 부활을 반복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셨다.

도마의 눈앞에는 살아 돌아온 예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도마는 예수를 기적의 주체로 받아들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기적의 궁극적인 주체가 누구였는지도 말합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도마의 고백 바로 앞에서 부활한 예수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요한복음 20:17)

도마는 예수에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왜 도마의 고백만 문자 그대로 존재론적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자신의 고백은 복잡한 신학으로 다시 설명해야 할까요.

도마의 고백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고백도 존중해야 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으라고 했습니까

복음서에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님이다. 나를 하나님으로 믿어라.”

라고 가르치는 장면은 찾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반복되는 말은 이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더 흥미로운 것은 예수가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조차 경계했다는 사실입니다.

귀신들이 예수를 보고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선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고 엄하게 명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예수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에 관한 정답을 외우는 일이 아니었던 것 아닐까요.

오늘날에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정답을 맞혀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가 반복해서 요구한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따르라.

사랑하라.

용서하라.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자기를 부인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회개하라.

예수는 자신의 존재론을 맞히는 시험지를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삶의 방향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버렸을 때 생기는 문제

저는 오늘날 기독교가 겪는 위기의 일부도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성경 전체를 오류 없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만들어버리면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집니다.

예수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든 기적은 문자 그대로 일어난 초자연적 사건이어야 합니다.

오병이어도 반드시 물리적으로 음식의 양이 늘어난 사건이어야 하고, 나사로도 실제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성경 무오류까지 결합하면 방어해야 할 범위는 더 넓어집니다.

노아의 홍수도 전 지구를 뒤덮은 실제 사건이어야 하고,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살아야 하며, 창세기의 창조기사 역시 현대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질문이 이상하게 바뀝니다.

“예수처럼 살 것인가?”

가 아니라,

“이 모든 초자연적 사건이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는가?”

가 되어버립니다.

오늘날 과학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에게 이것은 상당한 장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노아의 방주를 읽으며 지질학을 떠올립니다.

창조 이야기를 읽으며 진화론과 우주의 역사를 떠올립니다.

기적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법칙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말합니다.

“그대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젊은 사람에게 선택지는 둘 중 하나처럼 보입니다.

이성을 버리든가.

신앙을 버리든가.

정말 그래야 합니까?

노아 이야기에 신화적 형식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신화가 됩니까?

성경 저자가 자신의 시대에 알고 있던 세계관으로 하나님을 설명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집니까?

오병이어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는지 우리가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의 가르침까지 사라집니까?

오히려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방어하려다가 성경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신화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를 인간으로 받아들이면 상당히 많은 문제가 오히려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지혜가 자랐습니까?

인간이니까 자랐습니다.

몰랐습니까?

인간이니까 몰랐습니다.

기도했습니까?

인간이니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죽기 싫었습니까?

인간이니까 살고 싶었습니다.

울었습니까?

인간이니까 슬펐습니다.

사람을 만나 생각이 넓어졌습니까?

인간이니까 배웠습니다.

죽었습니까?

인간이니까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신의 원상복귀가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이 됩니다.

기독교가 현대인에게 믿으라고 요구해야 할 것이 정말 고대 세계의 모든 현상이 현대 과학의 언어로도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주장일까요.

아니면 예수가 보여준 삶의 방향이 옳다는 믿음일까요.

어쩌면 현대인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함께 믿으라고 요구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예수

그래서 저는 예수를 신으로 우러러보기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한 삶을 먼저 살아낸 인간.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한 인간.

죽음 앞에서도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 인간.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킨 인간.

하늘의 형상을 먼저 입은 인간.

죽은 사람 가운데 첫 열매가 된 인간.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맏아들.

예수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신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신이니까 그렇게 살았다고 하면 우리는 빠져나갈 구멍이 생깁니다.

“예수니까 가능하지.”

“하나님이니까 가능하지.”

“나는 인간인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

그러나 예수가 인간이었다면 그 핑계가 사라집니다.

인간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먼저 갔습니다.

이제 우리가 따라갈 차례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가 틀렸다면?

여기까지는 신학적 논쟁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인지 인간인지.

로고스가 선재한 예수 자신인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이 존재의 동일성을 뜻하는지 뜻과 사명의 일치를 뜻하는지.

저는 지금까지 설명한 쪽이 성경 전체의 예수를 이해하는 데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주장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가 정말 하나님이었다고 합시다.

삼위일체가 맞다고 합시다.

성육신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가 모두 맞다고 합시다.

그래도 하나의 질문은 남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정확하게 믿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과,

예수를 인간이라고 이해하지만 예수가 가르친 대로 회개하며 살아가는 사람.

둘 중 누가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

한 사람은 고백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돈 앞에서는 예수와 다르게 행동합니다.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약자의 몫을 빼앗습니다.

자기편의 잘못에는 눈을 감습니다.

원수를 미워합니다.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면 언제나 자기 뜻을 선택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신성에 관한 교리는 정확하게 믿습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완성해서 살아낸 인간,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맏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옳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기 욕망에서 돌아서려고 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합니다.

약자의 몫을 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의 생각까지 바꾸려고 합니다.

실패하면 다시 돌아섭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둘 중 누가 정말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믿는 삶에는 회개가 없고,

예수를 인간이라고 이해하는 삶에는 회개가 있다면,

어느 쪽이 진짜 신앙입니까?

저는 예수를 인간으로 이해하는 제 신학이 틀리는 것보다 이것이 더 두렵습니다.

예수에 관한 교리는 정확하게 믿으면서 예수와 전혀 다르게 사는 것.

예수가 하나님인지 인간인지에 대한 문제는 틀릴 수 있습니다.

신학은 틀릴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논쟁에서 이기고도 예수가 말한 회개한 삶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처음 요구한 것은 자신의 존재에 관한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였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입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옳다고 믿는 것은 삶을 바꾸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에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예수가 신인지 인간인지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대답보다 훨씬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가 옳다고 정말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삶은 어디를 향해 돌아서고 있습니까?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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