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3 ㅡ조선을 완성한 성군, 그리고 그가 남긴 비극의 씨앗)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5
ㅡ 성종 3 ㅡ
(조선을 완성한 성군, 그리고 그가 남긴 비극의 씨앗)
'성종'은 이름 그대로 조선의 통치체계를 완성한 왕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8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왕위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정변과 대규모 내란도 거의 사라졌다.
물론 성종 대에도 여진을 상대로 한 북방 정벌이 있었으므로 외침이나 전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성종 중반부터 '연산군' 초기까지는 조선 전기에서도 보기 드물게 정치와 슬롯가 안정된 시기였다.
성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중앙 정계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림은 주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에 진출해 언론권을 강화하고 훈구 대신들의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를 비판했다.
특히 1478년(성종 9) 정비된 '홍문관'은 세조 때 사라진 집현전의 학문과 경연 기능을 상당 부분 이어받았다. 왕에게 경서를 강론하고 정바카라을 자문하는 기관이었지만 점차 언론 기능까지 강화하면서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의 한 축이 되었다.
성종이 사림을 적극적으로 등용한 것은 훈구대신들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권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림의 세력은 중앙정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1488년(성종 19)에는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폐지되었던 '유향소'가 다시 설치되었다.
유향소는 지방 양반들이 참여해 수령의 행정을 돕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질서를 유지하는 기구였다.
그러나 오늘날 지방자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지방자치는 주민들이 직접 대표자를 선출하지만 당시 향촌 자치는 지역 양반들이 주도하는 자치였다. 중앙정부의 간섭을 줄이고 지역슬롯 일을 스스로 처리한다는 점에서는 지방자치와 비슷했지만, 잘못 운영되면 토호 양반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백성을 압박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조정에서도 유향소 복설을 두고 논쟁이 치열했다.
‘향촌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주장과 ‘지방 토호들이 세력을 키워 수령과 맞서고 백성을 괴롭힐 수 있다’는 주장이 맞섰다.
그러나 성종 대에 사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결국 유향소는 복설 되었다.
이후 사림은 사마소·향약·서원 등을 통해 향촌슬롯에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해 나간다. 특히 향약과 서원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중종' 이후 사림의 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사림은 사상적으로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로 이어지는 성리학 학통을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와 그 과정에서 권력을 잡은 훈구세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훗날 사림의 영수가 되는 '김종직'이 처음 관직에 진출한 것도 세조 때였다.
세조가 사림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의도적으로 키웠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존 집현전 학자들을 대신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훗날 사림으로 성장할 인물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림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본격 성장한 것은 역시 성종 때였다.
'훈구파'도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연산군 이후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라는 네 차례 '사화'가 이어진다.
사림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까지 막지는 못했다. 몇 차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다시 일어난 사림은 결국 '선조' 때가 되면 조선 정치의 주류세력이 된다.
성종은 정치뿐 아니라 국가제도도 완성해 나갔다.
세조가 불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것과 달리 성종은 성리학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하면서 숭유억불 정바카라을 강화했다.
토지제도도 손질했다.
1470년에는 '관수관급제'를 실시했다.
관리들에게 지급된 토지에서 관리가 직접 농민에게 세금을 거두다 보면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이 거두는 폐단이 생겼다.
그래서 국가가 직전세를 직접 거두어 관리들에게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관리들의 과도한 수탈을 막고 국가의 재정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종의 가장 큰 업적은 '경국대전'을 완성한 것이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이었다.
지금의 헌법과 행정법·형법 등을 하나의 국가 기본법 체계로 묶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6전으로 구성되었고, 태조 이후 여러 왕대에 내려진 왕명과 법령을 정리해 국가통치의 기준으로 만들었다.
이후 조선의 관료와 6조는 경국대전을 기본으로 나라 일을 처리했다.
성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성종 때는 '동국통감'을 완성해 고조선부터 고려까지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단순한 연대기뿐 아니라 유교적 기준으로 역사 인물과 사건을 평가한 사론도 함께 실었다.
또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조선 전국 지리·행정·문화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국가 지리지도 발간했다.
시대 변화에 맞지 않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대전속록'도 편찬했다.
성종은 1475년 성균관에 '존경각'을 세워 서적을 보관하게 하는 등 학문과 교육도 적극 장려했다.
이렇게 해서 태조가 세운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본 틀은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다.
그래서 성종은 조선 역사에서 손꼽히는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학문을 좋아했고 경연에도 열심이었으며 정국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그런데 성종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도 있었다.
일을 열심히 한 만큼 노는 것도 좋아했다. 술과 풍류를 즐겼고 여색도 상당히 좋아했다.
가까운 종친이나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고 음악과 기생을 곁들이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성종을 두고 농담 삼아 이름 그대로 ‘성(性)종’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다.
'연려실기술'에는 훗날 연산군이 놀이와 향락에 빠진 것을 두고 성종 때부터 보고 들으며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기록까지 나온다.
그렇다고 연산군의 폭정을 단순히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산군 시대 비극의 씨앗 하나가 성종의 궁궐 안에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바로 '폐비 윤씨' 사건이었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는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였다. 그러나 공혜왕후가 젊은 나이에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후궁이었던 숙의 윤씨가 왕비가 되었다.
윤씨는 이미 성종의 장남인 원자, 훗날의 연산군을 낳은 상태였다.
그러나 왕비가 된 뒤 성종과 윤씨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다.
가장 큰 갈등 가운데 하나는 성종의 잦은 후궁 출입과 이를 둘러싼 윤씨의 심한 투기였다.
당시 왕이 여러 후궁을 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윤씨에게 그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윤씨는 성종과 후궁 문제로 자주 충돌했고, 결국 성종의 얼굴에 상처까지 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말 그대로 왕의 용안에 상처를 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원래부터 윤씨를 좋게 보지 않았다.
윤씨의 가문도 왕비 집안으로서는 그다지 강력한 편이 아니었다.
궁중에는 좋은 가문 출신 후궁들도 적지 않았다.
왕의 사랑을 둘러싼 경쟁과 왕비의 불안, 인수대비와 윤씨 사이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윤씨는 점점 궁궐 안에서 고립되어 갔다.
여기에 독약과 후궁들을 저주했다는 문제까지 거론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수대비와 후궁들의 영향이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사건과 궁중의 갈등이 겹치면서 성종은 결국 윤씨를 왕비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로 결심했다.
대신들 중에는 윤씨가 원자의 생모라는 점을 들어 폐출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1479년(성종 10), 윤씨는 끝내 폐비되어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당시 연산군은 불과 네 살 정도였다. 조선 건국 이후 왕비를 폐출한 첫 사례였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폐출된 지 3년 뒤인 1482년, 성종은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왜 굳이 죽이기까지 했을까?
성종은 당시 신하들에게 이런 취지로 말했다.
"폐비 윤씨의 죄가 크지만 처음에는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렸고 폐비한 뒤에도 목숨만은 살려두었다. 그러나 원자가 점점 자라고 있는 상황에서 훗날 윤씨의 존재가 정치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성종은 눈앞의 윤씨보다 훗날 왕이 될 원자와 왕실의 미래를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한때 자신의 부인이었고 자기 아들의 생모였던 여인을 죽인 것은 너무나 가혹한 결정이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를 죽인 뒤 어린 원자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후환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결국 생모 윤씨가 폐출된 끝에 사사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분노는 훗날 궁궐을 피로 물들인다.
1504년 벌어진 네 차례 사화 가운데 두 번째인 '갑자사화'였다.
물론 갑자사화를 단순히 연산군의 어머니에 대한 복수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성종 때부터 강해진 삼사의 언론권과 왕권의 충돌, 훈구와 사림의 대립, 연산군 자신의 권력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폐비 윤씨의 죽음이 갑자사화의 가장 강력한 감정적 불씨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조선의 통치체제를 완성한 성군 성종 궁궐 안에서 훗날 조선을 피로 물들일 비극의 씨앗도 함께 자라고 있었던 셈이다.
성종은 1494년(성종 25), 당시 나이 서른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한창 일할 나이였다.
시호는 강정(康靖), 능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宣陵)'이다.
성종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제도와 법을 완성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사랑해야 했던 가족 문제에서는 깊은 상처와 비극을 남겼다.
그리고 그 비극의 한가운데에는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있었다.
조선 왕실에서 가장 강한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인수대비.
다음 편에서는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이어서 인수대비 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