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욕망에 관하여

남자는 정말 섹스만 원하는가

byNavyblue

남자는 섹스를 좋아한다. 아마 많은 사람이 이 문장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문장이 어느 순간 이렇게 바뀐다. “남자는 결국 섹스만 원한다.”그때부터 남성의 욕망은 너무 단순해진다. 남자는 항상 원해야 하고, 먼저 다가가야 하며, 기회가 생기면 당연히 좋아해야 하고, 성적 관심이 없는 남자는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겨진다. 여성이 오랫동안 욕망을 숨기도록 교육받았다면, 남성은 반대로 욕망이 많은 척하도록 교육받아온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남자의 성욕보다 더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은 남자의 외로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여러 문장을 듣는다. 울지 마. 약한 소리 하지 마. 남자가 그것도 못하냐. 먼저 고백해야지. 차이면 또 하면 되지. 남자는 원래 그런 거야. 이런 문장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한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슬픔은 숨기고, 두려움은 농담으로 넘기며, 외로움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욕망만큼은 허락된다. “여자가 좋다.”“섹스하고 싶다.”이 말은 오히려 남성다움의 증거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어떤 남자들은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 누군가를 원한다고 말한다. 안아달라고 말하는 대신 섹스를 원한다고 말한다. 몸의 욕망으로 번역된 외로움. 남자의 욕망을 이해하려면 이 가능성도 함께 보아야 한다.

e895a17a670298c5e92c42b15b923d96.gif남자는 섹스를 좋아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밑바닥에서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힘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의 이론은 수많은 비판과 수정의 대상이 되었지만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은 남겼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 그러나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학은 욕망이 단순한 생물학적 충동만은 아니라는 것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사람은 성적 욕망을 통해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며, 자신이 매력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하고, 때로는 외로움을 잊고 싶어 한다. 따라서 남자가 섹스를 원한다고 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섹스 하나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 욕망 아래에는 다른 문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고 싶다.”


슬롯학자 R. W. 코넬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슬롯가 특정한 남성상을 이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을 설명했다. 강해야 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성적으로 적극적이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선택받기보다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현실의 남자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겁이 난다. 거절당하면 아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 나이가 들면서 몸의 변화도 두렵다. 성적 자신감을 잃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언어가 부족하다. 그 결과 남자는 욕망하는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욕망을 잘 모를 수 있다.


남성 연구자 마이클 키멀은 남성성이 여성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만 아니라 다른 남성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공연이 되기도 한다고 분석해 왔다. 이 말은 성적인 이야기에서도 흥미롭다. 친구들 사이에서 연애 경험을 과장하고, 얼마나 많은 여성을 만났는지 이야기하고, 성적 능력을 자신의 가치처럼 말한다. 이때 섹스는 친밀함이 아니라 성과가 된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남성성을 증명하는 트로피가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욕망받는다고 해서 자신이 덜 외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침대에서는 누군가와 가까웠지만 마음에서는 아무에게도 가까이 가지 못할 수도 있다. 성적 성공과 친밀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꽤 중요한 차이다. 어떤 남자는 많은 섹스를 경험했지만 자신의 두려움을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다. 어떤 남자는 수많은 사람을 안았지만 정작 자신이 울 때 누군가에게 안겨본 적은 없다. 어쩌면 남성에게 가장 어려운 친밀감은 몸을 벗는 것이 아니라 강한 척하는 옷을 벗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빠지는 사건이라기보다 하나의 능력이라고 보았다. 돌봄, 바카라임, 존중, 이해. 그에게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그 사람의 존재와 삶이 자라도록 관심을 갖는 일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남성의 욕망에도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나는 이 여자를 원하는가. 좋다. 그런데 그다음 질문은 무엇인가. 나는 이 사람이 행복하기도 원하는가. 욕망은 “당신을 갖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조금 다르게 말한다. “당신이 당신답게 존재하기를 원한다.”이 둘의 차이를 배우는 것이 성숙한 남성성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자의 성욕을 흔히 강한 본능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생물학적 요인은 존재한다. 호르몬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 사람의 욕망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남성의 욕망 역시 관계, 스트레스, 건강, 나이, 자기 이미지, 상대와의 정서적 거리, 과거의 경험에 따라 변한다. 어떤 날에는 강하고, 어떤 날에는 약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욕망이 생기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데 슬롯는 남성에게 이상한 압박을 준다. “남자는 언제나 원해야 한다.”이 믿음은 생각보다 많은 남성을 힘들게 한다. 남자가 섹스를 거절하면 이상하게 보는 경우가 있다. “남자가 왜?”그러나 남자에게도 원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피곤할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힘들 수도 있으며,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랑하지만 오늘은 섹스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남자의 몸도 자동기계가 아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남성성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욕망과 성적 능력을 동일시하는 것도 남성을 불안하게 만든다. 발기, 지속 시간, 성적 횟수, 상대를 얼마나 만족시켰는지. 이 모든 것이 어느 순간 남자의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처럼 변한다. 그러면 섹스는 만남이 아니라 시험장이 된다. 상대의 몸을 느끼기보다 자기 자신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잘하고 있나?”“실패하면 어떻게 하지?”“비교당하지 않을까?”그 순간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욕망은 평가받을수록 위축된다. 에스더 페렐은 에로티시즘에 놀이와 호기심, 자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는 이것이 남성에게 특히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섹스를 ‘잘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놀이가 사라진다. 섹스는 경기 종목이 아니다. 점수가 없다. 기록도 없다. 누가 더 오래 했는지가 누가 더 깊이 사랑했는지를 말해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성을 너무 쉽게 능력의 문제로 만든다. 좋은 섹스는 한 사람이 자기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도 사람이 서로의 반응을 함께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좋은 연인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묻는 사람이다. “괜찮아?”“어때?”“이게 좋아?”“천천히 할까?”이 질문을 어떤 남자는 자신감 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다. 자기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람만이 상대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을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았다. 타인의 얼굴은 나에게 소유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 철학은 성적 관계에서도 아름다운 의미를 갖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아무리 오래 알아도 그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결혼했다고, 어제 서로를 원했다고 해서 오늘 상대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친밀함은 소유권이 아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남성의 욕망은 전혀 다른 형태를 갖는다. 원하지만 기다릴 수 있고, 다가가지만 멈출 수 있으며, 거절당해도 상대를 벌주지 않는다. “싫어.”이 말을 들었을 때 남성의 욕망이 시험받는다.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내가 매력 없는 건가?”하지만 상대의 거절은 나의 존재 전체에 대한 거절이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그 행동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 있다. 성숙한 남자는 거절을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알고 있다. 욕망은 요청할 수 있지만 응답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독교는 남성의 욕망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절제를 강조했다. 그러나 절제가 욕망의 부정이라고 생각하면

중요한 것을 놓친다. 절제는 욕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그 욕망과 관계를 맺는 능력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 가운데 ‘절제’가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절제는 냉정함이 아니다. 뜨거움이 없는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뜨거운 욕망을 가지고도 그 욕망이 타인을 해치지 않도록 다룰 수 있는 힘이다. 욕망이 강한 사람이 멈출 수 있을 때 절제는 비로소 의미가 있다. 예수의 산상수훈에는 욕망의 시선에 관한 매우 급진적인 말이 나온다. 당시 슬롯에서는 여성을 욕망의 원인으로 돌리기 쉬웠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바라보는 사람 자신의 바카라임을 묻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다. 여성이 무엇을 입었는가 보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보다 내가 그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남성의 욕망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는 말이 무바카라임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가서』를 다시 읽어보면 남성의 욕망도 매우 흥미롭게 표현된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성의 몸을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을 바라보고 욕망한다. 둘 사이에는 상호성이 있다. 한쪽만 보고 한쪽만 보이는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섹스의 미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남자는 주체이고 여자는 대상이라는 오래된 구조를 넘어도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바라보이는 관계. 이때 욕망은 정복이 아니라 만남이 된다.


남자의 욕망에는 소유욕이 들어올 때가 있다. “내 여자.”이 말은 친밀한 애칭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조금만 잘못 사용하면 위험해진다. 누구와 만나는지, 무엇을 입는지,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안심되는 관계.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과 통제는 다르다. 불안 때문에 상대를 통제하는 것은 상대를 사랑한다기보다 내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상대를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래서 정말 매력적인 남성성에는 묘한 여유가 있다. 자신의 여자를 붙잡아두기 위해 세상을 차단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자유로워도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도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도 그 사람의 선택을 신뢰한다. 나는 이것을 힘보다 훨씬 강한 남성성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의 욕망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인정 욕구다.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에게 선택받았을 때 특별한 기쁨을 느낀다. 그것은 성적인 만족만은 아니다. “저 사람이 나를 선택했다.”그 감각은 자기 존재의 가치와 연결되기 쉽다. 그래서 이별은 남성에게 사랑의 상실뿐 아니라 자존감의 상실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인가.”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조심해야 한다. 한 사람의 선택이 내 가치 전체를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선택적이지만

존엄은 선택적이지 않다.

de5e2435a7465383ddaffe4af87e1571.gif남자의 욕망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인정 욕구다

종교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한 인간의 가치는 욕망받음보다 먼저 존재한다. 창세기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가, 얼마나 성적으로 능력 있는가, 얼마나 젊고 매력적인가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남성에게도 필요한 해방이다. 남자는 자신의 남성성을 섹스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성숙한 남성성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수 있는 데서 보일 수도 있다. “오늘은 자신이 없어.”“요즘 내가 좀 힘들어.”“사실 거절당할까 봐 무서웠어.”“네가 떠날까 봐 불안했어.”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남성성을 잃는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보여주는 일이다. 육체적 누드보다 훨씬 어려운 누드다.


어쩌면 남자에게 가장 깊은 섹스는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순간이 아니 라자신의 두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힘센 척하지 않아도 되고, 능숙한 척하지 않아도 되며, 항상 준비되어 있는 척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앞에서 남자의 몸 역시 편안해진다. 그때 욕망은 과시에서 벗어난다. 증명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의 욕망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끌리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성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모든 욕망이 그대로 행동의 권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숙함은 욕망을 없애는 데 있지 않다. 욕망하면서도 상대를 잃지 않는 데 있다. 몸을 원하면서 몸 안의 사람까지 보는 것. 가까워지고 싶으면서 상대의 거절을 존중하는 것. 욕망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욕망보다 더 크게 보는 것.


그리고 여기에서 남자의 욕망은 아주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 남자는 여자를 바라본다. 아름답다고 느낀다. 원한다. 그러나 그녀를 차지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궁금해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랑받고 싶은지. 그때 남자의 욕망은 소비에서 관심으로 이동한다. 나는 그런 욕망을 좋아한다. 급하지 않은 욕망.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 욕망. 상대를 정복하려 하지 않는 욕망. 그리고 상대가 스스로 다가올 공간을 남기는 욕망. 그 욕망에는 이상한 품격이 있다. 원하지만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것은 욕망이 약해서가 아니다. 욕망보다 상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정말 섹스만 원하는가. 어떤 남자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남자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원한다. 선택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안기고 싶다. 자신의 약함을 보여주고도 사랑받고 싶다. 그리고 어떤 남자는 그 모든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그저 이렇게 말한다. “보고 싶어.”혹은 “안고 싶어.” 어쩌면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은 그 문장 뒤에 숨어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당신 앞에서는 나도 조금 약해져도 괜찮을까.”그 질문에 안전하게 대답할 수 있는 관계라면 섹스는 더 이상 남성성을 증명하는 무대가 아니다. 두 사람이 모두 자신의 방어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가 된다.


03a15301328003ad36407335aa6ca840.gif남자는 정말 섹스만 원하는가.

여성에게 욕망할 자유가 필요했듯이 남성에게도 욕망하지 않을 자유가 필요하다. 여성에게 “원한다”라고 말할 자유가 필요했듯이 남성에게는 “무섭다.”“외롭다.”“오늘은 원하지 않는다.”“나도 사랑받고 싶다.”라고 말할 자유가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남자는 ‘항상 욕망하는 남자’라는 가면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나는 그것을 여덟 번째 섹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좋은 남자의 욕망은 강한 욕망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욕망의 바카라임을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는 욕망이다. 당신을 원한다. 그러나 당신은 내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 그러나 당신이 멈추라고 하면 나는 멈출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깊은 고백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의 몸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앞에서 나 역시 한 사람으로 사랑받고 싶다.”그 순간 남자의 욕망은 정복이 아니라 친밀함이 된다. 그리고 섹스는 누가 누구를 가졌는가의 사건이 아니라도 사람이 서로에게 조금 더 진실해진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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