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몸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오래 욕망을 붙잡는 이유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해서 더 에로틱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때가 많다. 셔츠의 단추가 하나 풀려 있을 때, 소매 사이로 손목이 드러날 때, 머리카락을 넘기다 목선이 잠깐 보일 때, 우리는 완전히 드러난 몸보다 잠시 보였다 사라지는 몸에 더 오래 시선을 빼앗긴다. 왜 그럴까. 욕망은 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마음이 함께 있다. 그래서 에로티시즘은 얼마나 많이 벗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상상을 남겨두었느냐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시즘』에서 에로티시즘을 단순한 성행위와 구별한다. 동물에게도 성행위는 있지만
인간의 성에는 금지와 부끄러움, 은폐와 위반이라는 복잡한 문화적 층위가 더해진다. 인간은 몸을 가린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벗는 행위에 특별한 의미가 생긴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다면 벗는다는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에로티시즘을 만드는 것은 노출만이 아니라 금지다. 가림이 있기 때문에 드러남이 있고, 거리가 있기 때문에 가까워짐이 있으며, 문이 있기 때문에 문을 여는 일이 특별해진다.
바타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에로티시즘은 금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의식하면서 넘어가는 긴장 속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인간은 오래전부터 몸을 완전히 보여주기보다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해왔다.
옷은 몸을 감추지만 동시에 몸을 상상하게 한다. 패션의 역사가 흥미로운 것도 이 때문이다. 목을 감추면 손목이 강조되고, 다리를 가리면 목선이 드러나며, 몸 전체를 덮는 옷에서도 실루엣은 남는다. 가림은 욕망의 반대가 아니다. 때로 가림은 욕망의 가장 정교한 언어다. 완전히 닫힌 문보다 조금 열린 문이 더 궁금한 것처럼.
롤랑 바르트는 옷과 몸 사이의 작은 틈에서 생기는 매혹에 주목했다. 완전히 벗은 몸이 아니라 옷이 벌어진 사이로 잠깐 드러나는 피부. 바로 그 간격이 상상을 일으킨다. 에로티시즘에는 이런 틈이 필요하다. 말과 침묵 사이. 접촉과 거리 사이. 보여줌과 감춤 사이. 다가감과 물러남 사이. 우리가 누군가에게 매혹될 때도 그렇다.
자신에 대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람보다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사람이 더 오래 궁금할 때가 있다.
오늘 하나를 알았는데 내일 또 다른 얼굴이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여백이 있다. 그리고 욕망은 그 여백에서 자란다.
그래서 나는 에로티시즘을 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여백이 필요하다. 처음 만난 날 자신의 모든 상처와 연애사와 비밀을 쏟아놓는 관계에는 오히려 상상할 공간이 사라질 수 있다. 반면 천천히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사람에게는 또 어떤 모습이 있을까.” 그 궁금증이 매혹의 일부다. 사랑은 상대를 알아가는 일이지만 사랑이 깊어진다고 해서 상대를 전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래 사랑할수록 알게 된다. 나는 이 사람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은 이 지점에서 사랑에 중요한 통찰을 준다. 타인은 내가 완전히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오래 사랑해도 그 사람에게는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방이 남아 있다. 그 사람만의 기억. 혼자만의 생각. 나에게 설명하지 않는 감정. 사랑이 깊어진다고 해서 그 문을 모두 열어젖힐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닫혀 있는 문 하나를 존중하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왜 나에게 이것까지 말하지 않아?” “사랑한다면 비밀이 없어야 하지 않아?” 우리는 종종 이것을 친밀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밀함과 침범은 다르다. 진정한 친밀함은 상대에게 아무것도 숨길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을 자유까지 안전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섹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안다고 해서 그 몸이 더 이상 신비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래된 연인의 몸에도 매일 처음 보는 표정이 있다. 어떤 날의 눈빛은 다르고, 어떤 날의 피부는 예민하며,
어떤 날은 가까이 있고 싶고 어떤 날은 혼자 있고 싶다. 몸은 고정된 물건이 아니다. 살아 있다. 그러므로 몸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시 묻는 것이다. 오늘의 당신은 어떤가.
한병철은 현대 슬롯가 모든 것을 노출하고 투명하게 만들려는 경향을 비판해왔다. 보여주고, 공유하고, 공개하고, 확인한다. SNS를 열면 우리는 자신의 얼굴과 음식과 여행과 사랑까지 끊임없이 보여준다. 성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몸은 너무 많이 전시되고 욕망은 너무 빨리 이미지가 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더 많이 볼수록 더 강하게 욕망할 것 같지만, 오히려 너무 많이 보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미지는 넘치는데
상상력은 가난해진다. 모든 것이 즉시 소비 가능해지면 기다릴 이유도, 상상할 이유도 사라진다. 에로티시즘이 사라지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에는 속도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지연이 필요하다.
첫 키스를 생각해보자. 키스 자체보다 키스하기 직전의 몇 초를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다. 말이 줄어든다. 시선이 잠시 입술에 머문다.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짧은 순간.
바로 그 시간이 에로틱하다. 이미 입술이 닿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성과 현실 사이에 아주 짧은 거리가 남아 있다. 욕망은 그 거리를 견디며 커진다.
그래서 좋은 키스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다. 좋은 사랑에도 그렇다. 너무 빨리 다가가지 않는 것. 상대의 반응을 보는 것. 한 걸음 다가갔다가 상대가 그대로 있는지 살피는 것. 이 기다림은 자신 없음이 아니다. 배려다.
에로티시즘에서 느림이 중요한 이유는 상대에게 선택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섹스가 아름다워지는 순간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욕망이 빠르게 상대에게 달려가지만 사랑이 그 욕망의 어깨를 잠깐 잡는다. “조금 천천히.”
종교는 오래전부터 몸을 가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문제는 종교가 때때로 가림을 아름다움의 언어가 아니라 통제의 도구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특히 여성의 몸을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 바카라임을 여성의 옷과 몸에 돌린 역사가 있었다. 이때 가림은 더 이상 에로티시즘도 영성도 아니다. 권력이 된다. “네 몸 때문에 누군가가 죄를 짓는다.” 이 논리는 욕망의 바카라임을 욕망하는 사람에게서 욕망받는 사람에게 옮겨버린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욕망의 바카라임을 바라보는 사람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타인을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시선이 문제라면 먼저 자신의 시선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윤리다. 타인의 몸은 내 욕망을 관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인간은 처음에는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관계가 깨진 이후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의식하고 몸을 가린다. 이 이야기를 단순히 “몸은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왜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몸을 숨기고 싶어졌을까. 벌거벗음은 단순히 옷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나는 타인에게 완전히 노출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판단받을 수 있고, 거절당할 수 있고,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그래서 누군가 앞에서 몸을 벗는다는 것은 피부를 보여주는 일보다 더 큰 사건일 수 있다. 나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몸에는 시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흉터가 있다. 살이 찐 곳도 있고, 나이가 들며 달라진 곳도 있으며, 본인은 싫어하는 부분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사랑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몸을 보여주는 순간에는 말하지 않은 질문 하나가 따라다닌다. 이 모습의 나도 괜찮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완벽하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몸을 평가하지 않는 것. 비교하지 않는 것. 소비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몸 안에서 살아온 사람을 함께 보는 것.
기독교의 성육신 사상은 여기에서 다시 의미를 갖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기독교가 고백하는 신은
인간의 몸을 멀리서 바라본 신이 아니다. 먹고, 걷고, 피곤하고, 아프고, 피 흘리는 몸을 취한 신이다.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몸은 결코 저급한 것이 될 수 없다. 몸은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자리이며 사랑을 경험하는 자리이고 타인을 돌보는 자리다. 따라서 성윤리는 몸을 얼마나 많이 가렸느냐를 감시하는 데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그 몸을 얼마나 존엄하게 대했느냐를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감춤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두려움 때문에 숨기는 것이다. “내 몸은 부끄럽다.” “욕망은 더럽다.”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을 들키면 안 된다.” 이런 감춤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또 다른 감춤이 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는 것. 이것은 억압이 아니다. 경계다. 내 몸을 언제, 누구에게, 얼마나 보여줄 것인지 내가 선택한다는 뜻이다. 이 선택권이 있을 때
벗음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강요된 노출에는 에로티시즘이 없다. 강요된 가림에도 에로티시즘이 없다. 에로티시즘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움은 언제나 완벽한 노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본 미학의 ‘여백’이나 동양화의 빈 공간을 생각해보자. 그림을 가득 채우지 않는다. 산 하나를 그리고 나머지는 안개로 남겨둔다. 그 빈 곳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다. 보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다. 시도 그렇다. 모든 것을 설명해버린 문장보다 끝나고도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한 문장이 아름답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없다면 음악은 소음이 된다. 에로티시즘도 그렇다. 몸과 몸 사이에 약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 그 여백에서 기다림과 긴장과 상상이 생긴다.
그래서 가장 에로틱한 사람은 가장 많이 노출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자기 자신 안에 작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 모든 생각을 즉시 말하지 않는 사람.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줄 알고 상대에게도 그 시간을 허락하는 사람. 가까이 있지만 상대의 세계를 삼키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 사람에게는 들어가 보고 싶은 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사랑이 지루해지는 이유 중 하나도 “나는 당신을 다 안다”는 착각 때문인지 모른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무엇을 좋아할지 알고, 어떻게 반응할지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익숙한 데이터가 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20년을 함께 살아도 사람은 변한다. 어제의 그 사람과
오늘의 그 사람은 완전히 같지 않다. 사랑이 다시 살아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험한 문장을 버려야 한다.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야.” 대신 이렇게 묻는 것이다. “요즘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
그 질문 하나가 익숙한 사람에게 다시 여백을 만들어준다.
에로티시즘이란 결국 타인의 신비를 없애지 않는 사랑인지도 모른다. 당신을 알고 싶지만 당신을 해석으로 끝내지 않는 것. 당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만 당신과 나 사이의 모든 거리를 없애지 않는 것. 당신의 몸을 보고 싶지만 그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래서 성숙한 욕망은 말한다. “당신을 알고 싶다.” 그리고 성숙한 사랑은 그 뒤에 덧붙인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내가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어도 좋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면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은 투명해지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투명한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지만 그만큼 깊이도 없다. 사람에게는 불투명한 부분이 있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기억과 혼자 간직하고 싶은 생각과 자기 자신에게도 이해되지 않는 욕망이 있다. 그것까지 모두 밝은 빛 아래 끌어낼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 있을 때 더 아름답다. 별이 그렇다. 영화가 그렇다. 키스도 가끔 그렇다. 그리고 사랑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에로티시즘은 벗는 기술이 아니라 천천히 드러나는 기술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만큼,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만큼,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몸도. 마음도. 삶도.
완전히 벌거벗은 두 사람이 반드시 가장 가까운 것은 아니다. 옷을 모두 벗고도 서로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손 한번 잡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보여준 두 사람이 있다. 그래서 진짜 벗음은 옷을 벗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강한 척하지 않는 것. 괜찮지 않은 날에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 내 몸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 버림받을까 두려운 마음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떠나지 않는 경험. 어쩌면 그것이 가장 깊은 의미의 누드인지도 모른다.
에로티시즘은 드러남과 감춤 사이에서 태어난다. 가까움과 거리 사이. 말과 침묵 사이. 욕망과 절제 사이.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고 아직 열지 않은 문이 있어도 괜찮다. 좋은 사랑은 그 문을 부수지 않는다. 문 앞에서 기다릴 줄 안다. 그리고 언젠가 상대가 스스로 문을 열었을 때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나는 그것을 에로티시즘의 예의라고 부르고 싶다. 보려고 덤비지 않는 것. 알려고 캐묻지 않는 것. 갖고 싶다고 빼앗지 않는 것. 가까워지고 싶지만
상대가 스스로 가까워질 공간을 남기는 것. 결국 가장 아름다운 에로티시즘은 벗은 몸 자체가 아니라 당신 앞에서 내가 조금씩 나를 드러내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는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감추고 있던 몸보다 먼저 감추고 있던 마음이 천천히 옷을 벗는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네 번째 섹스의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