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1

예종 2 ㅡ 세조가 남긴 권력의 덫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1

ㅡ 예종 2 ㅡ

(세조가 남긴 권력의 덫)


앞편에서 '남이' 죽음을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스물여덟 안팎 젊은 무장 '남이'는 도대체 어떻게 병조판서라는 막강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귀성군 이준'은 어떻게 이십 대에 영의정이라는 조선 최고 벼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찾으려면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야 한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다.


먼저 예종 이야기를 조금만 되돌아보자.


예종은 1450년 '세종' 32년에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황(晄), 자는 평보(平甫)였다. 처음에는 '해양대군'에 봉해졌다. 본래대로라면 왕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위에 형 '의경세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경세자'가 1457년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훗날 우리가 잘 아는 '인수대비', 당시 '수빈 한씨'는 남편 '의경세자'를 잃고 어린 두 아들 '월산군'과 '자을산군'을 데리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훗날 '성종'이 된다.


'예종'과 '성종'.


조선전기 역사를 이해하려면

이 두 왕 사이에 놓인 왕실관계와 공신세력을 함께 봐야 한다.


예종은 역사에서 존재감이 그리 큰 왕은 아니다. 재위가 불과 1년 2개월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이 되기 전부터 그는 결코 가볍게 볼 인물이 아니었다.


실록은 예종을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학문에도 매우 열심이었던 세자로 기록한다. 세조가 병이 들자 정사를 함께 처리하게 했는데 일 처리가 밝고 합당하자 세조는 병석에서 "일을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내가 근심이 없다."라고까지 말했다.


적어도 세조 눈에 비친 세자는 앞으로 충분히 왕 노릇을 할 만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세자가 물려받을 조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리고 '예종'은 조선 왕들 가운데서도 매우 특이한 기록 하나를 남겼다. 세자시절 불과 열두 살, 만으로는 열한 살 무렵에 아버지가 된 것이다. 상당히 조숙했던 셈이다. 게다가 예종

첫 부인은 '한명회' 딸 '장순왕후' 한씨였다. 장순왕후는 1461년 아들을 낳았고, 이 아이가 훗날 '인성대군'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순왕후는 아들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어린 아들 역시 어머니를 따라가듯 1463년, 불과 두세 살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조선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인성대군은 예종 적장자였다. 더구나 외할아버지가 당시 조정 최고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명회였다. 예종이 1469년 스무 살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인성대군이 살아 있었다면 여덟 살 남짓이었다. 예종 적장자이자 세조 적통 손자였고, 막강한 한명회가 외할아버지였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왕위는 의경세자 둘째 아들 자을산군에게 돌아갔고, 그가 바로 조선 제9대 왕 '성종'이다. 생각해 보면 조선 역사 커다란 갈림길 하나가 어린아이의

죽음에서 시작된 셈이다. 인성대군이 살아 있었다면 성종은 왕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성종시대 정치도, 연산군 등장도, 그 이후 조선 역사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는 때로 거대한 전쟁이나 정변이 아니라 한 아이 너무 이른 죽음 때문에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가기도 한다.


세조는 강한 왕이었다.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잡고 결국 조카 '단종'에게서 왕위까지 넘겨받은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자신 왕위를 만들어준 공신들이 생겨났다.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세조시대 공신들은 단순한 신하가 아니었다. 정권탄생을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세조는 이들을 크게 우대했다.


술을 좋아했던 세조는 공신들과 자주 술자리를 함께했고, 때로는 왕과 신하 사이를 넘어 오랜 동지처럼 지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태종 이방원'과 세조의 차이가 보인다.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자신을 도운 공신은 물론 외척까지 가차 없이 제거했다. 반면 세조는 자신과 함께 권력을 만든 공신들을 정치중심에 오래 남겨두었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두 왕의 권력관리 방식이 달랐고, 그 결과 다음 왕이 물려받은 정치 환경도 달라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명회, 신숙주 같은 공신들 힘은 점점 강해졌다.

왕도 강했지만 왕 주변 공신들 역시 강해져 갔다.


바로 그때 세조 몸에 병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후대에는 여러 야사가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현덕왕후 권씨' 저주다.


'현덕왕후'는 '문종' 왕비이자 '단종' 친어머니였다. 야사에는 세조가 꿈에서 현덕왕후를 만났는데, 그녀가 아들을 죽인 원한으로 저주하며 세조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피부병이 생겨 온몸으로 번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더구나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먼저 죽었다. 그러니 단종을 죽인 저주 때문에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식 이야기는 시간상으로도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야사가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생각해 볼 만하다.


나는 야사를 무조건 허황된 이야기로만 보지는 않는다.

야사가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 시대와 인물을 어떤 감정으로 기억했는지를 보여줄 때가 있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에게 하늘의 벌이 내려졌으면 좋겠다는 민간의 도덕적 감정이 '현덕왕후 저주'라는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역사는 기록만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기억과 원망, 연민 속에서도 남는다.


실제로 세조가 말년에 여러 질병으로 고생한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그 병을 현덕왕후 저주와 연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대 이야기다.


그렇게 세조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세자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467년 세조 13년, 조선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 터졌다.


'이시애의 난'이다.


'이시애'는 함길도 길주를 기반으로 한 지역 토착세력이었다.


당시 함길도 북부지역은 한양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오랫동안 지역 출신 사람들이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세조'가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중앙에서 관리들을 직접 파견하는 일이 늘었다. 지역 토착세력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누리던 권한과 기반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호패법 강화와 중앙의 통제 역시 불만을 키웠다. 오늘날 지방자치와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조금 과장해 비유한다면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조정과 기존 권한을 지키려는 지방 토착세력이 충돌한 것이다.


1467년 5월.


이시애는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아주 교묘한 술수를 썼다. 조정에는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 등 중앙 중신들과 손잡고 모반하려 했기 때문에 먼저 제거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자신은 반란군이 아니라 오히려 반역자들을 제거한 충신이라는 주장이었다. 함길도 백성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퍼뜨렸다.


'중앙의 간신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으니 자신들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세조는 한명회와 신숙주가 실제 반역에 가담했다고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일단 잡아 가두었다.


신숙주와 그의 아들들, 한명회 등이 의금부에 갇혔다.


세조는 당시 한명회와 신숙주가 백관의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 자체에도 바카라임이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왕을 만든 최고의 공신들이 하루아침에 죄수 신세가 된 것이다.


얼마 뒤 두 사람은 풀려났다.

세조는 그들 손을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다시 국사를 논하게 했다.


결국 숙청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세조와 구공신들 사이에 예전과는 다른 긴장이 생겼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시애의 난 뒤 귀성군 이준과 남이·강순·어유소 등 새로운 공신들이 대거 부상하면서 세조 말 조정의 권력구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조가 처음부터 치밀하게 '구공신을 몰아내고 젊은 세력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흘러갔다.


한명회와 신숙주가 구금되어 있는 사이, 그들을 대신해 반란을 진압할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 중심에 귀성군 이준이 등장한다. 귀성군 이준은 세종 넷째 아들 임영대군 아들이었다.

세조에게는 친조카였다.


나이도 서른이 되지 않았다.


그런 젊은 왕족에게 세조는 반란 진압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귀성군 이준을 함길·강원·평안·황해 네 도의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 전체를 지휘하게 했다.


그 아래에는 '조석문',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같은 인물들이 포진했다.


조선의 새로운 군사지도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남이었다.

앞편에서 자세히 이야기했듯 남이 역시 젊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만큼은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토벌군은 처음부터 쉽게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함길도는 지형이 험했고 반란군은 지역사정에 익숙했다. 게다가 '이시애'는 북방 토착세력과 주민들을 끌어들여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세는 관군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허유례' 등이 반란군 내부로 들어가 이시애와 동생 '이시합'을 붙잡았고, 난은 약 넉 달 만에 평정됐다.


1467년 8월.


'이시애의 난'은 끝났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또 다른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세조는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대대적인 포상을 했다.


'귀성군 이준', '강순', '남이', '어유소' 등이 적개공신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정인물 구성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특히 귀성군 이준에 대한 세조 신임은 대단했다.


실록은 귀성군을 두고

'사람됨이 침착하고 그릇이 노성 하며 활을 잘 쏘았다.'라고 기록한다.


젊었지만 행동은 신중하고 노련했다는 뜻이다.


세조는 그런 귀성군을 가까이 두고 크게 아꼈다.


결국 1468년 7월, 아직 이십 대였던 귀성군 이준을 영의정에 앉힌다. 아버지 임영대군조차 놀라 "아들이 어리고 어리석으니 수상 자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라며 거두어달라고 청했지만 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남짓 뒤인 1468년 8월 23일. 이번에는 남이를 병조판서에 앉혔다.


스물여덟 안팎의 영의정.

스물여덟 안팎의 병조판서.

조선 역사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파격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십 대 총리와 이십 대 국방장관이 동시에 등장한 셈이다.


그만큼 세조 말 조정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정권 중심에 있던 한명회, 신숙주 같은 공신들이 한쪽에 있었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을 통해 급부상한 '귀성군 이준', '남이', '강순' 같은 새로운 공신들이 다른 한쪽에 등장했다.


나는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세조 말 조정은 단순히 늙은 공신 몇 사람과 젊은 장수 몇 사람의 경쟁이 아니었다. 왕권 주변 힘 배치가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이 모든 변화를 만들어놓은 세조에게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몸은 이미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세조는 자신이 만든 새로운 권력구조를 끝까지 정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더구나 세조는 기존 공신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한명회도 살아 있었다.

신숙주도 살아 있었다.

조정운영 경험과 인맥, 정치력에서 이들은 누구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반대편에는 군공을 바탕으로 단숨에 최고 권력층으로 올라온 젊은 공신들이 있었다.


귀성군 이준은 왕실 종친이면서 영의정이었다. 남이는 젊은 나이에 병권을 쥔 병조판서였다.

그리고 그 모든 세력 위에 이제 왕이 되어야 할 세자가 있었다.


아직 열아홉이었다.

세조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아들 주변에 배치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왕이 된 '예종'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왕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노회 한 구공신들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각별히 총애하던 젊은 영의정과 젊은 병조판서 역시 결코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특히 왕실의 가까운 종친이면서 군공과 명망까지 갖춘 귀성군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인물이었다. 남이 역시 강한 자부심을 가진 젊은 무장이었다.


실제로 훗날 '성종실록'에 실린 '한계희' 졸기에는 당시 귀성군이 종실인데 금병을 맡고 있고, 남이는 성격이 거칠어 병권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한계희가 세조에게 비밀리에 아뢰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그러니까 세조가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안정된 권력구조가 아니었다. 강한 힘을 가진 여러 세력이 한 조정 안에 함께 들어앉아 있는 구조였다.


어쩌면 젊은 예종에게 그것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였을지도 모른다.


1468년 9월.


병세가 깊어진 세조는 결국 세자에게 왕위를 넘겼다. 열아홉 살 예종이 조선 제8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세조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젊은 왕 앞에는 두 세력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노회 한 구공신들.


그리고 아버지가 말년에 파격적으로 끌어올린 젊은 신공신들.


둘 다 아버지 세조가 만들어놓은 사람들이었다.


예종은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사실 우리는 앞편에서 이미 그 답 하나를 보았다.


왕위에 오른 바로 그날,

남이는 병조판서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불과 한 달여 뒤,

'유자광'의 고변이 터진다.

남이는 역모죄인이 되어 죽었다.

유자광은 공신이 되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를 비롯한 기존 공신들은 여전히 조정 중심에 남았다.


세조가 말년에 만들어놓은 새로운 권력구도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시애의 난'을 단순한 지방반란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 난은 귀성군 이준과 남이를 조선 최고권력층으로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동시에 기존 구공신들과 새로운 신공신들이 한 조정에서 맞부딪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복잡한 권력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이 열아홉 왕 예종이었다.


아버지 세조가 남긴 사람들.

아버지 세조가 남긴 권력.

아버지 세조가 남긴 갈등.


그것은 어린 왕에게 든든한 울타리였을까? 아니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권력의 덫이었을까?


이제부터가 진짜 '예종' 이야기다.

'예종 3'편으로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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