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하기와 상상하기

이영춘과 이승하의 시

by박민영

시 쓰기의 출발점은 관찰이다. 관찰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자세히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시인은 사물의 겉모습을 넘어 그 안에 감추어진 삶과 감정을 읽어 낸다. 다시 말해 관찰은 눈으로 보는 행위인 동시에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찰은 상상과 공감을 거치면서 비로소 한 편의 시가 된다.


문학 치료의 시 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감정을 곧바로 표현하기보다 먼저 사람과 사물, 일상의 풍경을 찬찬히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평범해 보이는 장면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 안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시인은 바로 그 이야기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이영춘의 시 「슬픈 도시락」은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영춘(1941~) 시인은 오랫동안 중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났다. 그의 시에는 교실과 운동장, 학교와 동네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화려하거나 특별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웃들이다. 시인은 그들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이 품고 있는 슬픔과 희망을 따뜻한 언어로 그려낸다. 「슬픈 도시락」 역시 교실에서 시작된다.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 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서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그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헤어지고 싸우고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 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빠꼼이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이영춘, 「슬픈 도시락· 1」 전문


이 시는 담임교사가 한 학생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교사는 학생의 이름을 또렷하게 불러 준다.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이어서 아이의 외모를 차례로 묘사한다. 하늘로 치솟은 머리카락, 뻐드렁니, 천진한 표정. 모두 담임교사만이 오래 지켜본 끝에 포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모습들이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시가 관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외모만이 아니다. 점심시간이면 늘 혼자 도시락을 먹는 아이의 모습도 눈여겨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다음 구절이다.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시인은 자신의 행동을 '도둑질'에 비유한다.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담임교사는 아이의 형편을 알고 싶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는 순간 아이가 느낄 부끄러움도 함께 헤아린다. 그래서 시인은 “도둑질하듯”, “훔쳐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한마디에는 학생을 향한 배려와 교육자로서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아이는 선생님의 시선을 알아챈다. 그리고 멋쩍게 “씩 웃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웃음을 보고 아무 일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그 웃음 속에 감추어진 쓸쓸함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이 순간 관찰은 상상으로 이어진다.


시적 화자는 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어머니가 없는 아이는 자신이 직접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더 나아가 "어른들은 왜 헤어지고 만나는 것인지?"라는 아이의 내면의 목소리까지 들려준다. 이 질문은 실제로 아이가 했던 말이 아니다. 화자가 공감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시의 화자가 아이를 대신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담임교사의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화자는 어느 순간 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관찰은 상상으로, 상상은 공감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화자는 아이와 하나가 된다. 이러한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독자는 시인의 상상을 억지스럽게 느끼지 않는다.


이 시의 제목이 「슬픈 도시락」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시락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도시락은 한 아이의 삶을 담고 있는 이미지이다. 도시락 속 반찬은 아이의 생활 형편을 보여 주고, 혼자 먹는 도시락은 아이의 외로움을 드러낸다. 결국 '슬픈 도시락'은 도시락에 담긴 아이의 삶과 상처를 상징하는 표현인 셈이다.


이영춘 시인의 작품에는 이처럼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 실직한 후배 작가, 세상을 등진 고향 친구 같이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의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산문 「나의 이웃, 나의 슬픔에게」(심상, 1997.2)에서 "나는 아픔을 지닌 사람들을 좋아한다. 무엇인가 내가 교감할 수 있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타인의 아픔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시를 써 왔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문학치료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삶에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처음부터 특별한 시를 쓰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주변 사람들의 작은 표정과 몸짓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평범한 사물 하나,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도 오래 바라보면 새로운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의미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순간, 시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상상의 체험


시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해 반드시 모든 일을 직접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시를 쓰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시를 만날 수 있다. 문학이 우리의 삶을 넓혀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체험은 크게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으로 나눌 수 있다. 직접체험은 자신이 실제로 겪은 경험이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처럼 자신의 삶에서 얻은 경험은 시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반면 간접체험은 바카라과 영화, 음악, 기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얻는 경험이다.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작품을 읽고 보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문학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체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상상의 체험, 즉 추체험(追體驗)이다. 간접체험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추체험은 공감을 통해 그 삶을 자신의 경험처럼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내가 저 사람이었다면", "내가 저 일을 겪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하여 타인의 삶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 보는 것이다.


문학치료에서 추체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만으로 세상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새롭게 발견하고, 삶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게 된다. 추체험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 다가가려는 공감의 실천이다.

이러한 추체험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 이승하의 「나무 앞에서의 기도」이다.


단 한 마디 아내가 남긴 말
화장해 나무 밑에다 묻어주세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세상의 거름 될 생각을 했다
나무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나무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나무를 베어 별장을 지었지 그대와 나
나무를 베어내 바카라을 쓰고, 이사할 때 바카라부터 버렸지
나무가 사라지니 둥지도 사라지고
뼛가루 땅에다 묻고
두 아이 손을 잡고 나무 앞에 둘러서서
고개 숙이고 기도했다
내 아내 잘 부탁한다
더 푸른 녹음과 더 아름다운 단풍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길

아내처럼 키만 큰 나무
세 사람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털어낸다
이 겨울, 바람의 길을 안다는 듯
모든 생명의 길을 안다는 듯


-이승하, 「나무 앞에서의 기도」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남편이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 뜻에 따라 수목장을 치른 뒤 두 아이와 함께 나무 앞에 서서 기도를 드린다.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 죽음이 다시 생명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제된 언어 속에 담겨 있다.


이승하(1960-)




흥미로운 점은 이 시가 시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승하 시인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 남편의 슬픔을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여 시를 썼다. 실제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독자는 조금도 꾸며 낸 이야기처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의 슬픔은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는 듯한 진정성을 지닌다.


그 이유는 시인이 추체험을 통해 화자의 삶을 자신의 삶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목장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거나, 그러한 이야기를 접했을 것이다. 시인은 그 장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머물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남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의 슬픔과 기도를 자신의 마음으로 느껴 보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시의 언어로 옮겼다. 이것이 바로 추체험이다.


앞에서 살펴본 이영춘의 「슬픈 도시락」에서도 시인은 한 학생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였다. 그러나 「나무 앞에서의 기도」에서는 공감이 한 단계 더 깊어진다. 시인은 타인의 슬픔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슬픔을 살아가는 화자가 된다. 이처럼 공감이 충분히 깊어질 때 비로소 추체험이 이루어진다.


치유의 시 쓰기에서도 추체험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이야기만 반복하다 보면 표현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 이럴 때에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조용히 바라보고 그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 병원 대기실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모를 보며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추체험은 문학적 상상력의 출발점이면서 문학치료의 핵심이기도 하다. 타인의 삶을 공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자신의 상처 또한 새로운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시가 치유의 힘을 지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직접체험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게 하고, 간접체험은 삶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 준다. 그리고 추체험은 공감을 통해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경험처럼 내면화하게 한다. 시인은 이 세 가지 체험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그것을 시라는 언어로 형상화한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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