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과 모자무싸

투쟁의 편을 들다

by클로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예전의 번역본에서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로 쓰였다고 한다. 이것은 의역한 문장이고 독일어 원문에는 실제로 "투쟁"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고 한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것. 나는 유독 이 둘의 차이를 끈질기게 붙잡게 된다.


아주 오래전, 아마 스무 살 이전에 데미안을 읽다가 말았던 기억이 있다.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몰입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유명한 이 문장은 10대, 20대, 30대를 거쳐 40대인 지금도 한번씩 만나고 있다. 처음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부담'이었다.

'아, 새는 알을 깨야 나올 수 있는 거지. 나오기 위해서는 꼭 깨야만 하는 것이지.'

혹시 내가 알을 깨지 못하는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계속 알 속에 머무는 힘없는 새로 존재하며 말이다.


그런데 문장이 바뀌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고. '투쟁'이라고 했다. 평소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이 문장 속에서의 '투쟁'이 마음에 들었다. 왜 좋았을까?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능력이 좋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새들이 알 속에서 저마다의 투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결과에 맞춰졌던 초점이 알을 깨기 위한 각자의 노력으로 옮겨졌다.




요즘 드라마 모자무싸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인상 깊게 보고 있다. 누가 봐도 그늘진 곳에서 허덕이는 이도, 누가 봐도 눈부신 조명 아래 당당해 보이는 이도 각자 자신의 삶 안에서 투쟁을 하고 있다. 일부러 싸우려 드는 것이 아니라 삶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이 드라마는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다들 그렇게 발버둥 치는 자신을 끌어안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하고 있는 투쟁이 당연한 과정처럼 느껴진다. 알 속의 그 작은 새도 투쟁을 하고, 우리 인간들 모두 투쟁을 하고, 나 역시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름의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나를 한 꺼풀 벗겨내 다음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른 날갯짓을 해보기 위해, 어쩌면 진짜 나만의 움직임으로 살아보기 위해.


중요한 건 알 속에 계속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마음 일 것이다. 움직이고 싶은 마음. 더 멀리, 더 크게, 더 새롭게. 과거 안에 갇히지 않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그 투쟁의 끝에 알이 쩍 갈라지고 훨훨 나는 것.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직은 조금 금이 간 정도 일 수도 있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게 있을 것이다.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예전과 다른 것들을 보게 해 줄 테니까. 그러니 우리 그 과정 또한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 안과 알 밖의 이분법적인 세상이 아닌, '투쟁'중인 지금의 모습도 끌어안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마주하는 누군가도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의 투쟁을 들여다보기를. 마찬가지로 상대의 투쟁도 바라봐주기를.

각자의 투쟁에 애쓰고 있는 그 둘에게 친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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