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몸보다 욕망받는 몸

우리는 왜 완벽한 사람보다 어떤 한 사람에게 더 끌리는가

byNavyblue

아름다운 몸은 있다. 균형 잡힌 얼굴, 잘 관리된 피부, 매끈한 선, 사람들이 흔히 아름답다고 부르는 비율. 그런데 이상하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과 욕망하는 사람은 꼭 같지 않다. 누군가를 보며 우리는 말한다. “정말 예쁘다.” 혹은 “정말 잘생겼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다. 반대로 객관적인 기준으로는 특별하지 않은데도 자꾸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목소리가 좋고, 웃을 때 생기는 작은 주름이 좋고, 컵을 잡는 손이 좋고, 생각하다가 잠시 시선을 내리는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그 사람의 몸은 완벽해서 매력적인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몸이 그 사람답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어쩌면 욕망은 아름다움보다 훨씬 개인적인 사건인지도 모른다.

image.png욕망은 아름다움보다 개인적인 사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름다움에 기준을 만들어왔다. 황금비율. 대칭. 젊음. 날씬함. 탄력. 매끄러운 피부. 시대마다 기준은 달랐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아름다운 몸을 숫자와 비례로 설명하려 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을 보면 이런 욕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몸을 이상적인 비례로 완성하고 싶어 했다. 그들에게 아름다움은 질서와 조화였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몸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 조금 비대칭이고, 흉터가 있고,

살이 접히고,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 몸을 더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미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문제다. 아름다움은 완전함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매혹은 불완전함에서도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몸을 단순한 물질로 보지 않았다. 우리는 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세계를 살아간다. 내 몸은 내가 세상을 보고, 만지고, 사랑하고, 상처받는 방식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몸은 살과 뼈로만 이루어진 물체가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몸에 쌓인다. 웃는 방식. 걷는 방식. 사람을 안는 방식. 긴장할 때 손가락을 움직이는 버릇. 피곤한 날의 어깨. 오래 웃어서 생긴 눈가의 주름.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몸의 형태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몸을 통해 살아온 한 사람의 존재를 욕망한다.


이것이 사진과 실제 사람의 차이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사진으로는 아름다운데 실제로 만나면 이상하게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사진에서는 평범해 보이는데 만나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움직이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있고, 체온이 있고, 향기가 있고, 표정이 변하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있다. 매혹에는 언제나 시간이 들어간다. 정지된 아름다움보다 살아 움직이는 몸이 훨씬 복잡하다. 나는 그래서 아름다움과 섹시함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감탄하게 하지만 매혹은 가까이 가고 싶게 한다. 아름다움은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지만 욕망은 그 거리를 줄이고 싶어 한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을 인간 존재의 중요한 문제로 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바라보는 사람’에서 동시에 ‘바라보이는 사람’이 된다. 욕망에도 이 구조가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욕망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에게 욕망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두 욕망이 함께 존재한다. 당신을 원한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 두 번째 욕망은 때때로 첫 번째보다 더 강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예뻐?”라고 묻는다. 사실 그 질문은 미학적 평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예쁜가?”를 묻는 것도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일 수 있다. “당신의 눈에 나는 여전히 특별한가?”

image.png당신의 눈에 나는 여전히 특별한가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중요한 이유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사람은 외로워질 수 있다. 반대로 세상의 기준에서는 평범해도 한 사람의 눈 안에서는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사랑은 아름다움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투표로 결정되지 않는다. 백 명이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사람보다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욕망에는 객관적인 평균이 없다. 그래서 욕망은 불공평하면서도 아름답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특별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도 있다. 욕망받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커지면 우리는 자신의 몸을 타인의 시선으로만 보기 시작한다. “내가 매력적인가?” “내 몸이 충분히 날씬한가?”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예쁜가?” 이 순간 몸은 살아가는 몸이 아니라 평가받는 몸으로 변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이 역사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도록 훈련받아온 문제를 비판했다. 특히 여성의 몸은 자신이 살아가는 몸이기보다 타인에게 보이는 몸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걷는 법, 앉는 법, 입는 법, 늙는 법까지 슬롯가 끊임없이 평가했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 몸 안에서 살기보다 마치 자기 몸 밖에 서서 자신을 감시하게 된다.


현대 문화는 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진을 찍는다. 보정한다. 각도를 찾는다. 올린다. 반응을 확인한다. 좋아요의 숫자가 내 몸의 가치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몸과 내가 살아가는 몸은 다르다. 사진에는 복근이 보일 수 있지만 그 몸이 누군가를 얼마나 따뜻하게 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피부가 매끄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 손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어떻게 닦아주는지는 알 수 없다. 몸의 아름다움은 이미지보다 크다.


미셸 푸코는 현대 슬롯에서 몸이 권력과 규율의 중요한 대상이 되어왔음을 보여주었다. 슬롯는 어떤 몸이 정상인지, 얼마나 날씬해야 하는지, 얼마나 젊어 보여야 하는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말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몸을 관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자유 안에도 수많은 슬롯적 명령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자기 관리해야지.” 이 말은 때로 좋은 뜻이다. 건강을 돌보고 자신을 가꾸는 일은 분명 아름답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말로 바뀌기도 한다. “관리하지 않는 몸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그때부터 자기 관리는 사랑이 아니라 공포가 된다.


나는 운동하는 몸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단단해지고, 건강해지고, 자기 몸을 돌보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운동하는 이유가 자신의 몸을 미워하기 때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몸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어.” “이 배를 없애야 누군가 나를 원할 거야.” 이런 마음으로 몸을 다루면 아무리 아름다운 몸을 만들어도 만족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문제는 몸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서 ‘존재’와 ‘소유’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몸에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나는 내 몸을 소유물처럼 관리하는가. 아니면 이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소유의 관점에서는 몸이 상품이 된다. 더 젊게. 더 날씬하게. 더 매력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도록. 그러나 존재의 관점에서는 몸이 삶이 된다. 이 몸으로 걷고, 먹고, 웃고, 사랑하고, 늙어간다. 몸은 전시장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집이다.


종교의 몸에 대한 태도도 복잡하다. 기독교 역사 안에서는 오랫동안 몸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이분법이 강하게 작용한 적이 있다. 성적 매력을 위험한 것으로 보고, 육체를 유혹의 자리로 경계하며, 특히 여성의 몸을 죄의 원인처럼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성서의 시작은 조금 다르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인간을 몸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고 그 창조를 “좋다”라고 말한다. 몸은 실수가 아니다. 영혼이 잠시 머무는 부끄러운 껍데기도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성육신 역시 그렇다. 하나님이 몸을 버리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입었다고 고백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정신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먹고, 걷고, 피곤하고, 울고, 상처받는 몸으로 인간 가운데 들어온다. 이것은 몸에 관한 대단히 강력한 선언이다. 몸은 신성이 방문할 수 없는 낮은 장소가 아니다.


『아가서』는 더 과감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아름답다고 노래한다. 눈, 입술, 머리카락, 몸의 향기. 성서 한가운데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노래가 존재한다. 이것은 중요한 균형을 준다. 몸을 욕망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저급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몸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각이다. 문제는 다시 한번 그 몸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다.


마르틴 부버의 표현을 빌리면 몸 역시 ‘그것’으로 볼 수도 있고 ‘너’로 만날 수도 있다. “저 몸이 좋다.” 여기에서 끝나면 상대는 소비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달라진다. “저 몸 안에 한 사람이 살고 있다.” 그 몸에는 삶이 있다. 그 사람이 싫어하는 부분도 있고, 아픈 곳도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기억도 있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것이 두려웠던 밤도 있을 수 있다. 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몸을 가진 사람까지 함께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사랑받을 때 사람의 몸은 더 아름다워진다. 왜일까. 안전하기 때문이다. 평가받지 않는다고 느낄 때 몸의 긴장이 풀린다. 배를 조금 감추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완벽한 각도를 찾지 않아도 되고, 조명이 좋지 않아도 괜찮다. 그때 사람은 보여주기 위한 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것이 정말 에로틱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몸 안에서 편안한 사람. 그 사람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다.


욕망받는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욕망받는 것은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선택받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가까이 있고 싶다.” “당신의 손을 잡고 싶다.” “당신의 냄새가 좋다.” “당신의 몸이 좋다.” 그 모든 말의 밑바닥에 “나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마음이 있을 때 욕망은 사랑의 언어가 된다.


욕망받는 것은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선택받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강렬하게 욕망받아도 그 욕망이 사람을 지워버릴 때가 있다. 상대가 나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불편한 지조차 묻지 않는다. 몸만 원한다. 그때 ‘욕망받는다’는 말은 처음에는 기분 좋을 수 있지만 오래가면 공허하다. 몸은 선택받았는데 나는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이런 사랑을 원한다. 내 몸을 원하면서도 나라는 사람까지 궁금해하는 사랑.**


수전 손택은 아름다움에 관해 우리가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도덕 화하거나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할 때 생기는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일 뿐 그 사람의 가치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 예쁜 사람이 더 선한 것도 아니고, 젊은 몸이 더 가치 있는 것도 아니며, 욕망받지 않는다고 인간의 존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욕망은 선택적이다. 존엄은 선택적이지 않다. 나는 모든 사람을 욕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종교적 언어 하나가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는 인간의 가치를 외모나 젊음이나 매력에서 찾지 않는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몸의 가치는 누군가가 얼마나 나를 원하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욕망의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해방이다. 나는 욕망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가치는 누군가의 시선보다 먼저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랑받기 위해 몸을 끊임없이 증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쉽다. 중요하다. 우리는 몸을 가진 인간이다.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몸에 끌린다. 누군가가 섹시하게 느껴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문제는 외모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외모가 전부라고 믿는 것이다. 사랑은 몸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몸을 포함하면서 몸보다 더 멀리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젊었을 때의 몸은 변한다. 피부는 달라지고, 머리카락도 달라지고, 근육도 달라진다. 그런데 오래된 연인 가운데는 서로의 늙은 몸을 여전히 욕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객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20대의 몸보다 60대의 몸이 더 완벽해서가 아니다. 그 몸 안에 함께 살아온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안았던 팔. 병원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던 손. 여행지에서 함께 걸었던 다리. 수천 번 바라본 얼굴. 그 몸은 더 이상 육체만이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 쓴 역사다. 그래서 오래된 사랑의 몸은 젊음과 다른 방식으로 에로틱할 수 있다.


젊었을 때의 몸은 변한다. 나는 이것을 아름다움의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매끈한 것을 좋아한다. 완벽한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람을 오래 사랑하다 보면 조금씩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웃을 때 생기는 주름. 잠든 얼굴. 샤워하고 나온 뒤 헝클어진 머리. 피곤해서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 운동 후 땀에 젖은 몸.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일상적인 몸.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몸이 더 좋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나에게 허락된 친밀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의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아름다운 몸”보다 “그 사람의 몸”이 중요해진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다. 나는 저 손을 안다. 저 어깨를 안다. 저 사람의 향기를 안다. 저 사람이 웃을 때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 안다. 그 순간 욕망은 비교에서 벗어난다. 사랑은 몸을 순위에서 해방시킨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욕망하는가가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몸을 평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내 몸 안에 살아 있는 나까지 바라봐주는가. 그리고 나 역시 그 사람의 몸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가. 몸은 아름다울 수 있다. 섹시할 수 있다. 관리할 수도 있고, 더 건강하고 멋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 모든 기쁨을 굳이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몸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은 완벽함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안심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데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배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것. 조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나이가 든 흔적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 상처 난 피부를 보여주어도 되는 것. 그리고 상대의 눈에서 실망 대신 다정함을 발견하는 것. 나는 그런 순간에 섹스의 가장 깊은 미학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내 몸을 원한다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이 내 몸을 통해 나를 만나고 있다는 확신이다.


아름다움은 감탄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매혹은 관계 안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가장 깊은 욕망은 완벽한 몸을 찾아다니는 욕망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을 그 사람의 것으로 사랑하게 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이제 예전 같지 않지?”라고 묻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아니야, 하나도 안 변했어”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변한다. 몸도 변한다. 어쩌면 더 진실한 대답은 이것이다. “변했지. 그런데 나는 지금의 당신도 알고 싶어.” 사랑은 시간을 멈추는 일이 아니라 변해가는 몸을 계속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된다. 욕망받는 몸이란 모두가 탐내는 몸이 아니다. 한 사람이 오래 바라보아도 계속 새롭게 만나고 싶은 몸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섯 번째 섹스의 미학이다.

image.png아름다움은 감탄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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