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려도 걸려 있는 소원들

에마 앞에서 읽는 '산다는 것'

byItz토퍼
ⓒ Itz토퍼 Photography


일본인의 정신을 읽으려면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신사(神社)다.


물론 우리에게 신사는 편하지만은 않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와 야스쿠니 논란 같은 아픈 기억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신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보려 한다.


대도시의 빌딩 숲 사이에도, 인적 드문 시골 마을 어귀에도 신사는 어김없이 있다. 일본 전역에 약 8만 개가 있다고 하니 편의점만큼이나 흔한 풍경이다.


그런데 붉은 도리이(鳥居)를 지나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면 공기가 달라진다. 바깥의 소음이 한 겹 벗겨지고, 오래된 나무 냄새와 자갈 밟는 소리가 그 자리를 채운다.


이곳에서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무교'라 말하면서도 새해가 되면 첫 참배를 하러 긴 줄을 서고, 아이가 태어나면 품에 안고 찾아오고, 시험을 앞두고는 합격을 빈다.


교리를 앞세우지도 경전을 읽어주지도 않는 이 신앙은 믿음이라기보다 생활에 가까워 보인다.


손을 씻고,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뼉을 치고, 다시 한번 절하는 단출한 몸짓에는 자연과 조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배어 있다. 그래서 신사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신세계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바카라과도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신사에 가면 나는 가장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있다.


웅장한 건물도, 엄숙한 의례도 아니다. 본전에서 조금 떨어진 한쪽 구석에 빼곡히 걸린 나무패들 앞이다. 에마(絵馬)라고 부르는 것이다.


에마는 이름 그대로 '그림 말'이라는 뜻인데, 옛날에는 신에게 살아 있는 말을 바치며 소원을 빌던 풍습에서 나왔다고 한다.


말을 바칠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이 나무판에 말을 그려 대신했고, 그것이 오늘날 누구나 손바닥만 한 나무패에 소원을 적어 거는 풍경이 되었다고 한다. 간절함을 바치는 방식이 말에서 나무패로, 훨씬 작고 소박한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내가 그 앞에 오래 머무는 이유는 솔직히 조금 미안한(?) 목적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삶과 사람'을 훔쳐보고 싶어서다.


소원이란 원래 가장 은밀한 마음이지 않은가. 일기장에도, SNS에도 쉽게 적지 못할 이야기를 사람들은 신 앞에서만 꺼낸다. 그런데 신에게 부친 그 편지가 우체통이 아니라 마치 진열대 같은 곳에 가지런히 걸려 있다. 누구나 지나가다 읽을 수 있게, 바람에 흔들리면서.


이웃 나라의 낯선 여행자가 남의 마음속을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말이 보이나요? ⓒ Itz토퍼 Photography


나무패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과 마음이 걸려 있다.


서툰 글씨로 꾹꾹 눌러쓴 대학 합격 기원 옆에는 그 글씨를 쓰던 열여덟 살의 긴장이 묻어 있다. 오랜 지병이 이제 그만 낫기를 바라는 문장이 있고, 부모님이 오래 건강하게 곁에 계시기를 비는 문장이 있다.


그런가 하면, 무슨 사연인지 삶의 불안함으로 이번 달을 무사히 넘기게 해달라는 애절한 마음이 있고, 부디 가게가 문을 닫지 않게 해달라는, 빚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경제적인 사정도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으니 길을 알려달라는 청년의 막막한 미래가 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거나 지금 곁의 사람과 오래 함께하게 해달라는 사랑도 있다.


심지어는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낯선 언어로 쓰인 소원도 함께 그 속에 나란히 걸려 있다.


그 앞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에마들이 따닥따닥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상큼한 나무 냄새와 함께 세상의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산다는 것'


우리는 저마다 다른 문제를 안고 살지만, 그 문제들은 모두가 비슷한 곳에서 출발한다.

아프지 않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오래 곁에 있기를, 먹고사는 일이 무너지지 않기를, 가족 모두의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은 나아지기를.


소원은 결국 우리 마음에 자라난 결핍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없는 것, 혹은 잃을까 두려운 것을 빈다.


그래서 소원 목록은 그 사람이 지금 어디가 비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가 된다.

내가 보는 수백 장의 나무패는 수백 개의 결핍이 표시된 지도인 셈이다.


나는 그 앞에서 ‘산다는 것’이란, 어쩌면 그 빈 곳들을 안고 하루하루를 채워가며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도 슬프기만 하지는 않다. 나무패를 사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건다는 것은 아직 내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소원을 쓴다는 건 희망이 있어서라기보다, 어떻게든 희망을 품고 버텨내겠다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일일테니까.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저 수많은 사연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같은 마음이 같은 자리에 나란히 걸려 있지만, 어쩌면 그들 마음에 드리운 그림자와 여운이 내 마음 한구석에도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비바람에 글씨가 바랠 즈음이면 신사에서 거두어 정성껏 태워 준다고 하니,

소원도, 삶도 그렇게 잠시 걸렸다가 사라지는 것.


그래도 나는 일본에 다시 가게 되면, 어김없이 에마들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남의 소원을 읽는 일은 결국 나와 내 삶의 결핍을 읽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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