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1 ㅡ 뜻밖에 왕이 된 열세 살 소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3
ㅡ 성종 1 ㅡ
(뜻밖에 왕이 된 열세 살 소년)
어느 왕조에서든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는 의미가 크다.
대체로 왕조 건국 초기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와 제도를 정비해 나라의 틀을 안정시킨 왕에게 붙는 묘호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는 ‘고려 성종’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제6대 왕 성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경종’ 사촌동생이었다. 경종이 죽을 당시 아들 ‘왕송’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치’, 곧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성종 때 고려 초기 치열했던 왕위 다툼도 어느 정도 진정됐고 본격적인 국가체제 정비가 이루어졌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 유교적 정치 원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중앙정치조직과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했다. ‘국자감’을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확대해 문신 관료층 성장에도 힘을 실었다. 고려왕조가 나라의 틀을 갖추는 데 성종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성종은 어땠을까?
조선 제9대 왕 성종은 1457년 ‘세조’ 큰아들 ‘의경세자’, 훗날 ‘덕종’으로 추존되는 ‘이장’과 ‘소혜왕후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혈(娎)’.
처음 ‘자산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자을산군’으로 불렸다. 그런데 성종은 처음부터 왕이 될 가능성 높은 인물은 아니었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세자로 있던 시절만 하더라도 왕위는 의경세자에게 이어질 것이고, 그 뒤에는 성종의 형 ‘월산군’이 있었다.
하지만 의경세자가 스무 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세조 뒤를 이은 사람은 의경세자 동생 ‘예종’이었다. 그러면서 자을산군은 왕위에서 한층 더 멀어졌다.
그런데 그 왕위가 불과 몇 년 뒤 열세 살 소년 자을산군에게 돌아온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조 말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거치면서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구공신들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그 힘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졌다고 본 것이다.
특히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오른 뒤 이들이 권력을 독점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그래서 세조는 구공신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급부상한 젊은 종친 ‘귀성군 이준’과 신공신 ‘남이’가 있었다.
세조는 이십 대 젊은 귀성군을 영의정에 앉히고 남이를 병조판서에 올리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조선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세조가 구공신 한쪽에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로운 세력을 키우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세조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세조 뒤를 이은 예종은 오히려 아버지가 키워놓은 신공신 세력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특히 성격이 강하고 말을 거리낌 없이 하던 남이를 크게 경계했다.
결국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자광’이 남이를 역모로 고변하자 직접 국문에 나섰고 남이와 ‘강순’을 처형했다.
세조는 어린 예종을 보호하려 구공신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을 키웠는데 정작 예종은 그 세력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
권력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세조는 또 하나 묘한 제도를 남겨놓았다. 바로 ‘원상제도’였다.
세조는 말년 건강이 나빠지자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같은 원로대신들이 승정원에 나와 정무를 돕도록 했다. 강한 왕권을 추구했던 세조가 말년에는 오히려 원로대신들에게 상당한 국정 참여 권한을 준 것이다.
예종이 즉위한 뒤 원상은 더욱 늘어났고 수시로 승정원에 들어와 정무에 관여했다. 어린 예종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이 지점에서 ‘태종 이방원’과 세조의 차이도 보인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전에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외척과 공신들을 냉혹하다 할 만큼 정리했다.
세종이 즉위했을 때 누구도 쉽게 왕권에 도전하기 힘든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달랐다.
구공신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귀성군과 남이 같은 새로운 세력을 키워놓는 한편, 말년에는 다시 한명회와 신숙주 같은 구공신들에게 원상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주었다.
어쩌면 서로 견제하게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복잡한 권력구조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은 이제 갓 왕위에 오른 젊은 예종이었다.
예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호락호락한 왕이 아니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예종은 남이 등 신공신 세력을 제거한 뒤 한명회 등 구공신의 권력까지 견제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정희왕후’가 정치적인 부탁을 해왔을 때도 그것을 신하들에게 숨기지 않고 공개하기도 했다. 갈등이 있었다.
젊은 왕은 자기 힘으로 정치를 하려고 했다. 앞편에서 살펴봤듯 예종은 짧은 재위기간에도 강한 왕권을 만들려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2개월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스무 살이었다.
예종에게 지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록에는 오래전부터 족질을 앓아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주변에서 곧 죽음에 이를 정도의 중병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세상을 떠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후대에는 예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예종 독살설’이 제기됐다. 특히 그가 죽은 뒤 벌어진 ‘왕위계승’ 과정이 의문을 더욱 키웠다.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다. 불과 네 살이었지만 왕의 친아들이었다.
또한 의경세자의 장남이자 세조의 장손인 열여섯 살 월산군도 있었다.
그런데 정희왕후는 이 두 사람을 모두 제치고 의경세자 둘째 아들 열세 살 자을산군을 왕으로 지명했다.
바로 성종이다.
정희왕후는 이유를 밝혔다.
제안대군은 너무 어렸고 월산군은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며 자을산군은 세조가 그 사람됨과 도량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었다.
실록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제안대군이 너무 어렸다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자을산군 역시 열세 살에 불과했다. 어차피 ‘수렴청정’이 필요한 나이였다. 더구나 자을산군보다 나이가 많은 친형 월산군도 살아 있었다.
물론 실록에는 월산군이 병약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왕위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자을산군은 당시 조선 최고의 권력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한명회는 세조 때부터 권력중심에 있었고 예종 때에도 원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딸 가운데 한 명은 예종 왕비였고 또 다른 딸은 자을산군 부인 이었다.
자을산군이 왕이 되면서 한명회는 다시 왕의 장인이 되었다.
제안대군과 월산군을 제치고 하필 한명회의 사위인 자을산군이 왕으로 선택됐다는 사실이 후대 사람들에게 여러 의문을 남긴 이유다.
여기에 정희왕후와 한명회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깊이 연결돼 있었고 혼맥까지 겹겹이 얽혀 있었다. 성종 친모 소혜왕후 역시 한명회와 사돈 관계였다.
이 때문에 정희왕후와 소혜왕후,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훈신세력이 예종의 죽음과 성종 즉위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것이 아니냐는 여러 추론이 뒤따랐다.
심지어 예종 독살설까지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예종이 갑작스럽게 죽었고 그 죽음으로 정치적으로 이익을 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이 곧 그들이 예종을 죽였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현재까지 예종이 독살됐다고 단정할 만한 결정적 사료는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시 정치상황을 보면 예종 급서에 충분히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심스럽다’와 ‘독살됐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역사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다. 다만 생각까지 멈출 필요는 없다.
그런데 한 가지는 또 생각해 볼 만하다.
만일 정희왕후가 오랫동안 권력을 잡는 것만을 원했다면 네 살짜리 제안대군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제안대군이 성년이 될 때까지 훨씬 오랫동안 수렴청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종 선택을 단순히 정희왕후 개인의 권력욕만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열세 살 자을산군이 조선 제9대 왕 성종이 됐다. 어린 왕을 대신해 할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한명회와 신숙주를 비롯한 원상들이 국정을 장악했다.
그리고 성종 즉위 직후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세조가 구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키웠던 신공신이자 종친세력의 마지막 핵심인 귀성군 이준까지 결국 조정에서 밀려났다. 성종 원년인 1470년 대신들 탄핵이 이어지면서 귀성군은 영해로 유배됐다.
남이는 죽고 귀성군까지 중앙정계에서 사라졌다.
세조 말년 만들어졌던 구공신과 신공신의 권력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다시 한명회와 신숙주를 중심으로 한 원로 훈신세력 세상이 된 것이다.
어린 성종은 그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성종은 할머니 정희왕후와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세력이 만들어놓은 꼭두각시 왕으로 평생을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성종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정희왕후와 원상들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성년이 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자기 정치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 정치사에 매우 중요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사림’이다.
후일 사림 거두가 되는 ‘김종직’은 이미 세조 때 관직에 나갔지만 성종 때에 이르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림계 인물들이 지방에만 머물지 않고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훈구세력 힘은 막강했다. 그러나 그동안 중앙 권력에서 한발 떨어져 있던 사림들이 점차 언론기관과 청요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3사에 근무하는 젊은 관료들)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조선 정치의 새로운 균열이 생겨났다.
'훈구'와 '사림'
앞으로 조선 정치사를 뒤흔들 거대한 대결의 씨앗이 성종 시대에 본격적으로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 씨앗은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거쳐 조선 정치지형 자체를 바꿔놓는다.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종이었다.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들의 힘으로 왕이 된 열세 살 소년.
그러나 성장한 뒤에는 오히려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 훈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한 왕.
성종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다.
다음 편에서는 어린 성종이 어떻게 훈구공신들의 품에서 벗어나 자기 정치를 시작했고,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들이 어떻게 중앙정계에 등장하게 됐는지 따라가 보겠다.
이어서 '성종 2'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두 번째 사진은 성종 상상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