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감자

by서람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가위~바위~보(묵찌빠)


어린 시절 친구끼리 순서나 우열을 가려야 하는 시점이 되었을 때 순간적으로 등장했던 노랫말이다. 그때도 그렇고 이후에도 이 노래는 행위와 소리에 집중한다. 담긴 뜻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뭔가 그 상황이 되면 조건반사로 행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감자였는지 궁금해진다. 또한 ‘싹이 나서 잎이 나서’가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감자 같이 생긴 내 ‘주먹’을 쥐고 바라본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펴면 ‘가위’, 마저 다 피면 ‘보’가 되는 동작을 취했다. 이는 감자가 싹을 틔워 줄기를 뻗고 잎을 펼치는 생장 과정과 시각적으로 매우 닮아있다. 더구나 감자는 땅속뿐만 아니라 보관 중에도 싹이 나고 빛을 받으면 잎이 나는 모습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다른 식물에서 보기 어려운 이런 관찰의 결과가 놀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강의 중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감자꽃 보신 분 있나요?”


대부분은 보았다고 하고 작고 귀여운 흰 꽃이 핀다고 상세하게 답하기도 한다.


“좋습니다. 단아한 꽃이 핍니다. 그렇다면 열매도 맺고 씨앗도 생긴다는 뜻이죠…. 그런데 왜 그 씨앗을 심지 않고 먹는 감자를 직접 심을까요?”


이 추가 질문에 다들 살짝 고민에 잠긴다. 어슴푸레 알 것도 같은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씨앗 대신 '씨감자'를 쪼개서 심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씨앗을 심으면 부모 세대와 똑같은 감자가 나오지 않는다. 이미 수정을 통해 부모와는 다른 유전자를 가진 씨앗이다. 부모와 자식이 닮은 건 맞지만 같을 수는 없다. 씨앗만으로 부모와 큰 차이 없이 이어받는 다른 작물과 달리, 감자는 제 몸을 쪼개 주어야만 자신과 가장 꼭 닮은 다음 세대를 세상에 내어놓는다

이렇게 덩이줄기인 씨감자를 잘라 심는 것은 사실상 복제 방식이다. 우수한 맛과 모양을 보존할 수 있고 생장 속도도 빠르다는 강점이 있다. 다만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해 특정 병원체가 나타나면 집단적으로 취약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감자는 꽃과 씨앗이라는 정석을 따르지 않고 자기 몸을 나누어 번식한다는 게 참으로 흥미롭다.

감자의 생존 전략을 들여다보면 그래서 묘한 감정이 든다. 번식 이상의 지독한 내리사랑의 서사가 흐르기 때문이다. 땅속 씨감자는 싹을 틔우고 새순이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 때까지 저장해 둔 양분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초록 잎을 펼쳐 햇빛을 받아 자생력을 갖출 때면 그제야 쪼그라들고 소멸한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라는 그 경쾌한 놀이 가사 이면에는,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녹여낸 숭고한 희생이 숨어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감자하면 둥글고 단단함, 삶았을 때의 그 포근한 맛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음 생을 위해 헌신한 씨감자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인간의 삶 또한 다르지 않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일상은 다른 누군가 닳아 없어진 자리 위에 세워진 것일지 모른다.

부모가 허리를 굽힌 그 시간, 스승에게 받은 은혜 등, 눈에 띄지 않게 사라져간 노력이 쌓여 한 사람의 성장을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희생’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가장 뜨거운 응원이자 순리이다. 감자처럼 인간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누군가를 밀어주는 존재였다.


감자 하나를 손에 쥐고 바라본다. 어린 시절 무심코 외쳤던 그 노랫말이 다시 입안에 맴돈다. 승패를 위해 내미는 가위, 바위, 보의 손짓 속에는 우리들 성장의 전 과정이 압축되어 있다. 내 주먹이 감자처럼 단단하게 여물기까지, 손가락이 잎사귀처럼 활짝 펴지기까지, 누군가 어딘가에서 자기 몸을 온전히 허물어 밑거름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다음에 다시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면, 승부의 결과에 몰입하기보다 잠시 손바닥의 온기를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이 삶의 무게 중, 오롯이 나만의 힘으로 일궈낸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감자는 가지과(科)이다. 쌀, 밀, 옥수수와 함께 4대 식량 작물로 주식과 부식의 식재료로 다양하게 이용한다. 역사적으로 의외의 반전 서사를 가졌다. 16세기에 남아메리카로부터 유럽에 들여왔을 때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았다며 '악마의 작물'로 취급했었다. 이후 기근을 구한 구황작물로 인구 증가를 뒷받침한 숨은 영웅이었다. 지금은 감자 없는 유럽 요리를 상상할 수도 없다.

‘감자 싹이 나면 못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감자가 빛을 받으면 초록색으로 변하며 독성 성분인 솔라닌이 생긴다는 뜻으로 때를 놓치면 독(毒)이 된다는 경고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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