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의 재발견, 질의에 관한 답글
※ 이 글은 『내향성의 재발견』을 읽어주신 독자분들의 질문과 요청에 답하고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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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성이라는 이름을 돌려받는 일》
1. 내향성이라는 이름의 방
《내향인으로 산다는 것》
4. 내향인의 사랑
7. 내향인의 완성된 삶이란
내향인의 완성된 삶이란?
며칠째 비가 올 듯하면서도 제대로 내리지 않는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고 자면 답답하고, 창문을 조금 열고 자면 새벽엔 조금 쌀쌀한 날씨다. 모처럼 저녁잠을 청할 수 있는 기회가 오히려 더 피곤한 밤이 되고 말았으니.
결국 습관처럼 서재에 앉아 창문을 열고 노트북을 펼친다. 그리고 그동안 생각만 하다 잊고 지냈던 독자들의 질문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 질문들을 따라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 이제야 답을 쓰기 시작한다.
발리 울루와뚜의 새벽 바다가 다시 눈앞에 펼쳐지고, 한순간 써 내려갔던 문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여백을 만든 후 또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질문 때문에.
보드를 세우고 고요히 파도를 기다리던 사람들. 그들은 단 한 번 파도 위에 올라서기 위해 침묵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들이 사랑하는 바다에서.
'나처럼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그 깊은 심연을 사랑하는 사람도 영원히 물속에 머물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질문의 요지이며,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우리는 해양 동물이 아니다. 바다가 아닌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태어난 존재다. 아무리 수영을 잘하고 깊이 잠수할 수 있다 해도, 물속의 고요에만 머물 수는 없다. 때때로 수면 위로 올라와 세상과 마주하고, 다시 숨을 고르는 호흡이 필요하다.
그 순간 문득 한 마리 고래가 생각났다.
향유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심해 잠수 포유류 가운데 하나다. 수백 미터, 때로는 2,000미터가 넘는 깊이까지 내려가 먹이를 사냥하며, 빛조차 닿지 않는 심해의 고요와 거대한 수압 속에 머문다.
하지만 그 거대한 몸도 결국 숨을 쉬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심해는 삶의 터전이지만, 호흡만큼은 오직 수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바라본 수평선을 세상과 만난 바다가 스스로를 접어 고요를 숨기는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심해와 해수면을 분명하게 구분 짓는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러한 구분이 읽는 이로 하여금 '심해는 옳은 것이고 해수면은 소진일 뿐'이라고 느끼게 하였는지도.
하지만 살다 보면, 깊은 바다를 품은 사람에게도 반드시 올라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가.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발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협상, 누군가 답을 기다리는 위기의 순간들.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침묵으로 깊이를 증명할 수 없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해수면 위로 떠올라서, 입을 열고, 파도 위에 올라서야만 한다.
내향인들이 가진 두려움, 그리고 항상 품고 있는 질문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표면으로 올라가는 순간, "나는 나를 잃는 것인가, 아니면 내 모든 깊이를 데리고 올라가는 것인가?"
잠수와 호흡, 두 개의 리듬
나는 여전히 향유고래에게서 그 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또 하나의 질문을 통해.
"그의 삶에 있어서 해수면과 심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어느 한쪽으로만 국한시켜 생각하려 하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두 곳에서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머무름이 아니라 일종의 '리듬'이기 때문이다.
깊이 내려가는 시간과 숨을 쉬는 시간이 정확한 주기로 반복됨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어느 한쪽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심해에만 있으면 숨이 끊어지고, 표면에만 있으면 먹이를 구하지 못하기 때문.
내향적으로 사유하고, 외향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세월 속에서 수없이 들어왔던 질문. 그 답을 제대로 글로 정리하고 전달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시금 질문들을 부둥켜안고, 이 해변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향인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깊은 바다에서 충분히 생각을 숙성시키는 시간과, 그 생각을 들고 수면 위로 올라가 세상에 내어놓는 시간.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오가는 리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리듬감 있는 호흡'이라고 부르고 싶다.
문제는 내가 종종 이 둘을 적대 관계처럼 해석했다는 오해를 받곤 했다는 점이다. 변론이라면 변론이고 해석이라면 해석이겠으나, 이 부분에 대해 향유고래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며 온전한 의미가 전달되기를 바란다.
표면으로 올라가는 것을 '나답지 않은 흉내'라 여기고, 그 거부감 때문에 정작 올라가야 할 순간조차 심해에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과정에서의 오류라고 인정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고래가 알려준 답을 다시 설명하고자 한다.
고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은 타협이 아니라 '호흡'이야. 내가 다시 내려갈 때 더 깊이 내려가기 위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니까."
그의 짧은 답이 나의 해석을 대변해 주는 듯해 참 고맙다.
심해의 법칙을 표면으로 끌어올리기
한 내향인이 발표를 위해 강단 앞으로 나아갔다.
내향인에게 있어 그 자리는 마치 해수면처럼 소음과 풍랑이 일렁이는 곳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는 힘차게 발표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즉흥의 산물이 아니다. 그가 심해에서 이미 끝낸 사유를 숙성된 형태로 들고서, 잠시 표면 위로 올라온 순간이기 때문이다.
협상 테이블도 마찬가지다.
외향인의 협상이 빠른 주고받음의 파도라면, 내향인의 협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섣불리 자신의 패를 보이지 않는 침묵, 상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여백, 그리고 마침내 던지는 한마디의 묵직함. 표면 위에서도 심해의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모습이다.
위기의 순간도 그렇다.
모두가 패닉에 빠져 요란하게 떠드는 회의실에서, 가장 침착하게 다음 한 걸음을 제시하는 사람은 종종 가장 깊이 가라앉아 있던 사람이다. 그 침착함은 표면 위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평소 심해에서 묵묵히 쌓아둔 내공을 꺼내놓는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향인이 표면 위에서 발휘하는 힘은 표면의 법칙을 새로 배웠기 때문일까? 혹은 모방했거나?
아니다. 그것은 심해의 법칙을 표면까지 그대로 가지고 올라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너무 오래 떠 있을 때, 너무 오래 잠겨 있을 때
그렇다고 양쪽 모두가 항상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표면에 너무 오래 떠 있으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감압증을 앓게 될 것이다. 반대로 심해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정작 올라와야 할 순간조차 아래로 내려가는 쪽을 택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회피'가 아닐까.
발표가 두려워 끝내 단상에 서지 않는 것, 협상이 불편해 끝내 침묵으로 자리를 양보해 버리는 것, 위기 앞에서 아직은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끝내 입을 열지 않는 것. 깊이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정말 올라와야 할 순간에 더 깊이 가라앉아 숨어버린 적은 없는가.
향유고래가 두려움 때문에 영원히 심해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냥이 아니라 익사일뿐.
내향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의 깊이를 지키는 것과, 올라와야 할 순간을 회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올라가야 하는가, 머물러야 하는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할 때인가?"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묻는 것이다.
다시 가라앉을 용기
결국 걸림돌은 떠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익숙하지 않은 순간에 익숙하지 않은 해수면으로 올라가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해소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굳이 외향인들의 즉흥성을 흉내 내는 연습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이 심해에서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는 '나를 향한 확신', 그 확신이야말로 표면 위로 올라갈 때 두려움과 흔들림을 해소해 주는 유일한 열쇠다.
성실하게 심해에서 준비를 하되 발표 전에 누구보다 철저히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 협상 전에 모든 변수를 미리 심해로 가라앉혀 검토하는 것, 위기 앞에서 평소 깊은 곳에서 쌓아온 침착함을 신뢰하는 것.
이것은 표면의 법칙에 맞추어 자신을 억지로 바꾸는 일과는 다르다. 이는 심해의 법칙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다시 가라앉을 용기'다.
표면 위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다 마친 후에는 굳이 그 소란스러운 곳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역할이 끝나면 다시금 나만의 고요한 심해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고래가 왜 숨을 쉰 뒤에 지체 없이 다시 가장 깊은 심해로 내려가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오르내릴 수 있는 자만이 가진 자유
앞서 우리는 심해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그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할 것 같다. 깊이를 가진 사람의 진정한 힘은 단지 심해에 머무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진정한 힘은, 필요한 순간에 표면 위로 올라오면서도 자신의 깊이를 잃지 않고 끌어올릴 수 있는가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히 심해에만 머무는 고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원히 표면에 떠 있기만 한 고래도 없다.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존재가, 동시에 가장 정확한 순간에 숨을 쉴 줄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 내향인에게 필요한 것은 표면을 피하는 법이 아니라, 표면으로 올라가야 할 때를 알아채는 감각이다. 그리고 올라간 뒤에도 나를 잃지 않을 만큼 내면의 깊이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당신의 침묵이 결코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이제 그 말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그 깊은 침묵에서 길어 올린 '한 마디'를, 가장 소란스러운 순간에 정확하게 꺼내놓을 수 있을 때, 당신의 깊이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