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3ㅡ 스무 살 왕의 개혁과 너무 빠른 죽음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2
ㅡ 예종 3ㅡ
(스무 살 왕의 개혁과 너무 빠른 죽음)
앞편에서 '세조'가 죽으면서 젊은 '예종'에게 어떤 권력구조를 남겨주었는지 살펴보았다.
한쪽에는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해 '세조'와 함께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온 구공신들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이시애의 난'을 거치며 급부상한 '귀성군 이준', '남이' 같은 젊은 신공신들이 있었다.
왕위에 오른 '예종'은 그 가운데 '남이'를 즉위 당일 날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이의 옥'을 직접 국문해 '남이'와 '강순'을 죽였다.
그렇다면 예종은 결국 '한명회', '신숙주' 같은 구공신들의 손을 들어준 왕이었을까?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이의 옥'이 끝난 뒤 예종 행보를 따라가 보면 의외의 모습이 나타난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왕이 구공신들을 포함한 권세가들의 특권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예종은 즉위 초부터 아버지 세조가 남긴 '원상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최항', '홍윤성', '조석문', '김질', '김국광' 등 세조시대 원로대신들이 원상이 되어 승정원에 나와 주요 정사를 의논하고 처리했다.
어린 왕 혼자 모든 정치를 이끌기 어려우니 아버지 세조가 남겨둔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
예종이 이들의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세자 시절부터 이미 아버지 대신 정사를 처리해 본 경험이 있었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기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에서도 예종이 원로대신들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분경금지'였다.
'분경(奔競)'이라는 말이 조금 어렵다. 쉽게 말하면 벼슬을 얻거나 승진하기 위해 권력자 집을 찾아다니며 청탁하는 것이다.
권력이 몇몇 대신들에게 집중되면 사람들이 왕이나 공식 인사기구 보다 그 대신들 집으로 몰려간다.
'저 사람에게 부탁하면 벼슬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사권은 형식적으로는 왕에게 있어도 실제 권력은 권세가들 집으로 흘러간다. 예종은 이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즉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468년 10월 4일, 예종은 벼슬을 청탁하기 위해 권세가에게 접근하거나 마음대로 인사에 개입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처벌하라고 명했다.
처음에는 종친이나 공신이라도 적발되면 일족까지 처벌하겠다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다. 대신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리자 그제야 '족주'를 '극형'으로 낮추었다.
그래도 엄청난 조치였다.
그리고 말로만 끝내지도 않았다.
10월 19일 예종은 선전관들을 종친과 고위대신들 집으로 불시에 보냈다. 그 결과 신숙주 집에서 한 사람이 붙잡혔다. 우의정 '김질' 집에서도 사람이 붙잡혔다.
놀랍게도 앞편에서 이야기했던 영의정 출신 '귀성군 이준' 집에서도 적발됐다.
'박중선', '성임'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예종'이 단순히 한명회 집에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권세가 집을 찾아다니며 인사 청탁을 하는 분경 자체를 막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구공신과 신공신, 종친을 가리지 않았다.
이것은 젊은 왕이 보내는 분명한 신호였다.
'벼슬은 권신들의 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국가의 공식 인사제도에서 나와야 한다.'
왕권강화 정바카라이었다.
동시에 권력형 인사청탁을 막으려는 개혁이기도 했다.
예종은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던 '대납'에도 칼을 댔다.
당시 세금이나 공물을 백성 대신 권세가들이 먼저 국가에 내주고 나중에 백성에게 더 많은 값을 받아내는 폐단이 있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장사였다. 하지만 백성에게는 고리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1468년 10월 16일.
예종은 직접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대납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신, 종친, 재추를 막론하고'
극형에 처하고 재산까지 몰수하라고 했다. 왕족이라고 봐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공신이라고 봐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최고 대신이라고 봐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흘 뒤에는 지방관들이 백성에게 함부로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것 역시 도둑과 다르지 않다며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명령까지 내렸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대납'은 이미 슬롯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고, 몇 달 뒤에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일부 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방향만큼은 분명했다.
예종은 공신과 종친의 특권에 손을 대고 있었다. 직전의 세금을 규정보다 더 걷는 폐단도 억제하고, 권력자들 수조권 행사를 제한하려 했다.
또한 외교에서도 범상치 않았다.
부산포·제포·염포 등 삼포에서 일본인과 이루어지던 '개인 간 사무역을 금지'했다. 밀무역과 무질서를 통제하고 국가가 대외교역을 관리하려는 조치였다.
또 한 가지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 '둔전'이 여러 말썽을 일으키자 예종이 농민 반발을 무마하고 둔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실시된 것이 '병작경영'이었다. 농민으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고, 수확을 국가와 경작자가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처럼 예종은 짧은 재위였지만 예종은 치적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는 예종을 '남이를 죽인 어린 왕' 정도
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예종은 언관들이 자기 뜻과 부딪치면 강하게 억누르기도 했다. 그리고 '남이의 옥' 뒤에는 오히려 '신숙주', '한명회', '유자광' 등을 익대공신으로 바카라봉했다.
한명회를 완전히 몰아내지도 않았다. 중요한 국사를 논의할 때 계속 불러 의견을 들었다.
그러니까 '예종 대 한명회'를 선과 악, 개혁과 수구의 단순한 대결로 보는 것도 맞지 않는다.
예종은 구공신들의 능력과 정치 경험은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왕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나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종 어머니 정희왕후는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정희왕후는 결코 평범한 왕비가 아니었다. 남편은 세조였다.
계유정난부터 왕위 찬탈, 사육신 사건, '단종' 죽음까지 격랑의 정치 한복판을 함께 통과한 여인이었다.
훗날 손자 '성종'이 즉위하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 여성 정치인이기도 했다.
때문에 예종 때부터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아들을 움직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예종 때 공식적인 수렴청정은 없었다. 조선에서 제도적인 수렴청정이 시작되는 것은 훗날 어린 '성종'이 즉위한 뒤였다.
예종은 이미 세자 때부터 정치 경험이 있었고 직접 정사를 처리했다. 물론 왕실의 중요한 문제에서는 어머니 정희왕후와 상의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어머니 뜻대로 처리하는 아들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종이 정희왕후 말을 듣지 않아 두 사람이 크게 싸웠다.'
라고까지 쓰면 기록보다 너무 앞서간다. 하지만 정희왕후와 예종의 정치적 성향과 이해가 언제나 같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예종은 스스로 국정을 장악하려 했고, 정희왕후는 왕실 안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모자 사이지만 정치적 긴장이 생길 가능성은 충분했다. 다만 실록에는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뚜렷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예종과 정희왕후 사이에서 반드시 살펴봐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수빈 한씨'. 훗날 '소혜왕후', 우리가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인수대비'다.
남편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죽으면서 왕비가 될 길이 막힌 여인이다. 예종은 그녀에게 시동생이었다. 소혜왕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이 '월산군'.
둘째가 '자을산군'.
훗날 '성종'이다.
그런데 이 자을산군이 1467년, 아직 세조가 살아 있을 때 당대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한명회 딸과 혼인한다.
실록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1467년 1월 12일,
'자을산군이 영의정 한명회의 딸을 친영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기막힌 인연이 하나 있다. 한명회 또 다른 딸은 이미 예종 첫 번째 부인이었다.
'장순왕후 한씨'다.
예종이 세자이던 시절 혼인했지만 아이를 낳은 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한명회는 먼저 예종 장인이 되었다가 다시 '의경세자' 둘째 아들 '자을산군' 장인이 된 것이다.
대단한 정치적 인연이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소혜왕후가 훗날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미리 한명회와 손을 잡은 것은 아닐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나 역시 <조선의 아이돌> 소설에서 그렇게 그렸다.
그러나 역사 글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실록은 자을산군과 한명회 딸이 혼인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지만 소혜왕후가 장차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이 혼인을 기획했다라고 기록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당시에는 예종이 살아 있었고 예종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1467년 시점에서 자을산군이 왕이 될 것을 미리 예상해 혼인을 추진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종 독살설이 나오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이 혼인의 정치적 의미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남편을 잃고 왕실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수빈 한씨 입장에서 당대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 집안과 둘째 아들을 혼인시키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안전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과 2년 뒤 예종이 갑자기 죽으면서 그 혼인이 왕위계승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명회 관련 설명에서도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다는 사실이 그의 왕위계승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는 참 묘하다. 혼인할 당시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관계가 몇 년 뒤 나라 임금을 결정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1469년.
예종의 정치가 점점 자기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분경을 계속 단속했다.
공신들 특권을 제한하려 했다.
백성에게 부담을 주는 수취폐단을 손보려 했다. 삼포 사무역을 금지시켰다. 둔전을 농민들도 경작하게 했다. 세조 때부터 편찬하던 '경국대전'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1469년 9월에는 '경국대전'을 올렸고, 그해 11월에는 다음 해 정월부터 시행하도록 명하기까지 했다.
예종이 조금만 더 살았다면 경국대전 반포는 성종 치적이 아니라 예종 치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종 자기 정치가 막 시작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족질'이라는 병이 들었다.
1469년 11월 18일.
예종은 승정원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족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체된 일이 없느냐?'
발에 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무사들에게 활쏘기를 시험하고 문사들에게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역사를 물어 인재를 뽑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죽음을 앞둔 중환자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도 국정 관련 기록이 이어진다.
그리고 열흘 뒤.
1469년 11월 28일 아침.
스무 살의 예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재위 불과 1년 2개월 남짓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머니 정희왕후 반응이다.
예종이 죽은 직후 정희왕후는 대신들에게 말했다.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 하였으므로 병이 중하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는가 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조차 아들 병이 죽음에 이를 만큼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후대 사람들에게 의문이 생길 만도 했다.
'스무 살 젊은 왕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죽을 수 있었을까?'
바로 여기에서 '예종 독살설'이 나온다. 생각해 보면 의심을 품을 만한 정치적 정황은 있다.
예종은 분경을 금지하며 권세가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공신과 종친의 대납 특권에도 칼을 댔다.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리고 갑자기 죽었다. 더구나 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사람은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이었다.
그러니 후대에 '혹시 한명회나 구공신 세력이 예종을 제거한 것은 아닐까?'
'정희왕후도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드시 선을 그어야 한다. 이것을 입증하는 기록은 없다. 실록에는 예종이 독살되었다는 기록도 없고 누군가 독을 썼다는 수사 기록도 없다.
정확한 사인이 무엇인지조차 지금으로서는 확정할 수 없다.
따라서 '독살설'은 어디까지나 후대에 제기된 하나의 의혹이다.
또는 '복상사설' 이야기도 나온다.
예종이 열한 살에 자녀를 둘 만큼 성에 조숙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이 또한 야사에는 나오지만 공식기록에는 전혀 없는 이야기이다.
나는 역사 글에서는 여기까지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만 독살설이 왜 생겨났는지를 이해하려면 예종 죽음 직후 벌어진 일을 볼 필요가 있다.
성종 즉위 과정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예종이 죽은 그날.
하루가 지난 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날 새로운 왕이 정해졌다.
또한 예종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제안대군'이다. 그러나 겨우 네 살 안팎이었다. 그러면 다음 후보는 죽은 '의경세자' 큰아들 '월산군'이었다. 그런데 '월산군'도 선택되지 않았다.
정희왕후가 대신들에게 물었다.
'누가 주상자가 되어야겠는가?'
대신들은 자신들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며 정희왕후에게 결정을 돌렸다. 그러자 정희왕후가 말했다.
"원자는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어려서부터 병이 있었으며, 자을산군은 비록 어리지만 세조가 그 도량을 칭찬한 적이 있으니 그를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대답했다.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렇게 자을산군이 선택됐다.
더 놀라운 장면도 있다.
신숙주, 한명회 등이 군사들을 보내 자을산군을 데려오려고 했는데 아직 정식으로 명령하기도 전에 자을산군은 이미 궁궐에 들어와 있었다.
실록에 그대로 적혀 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자을산군은 경복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다.
왕이 아침에 죽고 그날 새로운 왕이 결정되어 즉위한 것이다.
너무 빠른 왕 즉위였다.
그렇다면 왜 정희왕후는 그렇게 서둘렀을까?
이것을 곧바로 음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왕이 갑자기 죽으면 가장 위험한 것이 권력공백이다.
더구나 당시 왕실에는 네 살 어린 원자도 있었고 월산군, 제안대군 귀성군 같은 여러 종친이 있었다.
왕위가 비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정치적 혼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왕실 최고 어른인 정희왕후 입장에서는 후계자를 빨리 확정하는 것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법이었을 수 있다.
실제로 그녀가 밝힌 이유도 분명했다.
제안대군은 너무 어렸다.
월산군은 병약했다.
자을산군은 세조가 일찍이 그 그릇을 높이 평가했다.
충분히 설명 가능한 이유다.
하지만 정치에는 명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사위였다. 그리고 새 왕은 불과 열세 살이었다.
어린 왕이 즉위하면 누군가는 대신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
결국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원상들이 다시 국정 중심에 선다.
결과만 놓고 보면 예종이 견제하려 했던 원로공신들에게는 훨씬 유리한 정치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성종의 너무 빠른 즉위를 연결해 여러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황이 흥미롭다'와 '독살이 사실이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 선은 분명히 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성종을 왕으로 정한 뒤 신숙주 등이 정희왕후에게 직접 정사를 돌봐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정희왕후는 처음에는 사양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한다.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지만 수빈은 문자도 알고 사리에도 통달하니 국사를 다스릴 만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빈이 바로 소혜왕후, 훗날 인수대비다.
즉 정희왕후가 며느리에게 정치를 맡기는 방안까지 입에 올린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계속 정희왕후에게 청정을 요구했고 결국 정희왕후가 정사를 맡게 된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남편 의경세자를 잃고 한때 왕비의 꿈까지 사라졌던 소혜왕후도 이제 완전히 다른 위치에 선다.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우리가 잘 아는 '인수대비'가 된다.
나는 예종을 공부할수록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재위 기간은 1년 2개월 남짓이었다. '남이의 옥'이라는 큰 과오도 남겼다. 왕권강화를 위해 언관을 지나치게 억누른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권신들의 집으로 몰려다니는 인사청탁을 막으려 했다.
공신과 종친이 백성을 상대로 이익을 챙기는 '대납'을 엄하게 금했다. 토지세 수취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다. 경국대전 시행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세조가 남긴 거대한 공신정치 속에서 자기 왕권을 만들어보려고 했다.
그런 정치가 이제 막 시작되려던 순간, 스무 살 왕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날이 지나기도 전에 왕은 바뀌었다.
예종에서 성종으로.
그 순간 조선 정치의 중심에는 다시 정희왕후,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원로세력이 자리하게 된다.
그것이 치밀하게 준비된 정치적 선택이었는지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 앞에서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내린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기록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예종이 독살당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예종 죽음은 단순히 젊은 왕 한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 권력지도를 다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그 변화 한복판에
정희왕후, 한명회, 소혜왕후 그리고 열세 살의 자을산군이 있었다.
이제 조선은 '성종의 시대'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시대에 조선 정치사의 또 다른 거대한 세력,
'사림'이 서서히 중앙 정치 무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예종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조선 정치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어서 '성종'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