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
강한 여성들을 보면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떠오르는 한 이야기가 있다.
흑해와 소아시아 어딘가, 남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여인들이 살았다는 그리스 신화다.
어린 시절 읽었던 신화인데도, 지금까지 강한 여성들을 보면 문득 그들이 떠오른다.
아마 그때의 나에게도 그들은 꽤나 매력적인 존재였나 보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했고, 활은 그들의 손끝에서 더 멀리 날아갔으며, 전쟁 앞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여성을 중심으로 슬롯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여전사들을 ‘아마조네스(Amazons)’라 불렀다.
그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의 후예로 여겨졌고, 사냥과 여성의 수호신인 아르테미스를 숭배했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그들의 슬롯에는 남성이 중심에 있지 않았다. 여성들이 전사가 되고, 공동체를 이끌었다.
아마조네스라는 이름에도 흥미로운 해석이 따라붙는다.
흔히 ‘가슴이 없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며, 활을 쏘는 데 방해가 되는 오른쪽 가슴을 잘라내거나 지졌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실제 관습이라기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상상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호메로스는 아마조네스를 antianeirai, 즉 ‘남성에 대항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의 표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보면, 이름에서부터 이미 그들은 그리스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여성의 모습과는 다른 존재였던 셈이다.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전승에 따르면 아마조네스는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이웃의 남성 부족인 가르가레이와 결합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가운데 여자아이는 길렀지만 남자아이는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고 한다.
물론 이 역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신화가 만들어낸 세계에 가깝다.
그런데 아마조네스를 둘러싼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는 정작 아마조네스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리스인의 시선을 더 자주 마주치게 된다.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이 어느 순간 조연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내용들 때문이다.
신화 속에서 헤라클레스는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얻기 위해 그들과 맞서고, 테세우스 역시 그들과 충돌한다. 이 신화들 속에서 아마조네스는 단순한 적이 아니다.
영웅이 자신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넘어야 할 존재이자, 그리스 세계가 스스로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처럼 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아마조네스는 그리스인의 거울이었던 셈이다.
원래 사람은 혼자서는 자기 얼굴을 잘 모른다. 거울을 봐야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듯, 누군가의 눈에 비친 나를 상상해 봐야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 감이 잡히는 법이다.
그리스인들은 낯선 타자를 상상함으로써 비로소 자신들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타자가 낯설고 강렬할수록, 거기에 비친 ‘우리’의 윤곽도 더 또렷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신화는 오래된 여전사들의 이야기라기보다, 인간이 자신과 다른 존재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낯선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거기에 매혹되고, 이해하려 애쓰는 동시에 자신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런데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낯선 존재 앞에 서 있다.
바로 AI다.
AI는 인간의 몸도, 인간의 삶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인간이 오랫동안 스스로를 인간답게 만든다고 믿어온 능력들을 놀라운 속도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곡을 짓고, 창작을 하며, 어려운 질문에 답한다.
그래서 우리는 AI를 두고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인간과 비교하고 있다.
"과연 생각하는 존재인가?"
"인간처럼 창작하는가?"
"거기에 지능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겉으로는 AI에 관한 물음처럼 보이지만, 실은 방향이 바뀐 건 아닐까.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 AI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가일 수 있다.
아마조네스를 보던 그리스인의 시선과 AI를 보는 오늘의 시선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보인다.
아마조네스가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흔들었다면, AI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흔든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인간은 비슷한 두 가지 감정으로 반응한다.
바로 매혹적이면서 두려운 존재다.
AI가 인간보다 빨리 쓰고, 더 많이 기억하고, 어떤 영역에서는 더 나은 결과를 내는 것을 보며 우리는 감탄과 동시에 불안해한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걱정, 창의성이 무의미해질지 모른다는 우려, 반대로 인간의 능력이 확장되리라는 기대까지.
한마디로 우리의 반응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까지 겹쳐지면서 복잡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은 사실 AI의 본질을 설명한다기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드러낸다.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문제를 풀 때마다 우리는 글쓰기란 무엇인지, 창작이란 무엇인지, 지능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오래된 질문 앞에 다시 선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존재적인 질문.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오랫동안 지능도, 언어도, 예술도 인간만의 것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AI가 그 영역들에 발을 들이면서 그 경계는 더 이상 예전처럼 또렷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간과 AI가 같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 있다.
AI가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마조네스가 그리스인의 거울이었듯, AI는 오늘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다.
인간은 원래 이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무언가에 자신을 비춰봐야만 비로소 나를 알아채는 존재.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AI 앞에서 느끼는 이 낯선 동요도, 결국 스스로를 다시 알아가는 과정의 하나일 것이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AI의 모습과 함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끝까지 인간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은지를.
그리스인이 아마조네스를 통해 문명과 야만, 자신들과 타자의 경계를 사유했다면, 오늘 우리는 AI를 통해 인간과 기계, 창작과 생성의 경계를 다시 사유한다.
결국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AI가 얼마나 인간처럼 될 것인가"가 아닐 것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AI를 마주한 우리는, 인간을 무엇이라 정의할 것인가?"가 아닐까.
아마조네스 이야기가 지금도 신화를 건너 우리에게 오래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강한 전사였는지를 증명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그리스인에게 스스로 누구인지를 묻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AI가 우리 앞에 서 있다.
이번에는 활과 말을 탄 여전사가 아니라, 말과 이미지와 데이터로 빚어진 새로운 타자다.
우리는 AI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순간,
AI 역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AI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우리 자신의 얼굴이 아닐까.
※ 이 글은 『카페에 ‘우리’가 있다』 이후,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며 이어진 사유의 한 갈래입니다. 그때의 질문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고, 이 글은 그 질문을 따라가며 시작되었습니다.
[내일 글] 내가 아는 나, 남이 아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