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시 쓰기를 어렵게 생각한다. 시는 특별한 재능이나 감수성을 지닌 사람만 쓸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시의 재료는 멀리 있지 않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물, 장소와 기억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상의 특별함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표현하는 방식이다.
문학치료에서 시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시는 감정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이미지로 보여준다. 때로는 "나는 슬프다"라는 말보다 읽지 않은 채 남겨진 마지막 메시지나 식어 버린 커피잔이 더 깊은 슬픔을 전하기도 한다. 또한 시는 감정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상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해 준다.
치유의 시 쓰기는 문학적 기교를 배우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조금 더 섬세하게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감정과 기억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다. 이 장에서는 시를 읽고 쓰는 데 필요한 몇 가지 기초 원리를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좋은 시를 읽으며 시의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지 살펴보고, 이어 관찰과 상상이 우리의 경험을 어떻게 시적 이미지로 변화시키는지 알아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자와 청자의 개념을 이해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의 형식 안에 담아내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또한 영화 속에서 시를 쓰는 아마추어 시인들의 모습을 따라가며, 평범한 일상이 한 편의 시가 되는 과정도 함께 살펴보겠다.
시를 쓰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좋은 시를 읽는 일이다. 우리는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시어가 어떤 언어인지, 또 어떻게 마음을 표현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여기서는 아치볼드 매클리시, 한용운, 그리고 오탁번의 시를 통해 시 쓰기의 기본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시작법」은 시란 무엇인가를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시에서 매클리시는 시를 둥근 과일, 오래된 메달, 이끼 낀 창턱의 돌, 그리고 날고 있는 새에 비유한다.
시는 감촉이 있고 묵묵(默默) 해야 한다
둥근 과일처럼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래된 메달처럼
말 없고
이끼 낀 창(窓) 턱의 소맷자락에 닳은
돌처럼 고요하고
새가 날듯이 시는 무언(無言) 해야 한다
시는 달이 떠오르듯 시시각각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어둠에 얽힌 나무를 한 가지 한 가지씩
달이 놓아주듯
겨울철 나뭇잎에 가리운 달처럼
하나씩 추억을 간직하면서 마음에서
떠나가야 한다
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사실이 아니라
슬픔의 긴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를
사랑을 위해서는
비스듬히 기댄 풀잎들과 바다 위
두 개의 별빛을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시, 「시작법」 전문
시에 비유된 과일과 메달, 돌은 모두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각자의 존재만으로 감촉과 무게, 시간의 흔적을 전달한다. 매클리시는 시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는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시인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독자가 스스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 둔다. 특히 이 시에서 중요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
이 말은 시가 의미를 설명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언어 그 자체로 존재하여야 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긴 역사를 설명하는 대신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를 보여 준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는 "비스듬히 기댄 풀잎들과 바다 위 두 개의 별빛"을 제시한다. 독자는 그 장면을 보며 슬픔과 사랑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의 힘이다. 시는 감정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이미지로서 그것이 머물렀던 풍경을 보여 주면서 독자가 상상하게 한다.
문학치료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중요하다. 자신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설명하는 일은 때때로 부담스럽다. 그러나 비어 있는 식탁, 먼지가 쌓인 방, 오래된 사진 한 장은 설명보다 더 깊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치유의 시 쓰기는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살아 있었던 장면을 보여 주는 일에서 시작된다.
한용운의 시 「예술가」는 사랑에 빠진 자신을 화가와 성악가와 서정시인에 차례로 비유한다. 당신을 얼굴을 그리고, 당신이 가르쳐준 노래를 부르는 화자는 서정 시인에 이르러 사랑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나는 서투른 화가(畵家)여요.
잠 아니 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샘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나는 파겁 못한 성악가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이 가르쳐 주시던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敍情詩人)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
-한용운, 「예술가」 전문
시 속 화자는 자신을 서투른 화가이자, 겁 많은 성악가이며, 재능 없는 서정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눈자위는 끝내 그려 내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부끄러워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즐거움, 슬픔, 사랑은 모두 추상적인 관념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단어로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려 한다. 화자가 생각하는 ‘서정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관념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 걸음걸이를 쓰고 싶어 한다. 관념이 아닌 이미지로 사랑을 표현하겠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집과 침대, 꽃밭의 작은 돌까지 시 속에 담고자 한다. 그와의 관계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함께 머문 장소와 풍경, 그리고 소소한 사물들을 제시함으로써 사랑의 감정을 보여준다.
이 대목은 시 쓰기의 중요한 비밀을 보여 준다. 화자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독자는 그 누구보다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화자는 사랑을 설명하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과 함께했던 특별한 순간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치유의 시 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외롭다"라고 반복하기보다 혼자 먹고 남은 식탁이나 늦은 밤 불 꺼진 거실을 떠올려 보자. "나는 그립다"라고 말하기보다 우연히 다시 듣게 된 노래나 자주 가던 가게 앞을 지나치던 순간을 적어 보자. 감정은 추상적인 관념어 속에 있을 때보다 구체적인 이미지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오탁번의 「시인과 소설가」는 시와 소설의 차이를 유쾌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서정주와 김동리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먼저 시를 읽어보자.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 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읽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 기가 막히다! 절창이네 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 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 사람! 소설이나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 와? 시가 안 됐노?
그 순간
시간이 딱 멈췄다
1930년대 현대문학사 한쪽이
막 형성되는 순간인 줄은 땅뜀도 못하고
시인과 소설가는
밤샘을 하며 코가 비뚤어졌다
찰람찰람 술잔이 넘쳤다
-오탁번, 「시인과 소설가」 전문
어느 날 김동리가 시를 한 편 썼다며 서정주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읊는다.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서정주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감탄한다. 꽃이 피는 것과 우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장을 듣는 순간 공감한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조차 울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동리는 곧 자신이 잘못 말했다고 정정한다.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었다는 것이다. 꼬집히면 아프고, 아프면 운다. 말 못 하는 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논리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서정주는 실망하며 "소설이나 쓰라"라고 말한다. 시에서와 같이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을 수도 있다.
이 일화는 시와 소설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소설이 사건과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라간다면, 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과 감정을 연결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인과관계가 없고 논리적으로도 모순된 시의 언어는, 그러나 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세상은 생각만큼 논리적이지 않고 인과관계만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시의 언어가 세상의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이유이다.
치유의 시 쓰기 역시 이러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상처를 단순히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상처가 남긴 내면의 풍경과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외로움은 늦은 밤 마지막 지하철역으로, 후회는 끝내 보내지 못한 메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움은 계절마다 찾아오는 익숙한 향기 속에서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렇게 시인은 감정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머물렀던 사물과 풍경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매클리시와 한용운, 그리고 오탁번의 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실을 말한다. 좋은 시는 추상적인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품고 있는 사물과 장면, 몸짓과 기억을 보여 준다. 시는 의미를 해설하는 언어가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이다.
치유의 시 쓰기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슬픔을 설명하기보다 슬픔이 머물렀던 풍경을 떠올려 보자. 사랑을 정의하기보다 사랑했던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를 기억해 보자. 시는 감정을 해설하는 글이 아니라 감정이 살아 있었던 순간을 다시 존재하게 만드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