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와 들려주기

김은자, 서정주, 문정희의 시

by박민영

시를 읽을 때 가장 흔히 하는 오해 가운데 하나는 작품 속의 '나'를 실제 시인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에 등장하는 '나'는 반드시 시인 자신일 필요가 없다. 시 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작품 속의 화자이며, 실제 시인과는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시인과 화자가 거의 일치하는 작품도 있다. 윤동주의 많은 시는 자신의 삶과 내면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성격이 강하며, 일기처럼 창작 날짜를 남긴 작품도 적지 않다. 그래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나'는 실제 윤동주와 매우 가까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윤동주 역시 동시에서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화자로 내세운다. 다시 말해 한 시인의 작품 안에서도 실제 시인과 화자가 일치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작품도 존재한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에는 실제 시인과 작품 속 화자를 구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시에는 말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있다. 시에서는 말을 하는 사람을 화자, 말을 듣는 사람을 청자라고 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화자가 청자에게 건네는 말을 독자가 함께 듣는 일이며,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이 누구의 목소리로 누구에게 말을 건넬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화자와 청자의 개념을 살펴보고, 작품 속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어떻게 시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어서 시인이 다양한 화자를 창조하는 방법인 페르소나의 활용을 통해 시 읽기와 시 쓰기의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겠다.


화자와 청자


화자는 작품에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현상적 화자와 함축적 화자로 나눌 수 있다. 현상적 화자는 작품 속에 직접 드러나는 화자이다. '나', '우리'처럼 말하는 주체가 텍스트에 나타나거나 특정 인물이 직접 말을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반면 함축적 화자는 작품 속에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작품 전체를 통해 독자가 추론하게 되는 화자이다. '나'와 같은 말하는 주체는 나타나지 않지만, 풍경을 바라보고 사물을 인식하며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의식이 작품 전체를 이끌고 있다. 김소월의 「산유화」나 신경림의 「파장」과 같은 작품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청자 역시 작품에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현상적 청자와 함축적 청자로 나눌 수 있다. 현상적 청자는 작품 속에 직접 나타나는 듣는 사람이다. 화자가 이름을 부르거나 '너', '그대'처럼 특정한 대상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경우, 그 대상이 바로 현상적 청자이다. 반면 함축적 청자는 작품 속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청자이다. 화자가 특정한 상대를 지목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독백하거나 풍경을 노래하는 시에서는 현상적 청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 결국 누군가에게 읽히고 이해되기를 전제로 하는 언어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는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그 말을 듣고 이해할 대상이 전제되어 있으며, 이를 함축적 청자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독자는 이러한 함축적 청자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작품을 읽게 된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이해하면 시 읽기는 한층 풍부해진다. 특히 현상적 화자와 현상적 청자가 모두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에서는 화자가 누구에게 어떤 마음을 전하고 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반대로 함축적 화자와 함축적 청자가 중심이 되는 작품에서는 작품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정서와 시선을 읽어 내는 일이 중요하다.


김은자의 「아, 평화롭게」는 현상적 화자와 현상적 청자가 모두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 속 화자는 '나'이고 청자는 '너'이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너'에게 꽃과 꿈, 그리고 삶의 기억을 건네고자 한다. 독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곁에서 조용히 엿듣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시의 의미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살펴보자.


너에게 꽃을 주리
내게 아직 그런 향기로운 것이 남았다면
아침마다 새로 빛나는 네 머리칼에,
그리고 또 네게 꿈을 주리
서른 살 마흔 살에도 이루지 못하고
곤쟁이젓처럼 푹 삭아서
이제 네 가슴에서
봄 언덕의 풀꽃더미처럼 확 피어날,
그리고 내게 남은 최후의 것,
마지막 눈물의 방울을
네 고운 목에 걸어주리,
지워지지 않는 추억과
길 위에서의 긴 기다림
기다리는 자의 쓰린 목마름을


모두 네게 맡기면
비워진 내 뼈와 살의 생애가
족쇄에 채웠던 눈물의 덩이를 끊고
무중력으로 붕 떠올라
병원과 백화점과 터널로 가는 차와 사람들이
시장과 아수라장과 막장을 향해
붕붕거리고 와글대는 매봉터널 앞길에서
붕어빵 가게 하늘 위로 첫나들이 나온
배추흰나비를 따라 가벼이
가벼이 날아가리
평화롭게
비로소 평화롭게,
나른한 봄날 오후 들길을 따라
― 김은자, 「아, 평화롭게」


김은자(1948-)의 시 「아, 평화롭게」는 현상적 화자와 현상적 청자가 모두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 속 화자는 '나'이고, 청자는 '너'이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너'에게 말을 건넨다. 독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곁에서 조용히 엿듣는 위치에 서게 된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만큼, 이 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을 이해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너'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아침마다 새로 빛나는 네 머리칼"을 이야기하고, 이루지 못한 꿈과 마지막 눈물까지도 모두 건네주겠다고 말한다. 마치 중년을 넘어선 어머니가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화자는 꽃과 꿈을 주겠다고 말하지만, 곧 "내게 아직 그런 향기로운 것이 남았다면"이라고 덧붙인다. 한때는 향기로웠던 자신의 젊음이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음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반면 청자인 '너'의 머리칼은 "아침마다 새로 빛난다." 삶의 무게를 견뎌 온 어머니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딸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대비된다.

화자는 이루지 못한 꿈도, 긴 기다림도, 마지막 눈물까지도 모두 딸에게 건네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한 유산의 전달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얻은 삶의 경험과 기억, 기다림과 목마름까지 다음 세대에게 이어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을 모두 맡기고 나면 "비워진 내 뼈와 살의 생애"는 마침내 무중력으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공간의 대비가 더욱 선명해진다. 병원과 백화점, 터널과 시장으로 이어지는 매봉터널 앞길은 현대 도시의 분주한 일상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과 생계의 무게를 짊어진 채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나 그 복잡한 공간 위로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화자는 그 나비를 따라 "가벼이 / 가벼이 날아가리 / 평화롭게 / 비로소 평화롭게"라고 노래한다. 도시의 소음과 나비의 가벼운 비상은 현실과 이상, 욕망과 평화의 대비를 이루며 시의 정서를 한층 깊게 만든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는 작품만은 아니다. 작품의 술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남았다면", "주리", "맡기면", "날아가리"와 같이 가정과 미래의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자가 꿈꾸는 평화는 이미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다. 특히 '맡기다'라는 표현은 '완전히 버리다'와는 다르다. 맡긴다는 것은 언젠가 다시 되찾아올 가능성을 전제하는 말이다. 결국 추억과 기다림과 목마름은 화자를 괴롭혀 온 삶의 무게이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 온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아, 평화롭게」는 단순히 평화를 노래하는 시가 아니라, 평화를 간절히 꿈꾸면서도 끝내 삶의 무게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설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가 청자에게 건네는 이 조용한 독백은 한 어머니의 마음을 넘어,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전하고 싶은 모든 이들의 보편적인 목소리로 확장된다.


페르소나의 활용


시인은 작품 속에 또 다른 화자를 내세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이 자신의 실제 모습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존재의 목소리로 말하는 방식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페르소나는 원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을 뜻하는 말이다. 배우가 가면을 바꾸어 쓰며 서로 다른 인물을 연기하듯, 시인도 작품 속에서 다양한 화자를 창조한다. 따라서 작품 속 화자는 실제 시인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페르소나를 통해 보다 자유롭고 입체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본다.


이러한 페르소나의 활용은 앞에서 살펴본 추체험과도 깊이 연결된다. 추체험은 다른 사람의 삶과 감정을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시인은 타인의 처지와 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상상함으로써 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추체험이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면, 페르소나는 그 이해를 작품 속 화자로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는 시 읽기와 시 쓰기 모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를 읽을 때에는 작품 속 화자의 말과 행동을 실제 시인의 삶과 곧바로 연결하지 않게 해 주며, 시를 쓸 때에는 자신의 경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삶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이제 페르소나를 활용한 작품을 통해 시인이 어떻게 새로운 화자를 창조하고, 그 화자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베갯모에 뇌이 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서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서정주, 「추천사-춘향의 말 1」 전문


서정주의 「추천사―춘향의 말 1」은 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고 전혀 다른 인물의 삶 속으로 들어간 작품이다. 부제인 '춘향의 말'이 암시하듯,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시인 서정주가 아니라 춘향이다. 춘향은 겉으로 드러난 화자, 즉 ‘현상적 화자’이다. 시인은 자신의 이름과 삶을 잠시 내려놓고 열여섯 살 춘향의 가면을 쓴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시를 읽으면서 작품 속의 '나'를 실제 시인과 동일시한다. 이 작품은 그러한 오해를 단번에 깨뜨린다. 중년의 남성 시인이 조선 시대의 어린 여성이 되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며, 살아가는 시대와 신분도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독자는 시를 읽는 동안 어느새 서정주를 잊고 춘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페르소나가 지닌 힘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춘향이 독자에게 직접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종이자 가장 가까운 벗인 향단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시 속에서 현상적 청자는 향단이다. 그러나 실제 작품을 읽는 우리는 향단이 아니다. 우리는 춘향과 향단의 대화를 옆에서 조용히 엿듣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춘향이 향단에게 들려주는 말이면서 동시에 독자가 엿듣도록 허락된 이야기이다. 이러한 구조는 시 읽기에 특별한 친밀감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장 솔직한 마음을 우연히 듣게 된 사람처럼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문학 작품에서 이러한 '엿듣기'의 구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인은 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독자를 향해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특정한 청자를 설정하고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독자는 그 대화를 따라가며 말하는 사람의 감정과 사연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그네의 상징성에 대해 알아보자. 춘향이 향단에게 그네를 밀어 달라고 말하는 장면에는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로부터 단오에 그네를 뛰는 풍습은 여성들에게 잠시나마 일상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당시 규방의 여성들은 대부분 집안에서 생활하며 바깥세상을 자유롭게 경험하기 어려웠다. 높은 담장 안이 그들의 생활공간이었고, 담장 밖의 세상은 구경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 삶에서 그네는 잠시나마 하늘을 향해 몸을 날릴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위로 치솟는 순간 여성들은 담장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다시 현실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춘향은 양반가의 여식은 아니었기에 광한루라는 열린 공간에서 그네를 뛸 수 있었지만, 그가 경험하고 상상하는 세계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 속에서 춘향이 바라보는 세계는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베갯모에 뇌이 듯한’ 풀더미와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동시에 춘향을 둘러싼 작은 세계이기도 하다. 모처럼 나들이한 광한루의 풍경은 그가 규방 안에서 바라보던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고, 그 자연을 수틀 안에 가두던 일상을 연상하게 한다. 춘향은 그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향단에게 부탁한다.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달라고. 이때 하늘은 자유의 세계를 상징한다. 춘향은 “다소곳이”, 그리고 “서으로 가는 달같이” 소리 없이 조금씩 움직이는 정적인 삶이 아니라 한순간이라도 높이 날아오르는 역동적인 삶을 꿈꾼다. 현실에 순응하며 조용히 살아가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처럼 「추천사」는 춘향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한 여성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서정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춘향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고, 우리는 그 고백을 엿들었다. 페르소나와 청자의 설정이 만들어 내는 이러한 구조 덕분에 독자는 춘향의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이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자신의 경험만으로 시를 쓰려하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페르소나를 활용하면 삶의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공감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일이다.


문학치료에서도 이러한 페르소나의 활용은 중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 혹은 상징적인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실제의 나와 시 속의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순간, 오히려 더 깊은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페르소나는 자신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안전하게 드러내기 위한 또 하나의 얼굴인 셈이다.


아이러니의 목소리

페르소나는 자신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인물이 되어 슬롯를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데에도 활용된다. 다음 작품을 먼저 읽어보자. 작품을 읽으면서 시적 화자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 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 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 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 ), 「나의 아내」


이 작품을 읽어 내려가면 화자는 비교적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난다.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성으로 보인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하나씩 늘어놓으며 결혼 생활을 상상한다. 그가 원하는 아내는 자녀를 낳아 가문을 이어주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남편을 정성껏 뒷바라지하는 사람이다. 남편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삶보다 남편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여성을 이상적인 배우자로 여긴다.


읽다 보면 점차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 화자는 아내를 '내 소유의 식민지'라고 부르고, 자신의 성씨와 족보를 이어 줄 존재로만 바라본다. 심지어 '19세기의 발명품'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진술은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지나치게 가부장적이며 시대착오적이다. 그런 낡은 가치관을 가진 이 시의 화자는, 그래서 번번이 여성에게 거절당한 딱한 남성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흥미로운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시를 쓴 사람은 그런 남성이 아니다. 대표적인 여성주의 시인인 문정희이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작품을 읽으면 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한 남성의 간절한 독백으로 보였던 내용이 사실은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풍자하기 위한 장치였음을 깨닫게 된다.


문정희.jpg문정희(1947-)


이처럼 작품의 표면에 드러난 말과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서로 어긋나는 표현을 아이러니(irony)라고 한다. 아이러니는 하나의 작품 안에서 표면 진술과 이면 진술이라는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표현 방식이다. 표면 진술은 '이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한 남성의 욕망이다. 그러나 이면 진술은 여성을 역할과 기능으로만 바라보는 낡은 가부장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독자는 처음에는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가지만, 시인의 정체를 알고 나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또 하나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겉으로는 가부장적 남성의 독백이 들리지만, 그 이면에서는 그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리고 있는 것이다.


문정희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가부장적인 남성의 목소리를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그 사고방식이 지닌 모순을 독자 스스로 발견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간접적인 표현은 시인이 자신의 주장을 직접 드러낼 때보다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페르소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는 효과적인 장치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자신과 정반대의 인물이 되어 그 인물의 언어를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그 속에 숨어 있는 욕망과 모순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독자는 화자의 말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그 말을 다시 읽게 된다. 표면 진술과 이면 진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품은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드러낸다.


문정희의 「나의 아내」는 시를 읽을 때 시인과 시적 화자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작품 속 화자의 목소리를 곧바로 시인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시인은 자신과 가장 닮은 화자를 선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과 가장 먼 화자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는 '시인이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인가?'를 묻기보다 '시인은 왜 이러한 화자를 선택했을까?'를 먼저 질문하는 편이 작품의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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