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를 쓴 고발자들: 에필로그

byItz토퍼


"페르소나를 쓴 고발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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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를 쓴 고발자들 (1편)

페르소나를 쓴 고발자들 (2편)


왜 두 글의 마지막에 이 질문이 포함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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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비평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비난이라며 화를 낸다. 하지만 이 질문은 겉으로는 작가의 방법론을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글을 쓴 나 자신의 동기를 묻고 있는 것이다.



"거울을 쓰는 작가"는 자기 자신도 그 유리면 안에 집어넣은 사람이다.


나는 독자의 추함을 비추기 전에, 나 자신의 추함을 먼저 응시해야 했다. 역설을 이용한 풍자가 단순한 조롱으로 끝나지 않고 문학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작가인 나 스스로가 그 부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울은 방향이 없다. 들이대면 모두에게 같은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페르소나를 쓰는 고발자"는 다르다.


그는 탐욕을 찬미하는 가면을 쓰고(wear) 그 뒤에서 손가락질한다. 독자를 향해, 세상을 향해.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가면 안에 안전하게 숨어 있다. 고발의 언어를 빌렸지만, 사실은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또 다른 이기심일 수 있다. 풍자를 무기로 든 순간, 그 칼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찰이 아니라 공격이다.



그래서 글은 '칼'이 된다.


나는 그 칼끝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에세이의 문장 끝에 이 질문을 넣었다.


그리고 독자는 내게 물었다. "왜?"라고.

그렇다면 이 질문이 가장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쓴 에세이 자체가 이 두 가지 사이 어딘가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기심을 찬미했다. 독자의 분노를 유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울을 내밀었다. 여기까지는 작가로서 솔직한 장치였다. 그런데 이 질문을 독자에게 남기는 순간.


"당신은 어느 쪽인가?"


나는 슬그머니 심판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유혹을 받았다.

나는 그 유혹을 알아챘기 때문에, 비로소 이 질문을 쓸 수 있었다.


진정한 거울을 쓰는 작가라면, 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먼저 던졌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했다. 잘난 척이라는 유혹을 떨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거울 앞에 섰는가. 아니면 가면 페르소나 뒤에 숨었는가?"


이 질문은 결코 독자를 향한 것이 아니다.

독자에게 향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이었다.


그것을 알면서 썼기에, 나는 이 에세이가 끝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작가가 아니라 한 명의 독자로 돌아섰다. 내가 비판한 바로 그 자리에, 나 역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래서 나는 다시금 사유의 세계, "칼의 고백"으로 넘어가 다음 질문을 이어가려 한다.


- 다음 글: 칼의 고백, 연재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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