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황금기
나는 그때의 내게 말하고 싶어졌다.
네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이 아니야. 훨씬 좋은 날이 많이 펼쳐질 거야. 15년 뒤에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장면들을 품은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 장류진
"OO에 살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지."
라고 말하던 회사 선배. 나 역시 결혼 전에 그 동네에 살았고, 결혼 후 그곳을 떠나면서 선배의 말이 종종 떠올랐다. ‘맞아, 그곳에서 살 때가 내 황금기였어’ 하며 동의했다. 퇴근 후 댄스를 배우러 다니고, 도자기 공방에 그릇을 빚으러 다녔다. 새 계절이 찾아올 때면 문화센터 시간표를 보며 무얼 배워볼까 골똘히 고민했다.
퇴근길 통근버스에서 내린 뒤 만두가 먹고 싶은 날이면 만두를 사서 들어갔고, 쫄면이 먹고 싶은 날이면 쫄면을 사서 들어갔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씩씩한 신입사원 역할을 충실히 해낸 뒤 집에 들어와 티브이 앞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싶은 속도로 먹는 것은 식사 그 이상의 힐링이었다. 작은 원룸이 온통 내 공간이었고, 건물 밖 세상은 언제든 어디로든 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있는데 무언가 허전하다. 그곳에는 지금 이 순간도 부대끼며 살고 있는 가족이 없다. 각자 보낸 하루 일과를 나누며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식탁이 없다. 침대에 함께 누워 속닥이는 아이가 없다. 그리고 바카라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내가 없다. 그 사이 쌓아온 수많은 시간과 여러 인연들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없던 때를 떠올리니 마음이 무척 공허해진다. 물론 그때는 허전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의 황금기는 대체 언제인 걸까?
지금이 내 삶의 황금기인 것을 온전히 인지하며 보낸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대학교 때 반년 간 연수를 떠난 호주에서의 시간이었다. 도시와 자연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나라에서 나는 눈을 반짝이며 매일을 보냈다. 멋진 풍경과 새로운 경험에 취해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구나.' 하고 말이다.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의 장류진 작가도 그랬다고 한다. 대학생 때 보낸 핀란드에서의 시간이 황금기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후에 훨씬 좋은 날들이 많이 펼쳐질 거라고. 그 많은 장면들을 품은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작가의 말에 나 역시 공감한다. 20대의 시절을 황금기라고 말하기에는 그 후에도 내게 멋진 날들이 참 많았다. 오늘의 나와 그때의 나를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무척 사랑한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게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 그때를 살아본 걸로 되었고, 지금을 놓고 싶지 않다.
나의 딸이 커가는 걸 보시며 친정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들 어렸을 때, 학교 들어가기 전이 엄마는 가장 걱정 없이 행복했던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엄마가 안쓰러웠다. 30년도 더 전에 엄마는 가장 행복했구나. 아이가 학령기가 된다는 건 부모에게 큰 부담이구나. 이후의 삶은 많은 근심 걱정이 동반하는구나... 당시 내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 이 생각이 더 비장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엄마와 나의 삶이 달라서인지 아직 내가 덜 살아봐서인지 아이가 4학년이 된 지금 나는 과거가 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가 커가면 커가는 데로 그 모습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아이가 커갈수록 나란히 바카라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져 나도 내 바카라상 타임을 갖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내 만족도는 무척 크다.
나 또한 과거의 많은 날들을 사랑한다. 다시 오지 않을 그때를 생각하면 눈빛은 아련해지고 마음은 저릿해진다. 하지만 내 삶의 황금기를 꼽기엔 손들어주고 싶은 날들이 너무 많다. 어떤 특정 시기가 특출 나게 빛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 못지않게 지금을 좋아한다. 그날들을 살아본 이 삶을 사랑한다.
삶은 연속이다. 지나간 것 같지만 마냥 지나간 것만은 아니다. 머리로 기억하고 마음에 남아있다. 그리고 달라지고 채워진 내가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황금기가 과거에 머무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보다는 계속해서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면 좋겠다. 때론 강한 햇빛에, 때론 어두운 밤 달빛에 반짝이는 황금빛 물결을 볼 수 있다며 좋겠다. 어느 한 시기에 갇히지 않고 흐르는 그 물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