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는 사랑의 증거인가

몸을 허락했다는 것이 마음을 약속했다는 뜻일까

byNavyblue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사람을 더 가까이 느끼고 싶고, 말로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서로에게 가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섹스를 사랑의 가장 깊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니까 안고 싶다.” 그런데 이 문장을 뒤집으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안았으니까 사랑하는 것일까?” 몸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연애를 하다 보면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나를 원하지 않아?” 반대로 이런 질문도 있다. “나를 사랑한다더니 어떻게 나와 자고 아무렇지 않게 떠날 수 있어?” 두 질문은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섹스와 사랑은 같은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랑하지만 욕망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욕망하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랑과 욕망이 아름답게 겹치는 순간도 있지만 둘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순간도 있다. 아마 우리가 관계에서 가장 많이 상처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두 감정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를 단순한 성적 충동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몸에 끌리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사랑이 성숙해질수록 인간은 몸을 넘어 정신의 아름다움과 지혜, 더 넓은 아름다움 자체를 향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몸을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시작점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향기를 맡고, 목소리를 듣고, 살갗의 온기를 느끼면서 한 사람에게 끌린다. 하지만 사랑이 그 몸에서 끝나면 그 사람은 쉽게 욕망의 대상이 된다. 사랑이 몸에서 시작해 존재로 확장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몸을 원하지만, 당신의 몸만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한 문장이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는 중요한 경계인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감정이라기보다 하나의 능력으로 바라본다. 누군가에게 강렬하게 빠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이후다. 그 사람을 돌보고, 존중하고, 이해하고, 바카라임 있게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서 강렬한 섹스가 있었다고 해서 강렬한 사랑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완벽하게 하나가 된 것처럼 느끼고도 다음 날 상대에게 아주 무심할 수 있다. 몸은 가까웠지만 삶은 가까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프롬의 관점에서 사랑은 “얼마나 강하게 느끼느냐”보다 “그 사람의 존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사랑의 증거를 굳이 찾는다면 침대보다 일상에서 더 많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아플 때 곁에 있는 것.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싫다는 말을 존중하는 것. 상대가 나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날에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어쩌면 사랑은 가장 뜨거운 밤보다 아무 일도 없는 오후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image.png사랑은 하나의 능력이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을 감정의 변덕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 사랑은 선택과 바카라임의 문제이기도 했다. 감정은 올라왔다 내려간다. 욕망 역시 그렇다. 어제는 미칠 듯 그리웠던 사람이 오늘은 귀찮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오직 감정으로만 이해한다면 감정이 식는 순간 관계의 근거도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사랑에는 어느 순간부터 의지가 필요하다. “오늘도 당신을 사랑하기로 한다.” 그 말은 로맨틱하지 않아 보이지만 오래된 사랑일수록 오히려 중요해진다. 섹스는 욕망의 순간에 가능하지만, 사랑은 욕망이 없는 날에도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쪽도 보아야 한다. 사랑을 지나치게 정신적인 것으로만 만들면 몸은 다시 부끄러운 것이 된다. 기독교 역사에는 실제로 그런 시간이 있었다. 육체보다 영혼을 높이고, 성적 욕망을 경계하며, 금욕을 더 고귀한 상태로 이해하려는 흐름이 강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욕망이 의지의 통제를 벗어나는 현상을 타락한 인간 조건과 연결해 해석했다. 그 영향은 서구 기독교의 성윤리에 깊게 남았다. 그러나 성서 자체는 몸을 그렇게 단순하게 부정하지 않는다. 『아가서』를 읽어보면 놀랍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뿐 아니라

입술과 향기와 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서로를 기다리고, 찾고, 만지고 싶어 한다. 그들의 사랑은 영혼만의 사랑이 아니다. 몸을 가진 인간의 사랑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몸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관계다. 욕망이 상대를 존중하는가.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만드는가.


사도 바울의 성에 관한 글은 종종 금욕적 명령으로만 읽혀왔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7장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당시 남성 중심 슬롯에서는 드물게 부부의 성적 관계에서 서로에게 상호적인 권리를 인정하는 언어가 등장한다. 성은 한쪽이 다른 쪽에게 요구하는 권리가 아니라 서로를 고려해야 하는 관계라는 관점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면 더욱 분명해진다.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결혼했다고 해서도 마찬가지다. 연인이라고 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상대의 몸에 대한 사용권을 주는 계약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이 물어야 한다. “당신은 원하는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녀 관계에서 한 사람이 주체가 되고 다른 사람이 대상이 되는 구조를 집요하게 비판했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나의 만족을 위한 대상으로 만든다면 그 관계에는 이미 불균형이 생긴다. 특히 성적 관계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선명해진다. “나는 너를 원해.” 이 문장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원한다는 말속에는 자칫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숨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숙한 사랑은 한 문장을 더 필요로 한다. “나는 너를 원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을 자유도 존중한다.” 이 순간 욕망은 소유에서 관계로 바뀐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을 내가 완전히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본다. 타인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모두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몸을 나누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관점은 섹스에 아주 중요한 윤리를 준다. 가장 가까워진 순간에도 상대는 여전히 타인이라는 사실. 한 몸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두 사람이라는 사실. 어쩌면 사랑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하나가 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가는 것. 그 거리를 없애려 하지 않고 그 거리까지 사랑하는 것.

image.png타인은 내가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랑 없는 섹스는 가능한가. 가능하다. 적어도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섹스 없는 사랑도 가능하다. 질병 때문에, 나이 때문에, 선택 때문에, 서로의 욕망이 달라서 성관계를 하지 않더라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섹스가 사랑의 필수적인 증거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섹스가 사랑의 아름다운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섹스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이다. 욕망만 담길 수도 있고, 외로움이 담길 수도 있고, 권력이 담길 수도 있고, 불안이 담길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신뢰와 배려와 기쁨과 깊은 사랑이 담길 수도 있다. 같은 행위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절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끝난 뒤일 때가 많다.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누워 있는 시간. 서둘러 옷을 입지 않아도 되는 시간. 상대가 아직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 그 순간에는 욕망이 잠잠해진다. 그리고 욕망이 잠잠해진 자리에서 비로소 관계가 보인다. 이 사람은 나를 원했는가. 아니면 나와 함께 있고 싶은가.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다른 질문이다.


섹스는 사랑의 증거인가. 아니다. 적어도 섹스만으로는 사랑을 증명할 수 없다. 키스했다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한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고 서로의 삶을 바카라임지겠다는 뜻도 아니다. 그렇다고 섹스를 사랑과 무관한 것으로 밀어낼 필요도 없다. 몸은 인간이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오래되고 정직한 언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싶고,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더 깊이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그것 역시 사랑의 한 얼굴이다. 다만 사랑은 언제나 섹스보다 조금 더 크다. 섹스가 끝난 뒤에도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존중. 배려. 바카라임. 기억. 그리고 다시 아침이 왔을 때도 그 사람을 한 사람의 소중한 존재로 대하려는 마음. 그러므로 사랑의 증거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의 증거는 당신과 얼마나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는가가 아니라, 그 뜨거움이 사라진 뒤에도 당신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다. 몸을 허락했다는 것이

마음을 약속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약속한 사람이라면 그 몸을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두 번째 섹스의 미학이다.

image.png섹스는 사랑의 증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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