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욕망은
왜 오래 침묵해야 했을까

욕망받는 여자에서 욕망하는 여자로

byNavyblue

오랫동안 여자는 욕망의 주체라기보다 욕망의 대상이었다. 아름다워야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너무 많이 말해서는 안 되었다. 사랑받아야 했지만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면 가벼워 보였고, 매력적이어야 했지만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위험한 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남자가 여자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여겨졌지만 여자가 누군가를 원한다고 말하면 그 욕망에는 곧 도덕적인 이름표가 붙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여성에게는 오랫동안 욕망받을 자유는 주어졌지만 욕망할 자유는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이 역사적으로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기보다 남성의 시선 속에서 ‘타자’로 만들어져 왔다고 분석했다. 남자는 바라보고, 여자는 바라보이는 존재가 된다. 남자는 선택하고, 여자는 선택받는다. 남자는 욕망하고, 여자는 욕망받는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여성은 어느 순간 자신의 욕망보다 “나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누구를 원하는가 보다 누가 나를 원하는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욕망의 방향이 자기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을 향해 되돌아온다.

그래서 어떤 여성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남자가 자신을 원하는지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서양 미술의 오랜 전통 속에서 남성은 행동하는 존재로, 여성은 보이는 존재로 표현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누드는 그 대표적인 장면이다. 그림 속 여성은 벌거벗어 있지만 그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게 된다. 그녀는 자기 몸을 느끼는 사람인가. 아니면 관람자의 눈을 위해 놓여 있는 몸인가. 미술관의 그림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끝나지 않았다. 광고, 영화, SNS, 포르노그래피, 패션.

여성의 몸은 여전히 끊임없이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토록 많이 보이는 여성의 몸에 비해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말하는 언어는 훨씬 늦게 발전했다.

image.png놀랍게도 그토록 많이 보이는 여성의 몸에 비해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말하는 언어는 훨씬 늦게 발전했다.

여성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원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웠다. 여성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욕망한다”라고 말하면 사랑과는 다른 평가가 따라왔다. 정숙하지 않다. 가볍다. 문란하다. 적극적이다. 그래서 여성의 욕망은 종종 사랑이라는 언어 안에 숨어야 했다. “그 사람을 사랑해서요.”

그 말은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육체적으로 끌려요.”라는 말은 훨씬 어려웠다. 마치 사랑이 욕망을 정당화해 주는 허가증처럼 사용된 것이다.


프로이트 역시 여성의 성욕을 연구했지만 그의 여성성 이론은 이후 많은 여성주의 학자들에게 비판받았다. 특히 여성의 욕망을 남성 중심적인 기준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는 비판이다. 후대의 정신분석학자와 여성주의자들은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다. “여성은 왜 남성과 다르게 욕망하는가?”보다 먼저 “우리는 여성의 욕망을 누구의 언어로 설명해 왔는가?”라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질문이 바뀌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image.png“우리는 여성의 욕망을 누구의 언어로 설명해 왔는가?”

프랑스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서구 문화에서 여성의 욕망이 남성 욕망의 거울처럼 다뤄져 왔다고 비판했다. 남자가 원하는 여성이 되는 것. 남자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몸이 되는 것. 그러나 여성에게도 자신만의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은 남성 욕망의 복사본이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의 방식으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여성의 욕망도 사람마다 다르다. 강한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고, 친밀감이 먼저 필요한 사람도 있으며, 신체적 끌림이 먼저 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욕망과 사랑을 잘 분리하고, 어떤 사람은 둘이 함께 있을 때 가장 깊이 반응한다. 그러므로 “여자는 원래 이렇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너무 거칠다. 여자도 하나의 성별이기 전에 각기 다른 한 사람이다.


현대 성 연구에서도 여성의 욕망은 단순한 한 가지 메커니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성 연구자 로즈메리 뱃슨은 여성의 성적 반응이 항상 ‘욕망 → 흥분 → 관계’라는 직선적인 순서로만 진행되지 않을 수 있음을 설명했다. 때로는 안전함, 정서적 친밀감, 접촉, 관계의 분위기에서 시작되어 그 뒤에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은 욕망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욕망이 맥락 속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욕망은 버튼이 아니다. 특히 관계 안에서는 상대의 말투, 존중, 안전감, 신뢰, 그날의 감정까지 모두 몸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욕망은 단순히 몸의 문제가 아니다. 관계가 몸 안으로 들어온 결과이기도 하다.


에스더 페렐은 장기적인 관계에서 사랑과 욕망 사이에 흥미로운 긴장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 안전하고 싶어 하고, 상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욕망에는 때때로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익숙해진 상대가 문득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보일 때,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 없이 자기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다시 매혹이 생기기도 한다. 여성의 욕망 역시 단순히 친절하고 안정적인 관계만으로 자동 발생하지 않는다. 안전함은 중요하지만 욕망에는 생동감도 필요하다. 나는 당신에게 안전하고 싶지만 동시에 당신에게 여전히 매혹되고 싶다. 사랑과 에로티시즘이 함께 살아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종교는 여성의 욕망을 어떻게 다뤄왔을까.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의 성은 너무 자주 위험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브는 유혹의 상징이 되었고, 여성의 몸은 남성을 넘어뜨릴 수 있는 위험으로 설명되었으며, 정숙함은 주로 여성에게 더 엄격하게 요구되었다. 교회사 속에서 이런 언어들은 여성의 몸과 욕망을 수치심과 연결시키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읽으면 조금 다른 목소리도 들린다. 가장 놀라운 바카라이 『아가서』다.


『아가서』에서 여자는 수동적이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보고 싶어 한다. 부른다. 다가간다.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 여기에는 남자에게 선택받기만 기다리는 여성이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아는 여성이 있다. 고대 종교문헌 안에 이토록 육체적이고 상호적인 사랑의 시가 존재한다는 것은 놀랍다. 아가서는 말한다. 여성의 욕망 역시 인간의 사랑 안에 있다.


예수의 이야기를 보아도 당시 슬롯가 여성에게 부여했던 성적 낙인과 예수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다. 복음서에는 ‘죄인’이라 불리던 여성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성적 소문 하나로 정의하지 않는다. 슬롯가 여성을 과거와 몸으로 규정할 때 예수는 한 사람을 한 인격으로 다시 세운다. 이것은 성윤리에서 중요한 관점이다. 사람은 자신의 성적 경험보다 크다. 처녀성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서도 안 되고, 성 경험의 많고 적음으로 인격의 높고 낮음을 정해서도 안 된다. 인간의 존엄은 성적 이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종교 공동체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욕망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남성 청년에게는 “성욕을 잘 절제하라”라고 가르친다. 이 말에는 적어도 남자에게 성욕이 있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여성에게는 그 욕망 자체를 인정하는 언어가 훨씬 적었다. 여성은 욕망하기보다 유혹당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욕망을 표현하기보다 몸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물론 자기 몸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몸을 보호하는 것과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다르다. 성적 절제와 성적 억압도 다르다. 절제는 자신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욕망을 바카라임 있게 다루는 것이다. 억압은 말한다. “나는 이런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둘은 전혀 다른 마음이다.


여성이 자기 욕망을 인정할 때 중요한 변화가 하나 일어난다. 거절도 더 분명해진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인다. 욕망을 인정하면 더 쉽게 관계를 허락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원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는 이것은 원하지 않아.”라고 말할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건강한 성교육은 욕망을 없애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경계를 알아차리는 교육이어야 한다.


여성의 “싫어”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여성에게는 “좋아”라고 말할 권리도 있다. 나는 당신이 좋다. 당신에게 끌린다. 당신의 손을 잡고 싶다.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다. 이런 말을 여성이 먼저 한다고 해서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욕망의 표현은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품격은 욕망의 유무가 아니라 욕망을 어떻게 표현하고 바카라임지는가에서 생긴다.

image.png여성에게는 “좋아”라고 말할 권리도 있다.

여기에서 ‘동의’의 개념도 조금 더 깊어질 필요가 있다. 동의는 단순히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더 좋은 관계는 상대가 적극적으로 원하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성관계 도중에도 마음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중간에 싫어질 수도 있다. 어제 좋았다고 오늘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연인이라고 해서, 부부라고 해서, 전에 허락했다고 해서 앞으로의 몸까지 자동으로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몸은 계약서가 아니다. 오늘의 몸에는 오늘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여성의 욕망을 오랫동안 수동적인 것으로 규정했던 문화에서는 특히 중요하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좋다. 싫다. 천천히. 조금 더 가까이. 오늘은 아니야. 이것이 편안해. 이건 불편해. 이런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다. 섹스의 미학은 말없이 모든 것을 알아맞히는 데 있지 않다. 말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를 만드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섹스에서 능숙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능숙함은 상대의 몸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의 표현을 들을 줄 아는 능력일 수 있다. 좋은 연인은 상대의 몸을 정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가 자기 몸 안에서 더 자유로워지도록 돕는 사람이다. “너는 어떻게 좋아?” 이 질문은 단순한 기술적 질문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이런 의미가 있다. “내 방식보다 당신의 느낌이 중요하다.” 이것은 욕망의 민주주의다.


미학적으로 보면 욕망하는 여성은 아름답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것은 자극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 몸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알고, 타인의 시선만으로 자기 몸을 평가하지 않으며, 자신의 감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특별한 생동감이 있다. 욕망은 생명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 확장하려는 힘과 연결해 보았다. 우리는 살아 있기에 원한다. 더 알고 싶고, 더 만나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다. 욕망은 결핍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성의 욕망을 해방한다는 것은 무조건 더 많은 성관계를 가지라는 뜻일까. 전혀 아니다. 그것 역시 또 다른 강요일 뿐이다. “자유로운 여성이라면 성적으로 적극적이어야 한다.” 이 문장 역시 여성에게 새로운 기준을 강요한다. 욕망의 해방은 많이 하는 것도, 적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누군가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만 관계를 원하고, 누군가는 다른 방식의 관계를 선택한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금욕을 선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인가이다.


진정한 성적 자유에는 “할 자유”와 함께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먼저 다가갈 자유와 거절할 자유. 욕망을 표현할 자유와 말하지 않을 자유. 자기 몸을 드러낼 자유와 감출 자유. 누구도 그 선택 때문에 여성을 성녀나 창녀로 분류할 권리는 없다. 사람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나는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하면서 남성과 싸우고 싶지는 않다. 남성 역시 오래된 성 역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언제나 먼저 원해야 하고, 적극적이어야 하고, 성욕이 강해야 하며, 거절당해도 다시 시도해야 한다는 문화 역시 남성을 왜곡시킨다. 그래서 여성의 욕망이 자유로워지면 남성도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남자가 모든 관계의 시작을 바카라임지지 않아도 되고, 여성의 마음을 추측해야만 하는 부담도 줄어든다. 서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해. 나는 아직 모르겠어. 나는 지금은 싫어. 나도 좋아. 사랑은 추측 게임에서 벗어날수록 건강해진다.


나는 이런 관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욕망의 대상만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모두 욕망의 주체가 되는 관계. 당신이 나를 원하고 나도 당신을 원한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원하지 않는 날도 존중하고, 내가 당신을 원하지 않는 순간도 존중받는다. 욕망은 오고 간다. 하지만 존중은 남는다.


어쩌면 이것이 여성의 욕망이 오랫동안 침묵한 뒤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인지 모른다. 좋은 섹스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원하는 사건이 아니다. 두 개의 욕망이 만나는 사건이다. 두 사람이 모두 주체이고, 두 사람이 모두 선택하며, 두 사람에게 모두 멈출 권리가 있고, 두 사람에게 모두 원하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정복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image.png좋은 섹스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원하는 사건이 아니다. 두 개의 욕망이 만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여자는 욕망받는 존재”라는 오래된 문장을 내려놓고 싶다. 여자는 아름다울 수 있다. 욕망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자는 바라본다. 선택한다. 원한다. 때로는 거절한다.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 속에서도 존엄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비로소 한 사람의 몸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내 몸은 누군가가 평가하기 위해 존재하는 몸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고, 느끼고, 사랑하는 몸이다. 그리고 한 여성이 그 사실을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 욕망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고백이 된다. 나는 그것을 일곱 번째 섹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욕망받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 욕망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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