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2 ㅡ 훈신의 왕에서 자신의 왕으로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4
ㅡ 성종 2 ㅡ
(훈신의 왕에서 자신의 왕으로)
한명회는 자신 셋째 딸을 ‘예종’ 세자빈으로 들여보냈다. 훗날 추존된 ‘장순왕후’다. 그러나 장순왕후는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 아들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역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한명회 막내딸이 ‘소혜왕후 한씨’, 훗날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과 혼인했다.
두 집안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정략혼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이었다.
훗날 ‘공혜왕후’가 되는 이 여인 역시 오래 살지 못했다. 1473년부터 병을 앓기 시작해 친정인 한명회 집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병이 다시 악화되었고, 결국 1474년 창덕궁에서 열아홉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과 공혜왕후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한명회는 두 딸을 예종과 성종 왕비로 들여보내 왕실과 이중으로 혼맥을 맺었지만 장순왕후에 이어 공혜왕후까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 혼맥은 후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왕실 외척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이어가려 했던 한명회에게 딸들의 이른 죽음은 정치적으로도 큰 손실이었다.
'만약 장순왕후 아들 인성대군이 일찍 죽지 않고 무사히 성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성대군은 1461년에 태어나 1463년에 죽었으니, 살아 있었다면 예종이 죽은 1469년에 여덟 살 안팎이었다.
예종 적장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한명회와 예종 왕실 관계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 아이 이른 죽음이 훗날 조선 왕위 계승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은 셈이다.
1469년 예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예종에게는 또 다른 어린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고, 소혜왕후에게는 자을산군과 형 월산군이 있었다.
그러나 왕위는 자을산군에게 돌아갔다.
정희왕후는 예종 죽은 바로 그날, 4살밖에 안 된 제안대군이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몸이 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자을산군을 선택했다.
물론 이것이 공식적인 이유다.
그러나 자을산군이 한명회 사위였고, 어머니 소혜왕후 역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왕실 핵심 인물이었던 점까지 생각하면 당시 왕위 계승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 최고권력가 한명회와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야심이 있는 소혜왕후와의 전략혼인은 앞편에서 살펴본 예종 독살설까지 여기에 끌어들여져 여러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살설은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가설이다.
그렇게 열세 살 어린 왕이 즉위한다.
그가 조선 제9대 왕 '성종'이다.
성종 즉위는 정희왕후와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세력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어린 성종 재위 초반 정국은 자연스럽게 훈신들이 주도했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세조 때부터 권력을 장악해 온 공신들이 원상으로 국정에 깊숙이 참여했다.
성종과 혼인한 공혜왕후 이른 죽음으로 한명회 왕실 외척으로서 입지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고권력가로서 입지는 변함이 없었다.
어린 성종으로서는 아직 그들의 힘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서두르지 않았다.
왕좌에 앉아 있었지만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린 왕도 성장했다.
1476년 성종이 스무 살이 되자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들은 극구 만류했다. 정희왕후가 물러나고 성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하면 자신들 영향력이 줄어들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성종 역시 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 냉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승지를 보내 만류하고 직접 다시 청하려 하는 등 여러 차례 정희왕후를 붙잡았다.
그러나 정희왕후 뜻은 확고했다.
정희왕후는 이미 성종이 장성했고 학문도 충분히 익혔으니 더 이상 자신이 국정을 대신할 명분이 없다고 보았다. 당시 외척과 훈신을 지나치게 비호한다는 비판도 정희왕후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성종은 수렴청정 종료를 받아들인다.
'성종실록'에는 성종의 당시 심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금년 정월 13일에 삼가 의지를 받았는데, 내가 나이 장성하고 학문이 성취되었다고 해서 군국의 모든 정무를 나 혼자 결단에 맡긴다고 하셨다. … 이에 마지못해서 지금부터는 무릇 국가의 모든 정사를 내 뜻으로써 결단하고 다시는 대왕대비에게 아뢰어 처결하지 않을 예정이다.]
ㅡ 성종실록 권 63, 성종 7년 1월 13일 ㅡ
이제 성종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성종은 훈신들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성종은 친정을 시작한 뒤 원상들에게 의존하던 국정 운영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원상제 역시 점차 정리되면서 성종은 자신의 판단으로 인사와 정국을 이끌어갈 공간을 넓혀갔다.
사실 이 무렵에는 훈신들 흐름도 바뀌고 있었다. 세조와 예종, 성종 초까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훈신들은 하나둘 늙거나 세상을 떠났다. 구치관, 최항,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 세조 시대를 떠받치던 대표적인 공신들이 차례로 사라졌다.
이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구공신 가운데 한명회와 정창손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도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성종과 한명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1481년 일어난 ‘압구정 사건’이다. 당시 한명회는 자신의 정자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려 했다. 그러면서 장소가 좁다며 국가가 보유한 큰 장막을 설치하게 해달라고 성종에게 요청했다.
성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장소가 좁으면 왕실 정자인 '제천정'에서 잔치를 열면 될 일이라며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한명회는 기분이 상했던지 부인 병을 이유로 제천정 잔치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이 전해지자 대간이 들고일어났다. 왕명을 가볍게 여기고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성종 역시 한명회의 태도를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결국 한명회는 국문을 받았고 파직되었다.
물론 이 사건 하나로 한명회 정치 생명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이후에도 국정에 참여했고 1487년 죽을 때까지 원로대신으로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압구정 사건은 분명 상징적이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 예종, 성종 세 왕에 걸쳐 최고권력을 누려온 한명회조차 이제 왕 앞에서 예전처럼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한명회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동시에 세조 이후 구공신들이 정국을 독점하던 정치질서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종은 훈신들 힘으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다운 왕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그 훈신들 품에서 벗어나야 했다.
성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사람들에게만 계속 의존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기존 훈신들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정치를 함께할 새로운 인재들이 필요했다.
바로 이때 등장하는 사람들이 '사림'이다.
사림은 지방향촌에 기반을 두고 학문을 닦으며 성장한 사족 출신 선비들이었다.
그 중심에 ‘김종직’이 있었다.
김종직은 이미 세조 때 중앙 관직에 진출했지만 성종 때 더욱 중용되었다.
특히 성종 중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이들의 진출은 더욱 두드러졌다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김종직 문하 젊은 선비들이 성장하면서 훗날 '사림파'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세력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들의 등장은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세조 시대를 지배했던 공신 중심 정치에서 학문과 명분을 앞세운 새로운 선비 정치세력이 중앙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오래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한다.
'훈구'와 '사림'.
이 두 정치세력의 충돌은 훗날 조선정치사를 뒤흔드는 거대한 파도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파도의 한가운데에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서게 된다.
이어서 성종 3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