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가

하지 말라는 말이 마음을 더 뜨겁게 만드는 이유

byNavyblue

“하지 마.” 이상한 말이다. 그전까지 별로 관심도 없던 것이 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궁금해진다. 보지 말라고 하면 보고 싶고,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문 안쪽이 궁금하며,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왜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가. 욕망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금지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금지가 욕망을 더 크게 만든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에는 아주 오래된 역설이 하나 있다. 경계는 욕망을 막기도 하지만, 때로는 바로 그 경계가 욕망을 만들어낸다.


성서의 첫 인간 이야기에도 금지가 등장한다. 에덴동산에는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먹을 수 있는 열매는 넘쳐났다. 그런데 인간의 시선은 이상하게도 먹지 말라는 단 하나의 나무를 향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금지된 순간 그 열매는 더 이상 평범한 열매가 아니게 된다.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 안 되는가. 먹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세기 이야기를 단순히 “하나님의 말을 안 들어 벌을 받았다”는 도덕 이야기로만 읽으면 인간에 관한 중요한 통찰 하나를 놓칠 수 있다. 이 이야기에는 욕망의 탄생이 있다. 금지된 것은 단순히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알고 싶은 것이 된다. 인간은 경계 앞에서 질문하는 존재다.

image.png금지된 것은 단순히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알고 싶은 것이 된다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7장에서 흥미로운 고백을 한다. 계명이 “탐내지 말라”라고 말했을 때 오히려 탐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법은 잘못된 욕망을 막기 위해 존재하지만 역설적으로 법이 금지하는 대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 마.”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아, 그런 것도 있구나. 그래서 금지는 단순한 벽이 아니다. 때로는 표지판이 된다. 여기에 당신이 원할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명이 본능을 일정 부분 억제함으로써 가능해졌다고 보았다. 사람이 떠오르는 모든 욕망을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면 공동체는 유지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참는다. 분노를 조절하고, 성적 충동을 제한하고, 슬롯적으로 허용되는 방식으로 욕망을 표현한다. 문명은 어느 정도 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억압된 욕망이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꿈으로, 상상으로, 농담으로, 예술로, 혹은 집착으로. 우리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절대로 저 사람을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그 사람을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은 꽤 장난스럽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서구 슬롯가 근대 이후 성을 그저 침묵시켰다는 단순한 설명을 비판했다. 성은 금지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말하게 되었다. 고백하게 하고, 분류하고, 진단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며, 성에 관한 거대한 담론을 만들어냈다. “말하지 마”라고 하면서 이상하리만큼 섹스에 대해 많은 말을 해온 것이다. 종교도, 의학도, 교육도, 법도 인간의 성을 끊임없이 정의했다. 이 지점에서 금지는 흥미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금지는 욕망을 없애지 않는다. 때로 욕망을 더욱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조르주 바타유에게 에로티시즘은 금지와 위반의 긴장 속에서 생겨난다. 금지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위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반할 것이 없다면 그 특유의 긴장도 사라진다. “안 된다”는 경계가 있기 때문에 그 경계를 넘는 순간은 특별해진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부모가 잠든 뒤 몰래 밖에 나가는 일은 낮에 같은 길을 걷는 것과 전혀 다르다. 거리는 똑같다. 밤도 똑같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다.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 그 한 가지 평범한 경험을 모험으로 바꾼다. 사랑도 때때로 그렇다.


“저 사람은 만나면 안 돼.” 친구들이 말한다. 가족이 반대한다. 슬롯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는 하나의 서사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세상에 맞서는 사람들. 아무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둘만 서로를 안다. 그 순간 평범한 연애가 운명적인 사랑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금지된 사랑은 종종 강렬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도 있다. 금지 때문에 강렬한 감정을 사랑의 깊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사랑을 그렇게 뜨겁게 만든 것 가운데 하나가 가문의 적대라는 장벽이었다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다. 만약 양가 부모가 첫날부터 말했다면 어땠을까. “둘이 잘 어울리는구나. 주말에 같이 식사하자.”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사랑 이야기가

상당히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금지는 사랑을 힘들게 했지만 동시에 사랑의 감정을 증폭시켰다. 장벽은 두 사람에게 “우리 사랑은 특별하다”는 감각을 제공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물어야 한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이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 때문에 더 집착하는가. 둘은 전혀 다른 문제다.

image.png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이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 때문에 더 집착하는가.

르네 지라르는 욕망에 대해 더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았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 이유는 그 사람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자주 모방적이라고 보았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도 관심 없던 물건인데 누군가 몹시 갖고 싶어 하면 갑자기 좋아 보인다. 한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을 보는 순간

묘한 질투가 생긴다. “저 사람이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었나?” 욕망에는 언제나 둘만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나. 내가 원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욕망하게 만드는 제삼자의 시선. 그래서 경쟁은 욕망을 증폭시킨다.


연애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헤어진 연인이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누군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흔들린다. 그 사람이 변한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다른 누군가의 욕망이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다시 사랑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는 감각 때문에 다시 원하게 된 것일까. 욕망은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다. 그 안에는 사랑뿐 아니라 경쟁, 질투, 소유욕, 자존심도 섞여 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종교는 이런 인간의 욕망을 오래 경계해 왔다. 그 이유를 무조건 시대착오적인 억압이라고만 볼 필요는 없다. 욕망이 통제되지 않을 때 타인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배우자를 욕망할 수 있고, 권력관계를 이용해 상대를 차지하려 할 수도 있으며,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자신의 욕망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따라서 모든 금지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경계는 인간을 억압하지만 어떤 경계는 인간을 보호한다. 성숙한 자유는 아무런 금지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십계명의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명령도 단순히 성적 욕망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문장이라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타인의 관계와 존엄을 침해하지 말라는 윤리로 읽을 수 있다. 욕망은 생길 수 있다. 마음은 명령한다고 바로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이 생긴 것과 그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감정에 대한 완전한 주인이 아닐지 몰라도 행동에 대해서는 바카라임을 져야 한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끌렸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처럼 미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끌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상대의 경계를 넘어설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욕망에 관한 말은 때때로 아주 엄격하게 들린다. 특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타인을 음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까지 문제 삼는다. 이 말씀을 단순히 “성적인 생각도 절대로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읽으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자체를 죄바카라감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수 있다. 나는 저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욕망을 위한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가. 욕망의 윤리는 욕망을 갖지 않는 데 있지 않다. 욕망하면서도 상대를 사람으로 보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욕망이 질서를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았다. 사랑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것조차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람이 나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들고 싶거나, 그 사람의 모든 인간관계를 통제하고 싶거나, 나에게서 떠날 자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소유일 수 있다. 종교가 욕망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그 욕망은 당신과 상대를 더 자유롭게 하는가.


그러나 종교가 금지를 잘못 사용할 때도 있다. 금지는 쉽게 권력이 된다. 왜 안 되는지 설명하지 않고 “원래 안 돼.” “하나님이 싫어하셔.” “질문하지 마.”라고 말하는 순간 윤리는 공포로 바뀐다. 특히 성에 관한 금지가 그렇다. 성적 욕망 자체를 더럽다고 가르치고, 몸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질문하는 사람에게 죄바카라감을 주면,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숨어버린다. 그리고 숨어버린 욕망은 건강하게 다루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좋은 종교는 금지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왜 그 경계가 필요한지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아이에게 난로를 만지지 말라고 하면서 “그냥 나쁜 거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뜨거워서 네 손이 다칠 수 있어”라고 설명하는 것은 다르다. 성윤리도 마찬가지다. “하지 마”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다. 누가 상처받는가. 누가 자유를 잃는가. 동의가 있는가. 권력의 불균형은 없는가. 바카라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상대의 몸과 마음을 존중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이 사라진 금지는 도덕주의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태어난 경계는 사랑의 형태가 될 수 있다.


미학적으로 보아도 금지는 흥미로운 역할을 한다. 음악에는 쉼표가 있다. 시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림에는 프레임이 있고 건축에는 벽이 있다. 경계가 있기 때문에 형태가 생긴다. 아무런 경계가 없는 캔버스는 아직 작품이 아니다. 사랑도 비슷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관계가 반드시 자유로운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지켜주는 경계가 있을 때 안심하고 가까이 갈 수 있다. “여기까지는 괜찮아.” “이것은 싫어.” “오늘은 아니야.” 이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관계.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상처받은 자존심보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관계. 이상하게도 이런 관계에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안전함 속에서도 에로티시즘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극적인 사랑을 깊은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만나면 안 되는 사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답장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 이런 관계에서는 감정이 크게 출렁인다. 그런데 감정의 진폭이 크다고 사랑이 깊은 것은 아니다. 불안은 놀라울 만큼 욕망과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밤새 연락을 기다리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버림받을까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만날 수 없어서 더 보고 싶은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장애물이 욕망을 증폭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랑에는 자기 욕망을 의심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사람이 정말 좋은가. 아니면 가질 수 없어서 좋은가.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에게 선택받음으로써 나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은가. 상대를 원하는가. 아니면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가. 욕망은 질문받을 때 비로소 사랑에 가까워진다.

image.png욕망은 질문받을 때 비로소 사랑에 가까워진다.

나는 금지된 사랑이 항상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슬롯가 금지했던 사랑 가운데는 금지 자체가 부당했던 경우도 많았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슬롯가 정한 규범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사랑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랑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금지했는가이다. 그리고 왜 금지했는가이다. 모든 경계가 신성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경계는 지켜야 하지만, 어떤 경계는 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함께 해야 한다. 왜 나는 이 경계를 넘고 싶은가. 그리고 이 경계는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욕망을 살핀다. 두 번째 질문은 윤리를 살핀다.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위험하다. 욕망만 보면 충동이 되고, 규칙만 보면 억압이 된다. 성숙한 인간은 그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어쩌면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는 상태가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 욕망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다. “나는 지금 저 사람을 원하고 있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 욕망을 어떻게 사랑답게 만들 수 있을까.” 욕망에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인간은 본능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철학이 시작되고, 윤리가 시작되고, 어쩌면 사랑도 그곳에서 시작된다.


금지된 열매는 언제나 조금 더 붉어 보인다. 닫힌 문 안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다.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문을 열 필요는 없다. 모든 열매를 먹어볼 필요도 없고, 모든 욕망을 사랑이라고 믿을 필요도 없다. 어떤 욕망은 따라가야 하고, 어떤 욕망은 바라보기만 해야 하며, 어떤 욕망은 보내줄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차이를 알아가는 것이 사랑의 성숙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욕망을 죄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욕망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무언가를 원하고, 누군가에게 끌리고,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그 자체는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하다. 멈출 수 있는 자유. 원하지만 갖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사랑하지만 떠나보낼 수도 있는 것. 가까이 가고 싶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멈출 수 있는 것. 욕망이 가장 강력한 순간에도 상대의 자유가 나의 욕망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나는 그것을 욕망의 품격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왜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가. 바타유라면 금지와 위반 사이의 긴장을 말할 것이고, 프로이트라면 억압된 욕망의 귀환을 이야기할 것이며, 푸코라면 금지가 오히려 성에 관한 수많은 담론과 권력을 만들어낸 과정을 살필 것이다. 지라르는 타인의 욕망을 따라 욕망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서는 금지된 열매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질문은 철학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왜 원하는가.

image.png왜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가

욕망은 우리를 끌고 간다. 사랑은 가끔 그 앞에 멈춰 서서 묻는다. 이 길 끝에 나만의 만족이 있는가. 아니면 두 사람의 자유가 있는가. 그 질문을 할 수 있을 때 금지는 더 이상 단순한 억압이 아니고, 욕망도 더 이상 단순한 충동이 아니다. 그 둘 사이에서 우리는 조금 더 인간다운 사랑을 배운다. 어쩌면 섹스의 미학은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을 아름답게 다루는 기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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