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펼친 초록 거울

상추

by서람


“이것저것 안 되면 다 때려치우고 시골 가서 농사나 짓지. 뭐!”


20세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성행하던 이야기다. 사업이 잘 안 풀리거나 온라인 게임 생활이 고단할 때 푸념처럼 하던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말을 무심코 했다가는 곧바로 비난의 화살을 맞을 수 있다. 농촌의 풍속도 많이 달라졌고 과학 영농으로 아무나 농사짓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텃밭 농사를 시작하려는 사람이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농사는 잘 몰라. 그냥 상추나 심지 뭐”


이쯤 되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농사가 어려운 건 맞지만 상추는 재배하기 쉽다는 뜻이다. 작물 중에서 상추는 비교적 잘 자란다.


초보 농부에게조차 상추는 이처럼 너그러움으로 다가온다. 식탁 위에서는 상큼한 맛이라는 본연의 임무도 늘 변함없다. 여기에 상추가 지닌 진면목은 따로 있다. 입맛을 돋우는 조연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 몸을 귀하게 대접하며 식탐 앞에서 조용히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역할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건네는 첫 선물이다. 이 사실을 전하고 싶어 숲과 건강 관련 강의를 하다가 수강생들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지곤 한다.


"고기 먹을 때 상추에 싸 먹는 이유는 뭘까요?“


대부분은 맛의 조화나 식감을 이야기한다. 그냥 ‘맛있으니까요’라고 순진하게 답하기도 한다. 이때 나의 대답이 바로 절제의 미학이다. 상추는 풍부한 식이섬유를 가지고 있어 장운동을 촉진한다. 이 활동은 장을 통과하는 단백질이 몸 안으로 흡수되는 속도를 늦춘다. 그렇게 과한 것은 서둘러 몸 밖으로 내보내 균형을 맞춘다.


두 번째 선물은 '평온한 꿈'이다. 상추의 잎자루를 꺾으면 나오는 우윳빛 즙, 일명 ‘상추 아편’이라 불리는 ‘락투카리움’이다. 우리를 잠의 세계로 인도하는 성분이다. 이를 두고 식곤증의 원인이라 투덜대기도 하지만, 지친 인간에게 자연이 베푸는 다정한 배려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쉬어가라는 고요한 초대장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억지로라도 휴식 시간을 선물하며, 쉬어야 다시 활동할 수 있다는 순리를, 상추를 통해서 몸소 체험하게 한다.

세 번째는 나눔의 생명력이다. 상추는 수확할 때 포기째 뽑지 않고 잎을 하나씩 따내는데, 며칠 뒤면 그 빈자리에서 거짓말처럼 새잎이 다시 돋아난다. 제 살을 아낌없이 내어주면서도 중심 줄기만큼은 꼿꼿이 세우며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이 내어주면서도 자기중심을 잃지 않는 그 단단한 나눔의 이치가, 우리에게 뭉클한 위로를 건넨다. 이 위로는 타인을 향한 넉넉한 품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선물인 포용의 기술이다.

한국인에게 상추 쌈 문화는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무엇이든 감싸안는 보자기와 같다. 고기는 물론 그 안에 들어오는 재료들의 개성을 죽이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커다란 맛의 공동체로 묶어내 '쌈'이라는 조화를 이룬다.


상추 한 잎에 절제와 배려, 나눔과 포용 등 삶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과한 것을 덜어내고, 마음의 휴식을 권하며, 상실 속에서도 나눔을 실천하는 태도. 그리고 그 모든 다름을 감싸안는 넉넉함까지.

오늘 저녁, 손바닥 위에 펼쳐진 상추 한 장이 유난히 깊고 푸르게 보인다. 이 작고 연약한 잎사귀가 이토록 단단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니. 오늘만큼은 그 넉넉한 품에 고기 한 점과 함께 나의 고단한 하루도 얹어 크게 한 쌈 싸 본다. 입안 가득 퍼지는 싱그러운 평화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그래, 상추가 가르쳐준 대로 비울 건 비우고 채울 건 채우면 된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꼿꼿하게 자라나면 그만인 것을.


상추는 국화과(科)의 한해살이다. 원래 이름은 '생채(生菜)' 즉, 날것으로 먹는 나물이다. 재배품종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주로 잎상추(재래종)를 먹는다. 잎이 겹겹이 겹쳐 공 모양처럼 둥글게 뭉쳐진 형태를 결구상추라 부르는데 이는 양상추를 말한다.

최적 생육 온도는 15~20°C로 시원한 온도에서 잘 자란다. 기온이 오르면 특유의 쓴맛이 나타나 벌레가 갉아 먹지 못하게 한다. 고랭지에서는 주로 결구상추, 평지의 봄·가을 재배에서는 잎상추가 재배된다. 기상이변으로 공급이 감소하면 고기보다 더 비싸지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가끔 발생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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