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는 동물
*2026.07.28 내용 일부를 수정·보완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과 할머니 댁에서 함께 살던 동물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따뜻한 풍경이 떠오른다. 언젠가는 사람들의 먹거리가 될 동물이었지만, 함께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가족처럼 보살핌을 받았다.
1970년대 이전 우리나라의 농촌은 지금과 같은 밀집사육이 보편화되기 전이었다. 마을마다 논밭을 갈기 위한 소를 키우는 집이 있었고, 마당 한편에는 닭과 오리, 거위, 돼지, 집을 지키는 개가 함께 살았다. 사람들은 동물에게 먹이와 물을 챙겨 주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할머니 댁 암탉은 병아리들을 품에 거느리고 마당을 누볐다. 뒤뚱거리며 따라다니는 병아리들이 혹시 다칠까 봐 암탉은 날개를 살짝 펼친 채 주위를 경계했다.
"병아리 밟히지 않게 조심해서 걸어라."
할머니 말씀에 우리는 마당 가장자리로 살금살금 걸어 다녔다. 암탉이 놀라 허둥대다 새끼를 밟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닭장에 들어가실 때도 할머니는 늘 닭에게 말을 거셨다.
"에고, 물을 다 마셨네. 목이 말랐구나."
"달걀이 따끈하네. 금방 낳았구나. 고맙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닭 하고도 이야기를 하시네?'
어린 내게는 그 모습이 조금 신기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닭을 감정을 지닌 생명체로 대하셨다.
밤이면 닭들은 횃대 위에 나란히 올라앉아 잠을 잤고, 병아리들은 짚 위에서 서로 몸을 기대며 웅크렸다. 가끔 뒷산의 야생동물이 닭장을 습격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밤새 놀랐을 닭들을 안쓰러워하며 닭장 문을 다시 살피고 더 튼튼하게 고치셨다.
"닭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조용 걸어야 한다."
동물복지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 「동물보호법」을 읽다가 문득 할머니의 이 말씀이 떠올랐다. 동물을 불필요하게 놀라게 하지 말라는 오늘날의 동물복지 원칙을 할머니는 이미 삶 속에서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출처: 위키백과)
초등학교 5학년 무렵까지 우리 집에는 흰 진돗개 <백스>가 함께 살았다. 백스는 집에서는 자유롭게 앞마당과 뒤뜰을 오갔고, 가끔은 이웃 마을 친구들과 어울리러 나갔다가도 해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도 백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았다.
특히 할아버지가 군청으로 출근하시면 버스를 따라가 군청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퇴근길에 함께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우리 가족이 오래도록 전하는 추억이 되었다.
낯선 사람에게는 집을 든든히 지키는 충직한 개였지만, 가족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동반자였다.
백스가 세상을 떠난 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슬픔 어린 눈빛을 보았다. 어머니 역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훗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시골 생활이 무서웠던 젊은 새댁 시절, 밤마다 곁을 지켜 주던 백스가 큰 위안이었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이미 '인간과 동물의 유대(Human–Animal Bond)'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지를 몸으로 이미 경험하고 계셨던 것이다.
*왼쪽 사진: 세계명견 334호 천연기념물 53호 지정 진돗개 (출처: 광주일보 2023-05-30 http://m.kwangju.co.kr/)
*오른쪽 사진: 6가지(누렁이, 흰둥이, 검둥이, 칡개, 재구, 네눈박이)로 구분되는 진돗개 털색 중 흰둥이 백구 진돗개(출처: 나무위키)
할머니는 제법 넓은 공간에서 기르던 닭과 오리, 거위와 개에게 때맞춰 먹이를 주고 물그릇에도 늘 깨끗한 물을 채워주셨다. 부엌 앞 돼지우리에는 쌀뜨물과 남은 음식을 섞어 만든 먹이를 부어주었다. 돼지우리에서는 늘 쿰쿰한 분뇨 냄새가 났지만, 돼지가 먹이를 먹는 모습만큼은 볼 때마다 흥미로웠다.
돼지의 끼니라고 해봐야 우리 밥상에서 남은 음식과 돼지를 위해 끓인 사료 풀이 전부였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맛있었을까. 먹이를 부어주기가 무섭게 달려들어 꿀꿀거리며 먹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탄스러웠다.
(출처: 동아일보 2020-11-16 https://bizn.donga.com/)
"너희, 또 거기에 앉아있냐?"
식사 중인 돼지의 입을 돼지우리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던 우리 남매는 할머니가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서야 일어섰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돼지의 입놀림이었다. 돼지는 입술을 꼭 다문 채 맷돌을 돌리듯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천천히 비비며 음식을 씹어 먹었다. 어쩜 늘 그렇게 맛있게 먹는지…. 어린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신기했고 참 예뻤다. 남동생과 나는 오래도록 돼지의 입만 바라보곤 했다.
오십이 넘어 가족들과 태국을 여행하면서 숫자를 구별하는 돼지들의 묘기를 보았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돼지가 생각보다 지능이 높으며, 깨끗한 환경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배웠다. 내가 어렸을 때 돼지우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았던 그 동물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영리하고 섬세한 존재였던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는 아예 축사를 지어두고 소를 여러 마리 키우는 집도 있었다. 친구네는 소를 1마리 키웠다. 논밭의 흙을 갈아엎을 때 무겁게 등에 맨 쟁기를 끌며 일을 하는 소였다. 아마도 장날엔 그 소가 5일장이 서는 지역까지 주인과 장날에 나가는 무거운 물건을 달구지에 싣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하교 후 친구가 자신보다 10배는 몸집이 커 보이는 소를 데리고 우리 집 뒷산으로 올라가면, 나도 가끔 동행했다. 친구네 소의 눈빛은 순했지만, 이따금 배나 옆구리에 붙어있는 파리들을 쫒는 세찬 꼬리나 뒷발을 조심해야 한다고 친구가 여러 번 강조했다. 덕분에 나는 소의 뒷발이 닿지 않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갔다.
*밭갈이 (출처: 오마이뉴스 2012-04-20)
친구는 누렁소를 소나무에 메어두고, 나무그늘 아래 앉아서 나와 함께 바카라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흙을 퍼 나르는 개미도, 풀벌레도, 송충이도 정말 싫은데, 그때는 친구와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가끔 친구는 소를 위한 풀을 뜯으러 깔망을 메고 혼자 산에 오르기도 했다. 겨우 초등학생 여아였는데 들일에 바쁜 가족들 대신 소의 먹이를 구해오는 일을 친구가 도왔다. 국민교육헌장을 초등학생까지 외우게 하던 때도 친구는 소여물죽을 끓였다. 나는 친구네 아궁이 앞에 함께 앉았다. 그리고 불을 때고 있는 친구와 누가 더 빠르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지 시합을 했다.
(출처: 연합뉴스 2010-10-01)
동네에 결혼식이 있거나, 누군가가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자녀의 대학 입학은 온 동네가 나서서 손뼉을 쳤다. 이런 큰 경사에는 집에서 기르던 돼지나 소를 잡아 동네잔치를 열곤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을 맞추고 "잘 먹어라." 하며 뜨물을 부어주던 돼지와 소가 하루아침에 잔칫상이 되는 모습을 어린 나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이 '싸아'해져 한동안 고기를 멀리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 댁의 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마당을 뛰어다니던 닭은 도시의 친척이 방문한 날 밤에 우리 가족의 점심상에 닭죽으로 올라왔다.
대학원에서 동물복지를 공부하며 '동물의 5대 자유'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새로운 개념을 배우는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닭이 놀라지 않게 걸으라고 말씀하시던 할머니.
밤새 놀랐을 닭들을 걱정하시던 아버지.
가족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던 백스.
그 시절 어르신들은 '동물복지'라는 말을 알지 못했지만 이미 동물의 감정을 존중하며 살아가고 계셨다.
오늘날 동물복지는 과학과 법률로 체계화되어 있다.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는 1965년 영국의 브램벨 위원회(Brambell Committee) 보고서였으며, 이후 "영국 농장동물복지위원회(FAWC, Farm Animal Welfare Council)"가 이를 발전시켜 오늘날 널리 알려진 '동물의 5대 자유(Five Freedoms)'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었다. 한 생명의 감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작은 배려와 공감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1) 배고픔과 갈증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Hunger and Thirst)
2) 불편함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discomfort)
3) 통증, 부상 및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Pain, Injury, Disease)
4) 정상적인 행동을 표현할 자유
(Freedom to Express Normal Behavior)
5)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Fear and distress)
* 참고: 동물의 5대 자유는 1965년 브램벨 보고서를 바탕으로 영국 FAWC가 체계화한 개념이다. 이후 표현과 적용 범위가 일부 수정·보완되었으며, 국내에서도 기관과 문헌에 따라 번역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이 바카라에서는 원문의 의미를 고려하여 용어를 통일해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