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산에서 나는 쇠고기는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은 성분과 식감이라는 강점을 모두 만족하는 '고사리'다.
"밭에서 나는 쇠고기는?"
이 말은 1970~80년대 TV 속 두유 광고에 단골로 등장한 문구였으며 '콩'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질문 모두 어쩌면 육식(肉食) 즉, 단백질이 결핍된 시대가 만든 간절한 비유적 표현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간단한 질문은 우리를 사유(思惟)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한국인의 식탁에서 '콩'만큼 그 정체가 묘한 존재도 드물다. 식품으로는 엄연히 두류(豆類)에 속하지만, 조리의 현장으로 넘어오는 순간 제2, 제3의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밥솥 안에서 쌀과 함께 익어갈 때는 '곡물'로서 존재한다. 짭조름한 간장을 만나 졸여지면 콩자반이 된다. 채소 같은 '반찬'으로 그 성격이 변한 것이다.
곡물에서 채소로 나아가는 경계에 선 콩의 반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이중성은 부드러운 콩나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절정을 맞이한다. 콩이 수분을 머금고 싹을 틔우는 찰나, 단단했던 껍질은 갈라지고 그 속에서 연한 흰 줄기가 밀고 나온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화학적 변화를 겪는다. 본래 없던 비타민 C가 급증하며, 영양적으로나 미각적으로 완전한 새싹 채소의 본색을 드러낸다. 콩은 그렇게 곡물과 채소의 경계를 조용히 넘나든다.
이 딱딱한 알갱이가 부드러운 줄기로 변하는 과정은 단순한 성장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지탱하던 '곡물'의 이미지를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콩나물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탈바꿈 덕분에 우리는 시원한 콩나물국이나 아삭한 무침의 미학을 만나게 되었다.
‘콩은 하나의 모습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점은 콩나물이 자라나는 방식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 건넛방에는 흰 천으로 뒤덮인 콩나물시루가 있었다. 콩나물이 자라며 은은한 풋내가 방 안 가득했지만, 그게 일상이었다. 콩나물은 그렇게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라면서 흙의 양분을 탐하지 않는다. 오직 물만 머금은 채 자신의 단단함을 조금씩 누그러트린다. 스스로 비워내며 전혀 다른 식감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콩의 변신에는 유연함이 깃들어 있다. 콩자반의 고집스러운 식감을 유지하는가 하면, 두부가 되어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부드러운 모습으로 우리의 식탁에 나타난다. 상황과 쓰임에 따라 자신을 가다듬는 이 유연함이 콩이 가진 진정한 힘이다. 만약 콩이 사람이었다면, 누군가는 그를 가리켜 초심을 잃었다고, 알갱이였던 시절을 버렸다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콩은 그런 말에 개의치 않고 오늘도 조용히 싹을 틔운다. 알갱이 시절의 단단함이 있었기에, 콩나물로서의 아삭함이 가능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바뀌고 새로워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콩은 더 많이 채우기보다 비워내고, 더 단단해지기보다 부드러워진다. 곡물의 자리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콩나물로는 가벼워지고, 두부로는 고요해지고, 발효된 된장으로는 깊어진다. 모습은 달라져도, 단단한 알갱이 시절부터 품고 있던 그 밀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의 식사 시간을 위로한다. 그래서 콩의 변신은 아름답다.
오늘 저녁 콩나물국을 먹다가 가느다란 줄기 하나를 건져 올렸다. 젓가락 끝에서 잠시 흔들리다 멈췄다. 그것이, 한때 단단한 껍질 속에 웅크려 있던 알갱이였다는 사실을 나는 잠시 생각했다. 단단했던 어느 시절이 내 몸속으로 스며든다. 피어오르던 김이 사라지며 국물은 식어가고 있었지만, 콩이 품었던 온기는 아직 따스하게 남아있었다.
콩은 콩과(科)이다. ‘먹는 씨앗’이나 외떡잎식물인 다른 곡물과 달리 쌍떡잎식물이며 두류라는 독자적인 이름이 있다. 공생관계인 뿌리혹박테리아가 뿌리에 서식하며 공기 중 질소를 직접 고정해 공급한다. 덕분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단백질의 함량이 높다.
콩은 품종 종류도 많고 그 용도도 다양하다. 특히 수입콩은 GMO(유전자변형체)가 대부분이라 이에 대한 논란은 늘 숙제로 남는다.
콩나물이 되는 발아 과정은 새생명을 위한 화학 공장이 가동되어 성분이 재설계된다. 이때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며 그중 하나가 숙취 해소제 아스파라긴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