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①

너는 피터 파커냐, 아니면 스파이더맨이냐

byItz토퍼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때,
나는 여전히 나인가

by Genspark & ItzTopher

이름이 지워진 자리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간단히 배경을 짚고 가자. 다만 이 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만 간략히 언급하고, 나머지 이야기는 영화관에서 직접 만나 보시길 바란다.


전작 《스파이드맨: 노 웨이 홈》의 마지막,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문으로 세상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피터 파커'라는 이름이 지워졌다.


안타깝지만 애인이었던 MJ도, 절친 네드도, 그를 알던 그 누구도 더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되돌릴 방법이 있었지만 피터는 그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고, 그렇게 4년이 흐른다.


그동안 그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뉴욕을 지키는 스파이더맨으로만 살아간다.


E.V.라는 자신만의 인공지능과 함께 장비를 다듬고, 크고 작은 범죄자들을 처리하며 도시의 신뢰를 조금씩 쌓아갈 뿐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피터 파커'로 불러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는 더 큰 위협과 얽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몸조차 서서히 예전과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 글은 그 자세한 사건들보다, 이 설정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질문에 집중하려 한다.

바로 '나'와 직접 관련된 질문이다.


"나는 피터 파커인가, 아니면 스파이더맨인가?"



이름이 지워진 자리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2026)의 출발점은 간단하지만 잔혹하다.


세상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피터 파커'라는 이름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도, 절친도, 그를 알던 그 누구도 더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남은 것은 가면을 쓴 스파이더맨, 행동으로만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름뿐이다.


이 설정을 초능력 영화의 편리한 장치로만 보고 넘어가면 너무 아쉽지 않은가.

여기엔 우리들 자신과 관련된 아주 오래된 질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아들이라 부르고, 누군가 나를 친구라 부르고, 누군가 나를 이름으로 불러줄 때, 그 부름들이 쌓여 '나'라는 감각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부름이 하루아침에 전부 사라진다면, 나는 무엇으로 남는가?"


피터 파커는 이 질문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떠맡은 인물이다.



정체성은 기억되는 것인가, 행해지는 것인가


영화 속 피터는 이름을 되찾을 기회를 굳이 외면한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MJ와 네드를 찾아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스스로 익명 속에 남기를 택한다.


표면적 이유는 그들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서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그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자신이 아니라, 매일 밤 반복하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는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오래된 답을 나란히 세운다.


하나는 정체성이란 타인의 기억과 인정으로 완성된다는 답.

또 다른 하나는 정체성이란 아무도 보지 않아도 반복되는 행위 그 자체라는 답.


피터가 매일 밤 다시 슈트를 입는 이유는 누군가 그를 알아봐 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스파이더맨이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쌓여 그를 만든다. 이름이 없어도 존재는 지속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던지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이 지움은 애초에 강요된 형벌이 아니었다.


전작 《노 웨이 홈》에서 다른 차원의 빌런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마법을 스스로 택한 것도 피터였다. 남을 구하는 대가를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치르는 사람. 그러니 지금의 익명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그는 사라진 게 아니라, 사라지는 쪽을 스스로가 계속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사실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물음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면, 아마 우리 각자가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본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의 이름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불리는 이름과 집에서 불리는 이름, SNS 프로필 속 이름과 익명 커뮤니티에서 쓰는 닉네임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공간에서는 자신을 증명할 관계도 이력도 없이 그저 활동으로만 존재한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가거나, 이직을 하거나, 관계가 끊어졌을 때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다. 나를 나로 알아보던 사람들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을 근거로 계속 '나'일 수 있는가.


피터 파커의 상실은 초능력 서사의 극단적 비유일 뿐, 본질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다만 우리의 상실은 다르다. 초능력적인 주문 대신 시간과 거리, 잊힘이라는 더 느리고 평범한 방식으로 찾아올 뿐이다.



몸도 자아의 일부일까


영화는 여기에 또 하나의 층위를 더한다.

피터의 몸 자체가 유전적으로 서서히 변형되어 간다는 설정이다.


"인간 피터 파커인가, 아니면 거미인간 스파이더맨인가?"


마음의 문제였던 정체성의 위기가 이제 몸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 몸은 정말 내 몸인가에 대한 혼란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자아를 흔드는 것은 기억의 상실만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달라지는 몸과 습관, 생각의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서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때의 가치관, 그때의 관계, 그때의 몸과 지금의 것들 사이에 연속성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지금도 그때와 동일한 '나'인가.


정체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해서 갱신되는 과정이라면, '나'라는 말은 애초에 늘 잠정적인 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항상 미완성의 존재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완성은 어느 시점에 찾아올까?"



브랜드 뉴 데이, 계속 다시 쓰이는 자아


부제 '브랜드 뉴 데이'는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완전히 지워진 자리에서도 하루는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다. 이 영화가 말하는 자아란 한 번 정해지면 끝까지 유지되는 이름표가 아니라, 잃은 뒤에도 매일 다시 선택되어야 하는 무엇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질문은 피터 파커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온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스파이더맨의 정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각자가 조용히 마주치게 되는 무언가이다.



가면을 벗는 순간에 남는 것


우리가 영화관을 나서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몇 개의 단체 채팅방을 확인하고, 오늘 만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불렀는지를 하루쯤 지나면 잊어버리는 그런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익숙함 속에서 문득 스파이더맨의 가면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 가면은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었을까.


퇴근길, 하루 종일 불렸던 직함과 이름을 벗어놓고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 혼자 섰을 때. 오랜만에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이름을 우연히 마주치고, 그 사람에게 나는 이제 어떤 존재로 저장되어 있을지 짐작해 볼 때. 새로 옮긴 자리에서 아무도 나의 과거를 모른 채 그저 지금의 행동만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그런 순간들은 늘 있어 왔지만, 대개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피터 파커가 매일 밤 슈트를 걸치며 반복했던 것은 사실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그런 순간들에 머물러 보는 일이었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자리에서,

그럼에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하루에도,

무엇이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지.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은 답이 아니라,

그런 자리에 스스로를 한 번 세워 보게 만드는 여운이다.


"스크린이 꺼지고도

한동안 마음에 남는 것은,

어떤 종류의 여백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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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Amazing Fantasy #15 (Marvel Comics, 1962), written by Stan Lee, art by Steve Dit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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