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9 (번외 편)

<조선 오백 년 당쟁과 정치사 강의안>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9 (번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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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담양에서 작은 역사 모임 회원들을 모시고 역사 강의를 합니다.


도의원 시절 정치 강의는 여러 번 했지만, 순수한 역사 강의는 사실상 처음입니다.


주제는 ‘조선 당쟁사’​입니다.

복잡해 보이는 조선정치사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정리해 봤습니다.


지금 현실 정치와 겹쳐 보이는 대목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였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어디에서도 듣기 힘든, 쉽고 명쾌하면서도 재미있는 내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강의안을 제대로 이해하면 조선정치사 큰 흐름과 당쟁사를 상당 부분 꿰뚫어 볼 수 있고, 사극 드라마도 훨씬 깊고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역사 보약 한 사발 마신다’ 생각하시고 끝까지 한번 읽어보십시오.


한국사 공부에도 꽤 도움이 될 거라 장담합니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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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 년 당쟁과 정치사 강의안>


1. 붕당은 왜 생겼고, 왜 갈라졌으며, 결국 어디로 갔는가?


당쟁은 조선을 망친 싸움이었을까?


여러분,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정치를 보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내부에서 서로 싸우고 갈라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특히 선거나 공천 같은 중요한 정치일정이 다가오면 같은 당 안에서도 생각과 이해관계가 달라지면서 갈등이 더 심해지곤 합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오래전부터 이런 말도 합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


물론 이것을 어느 한쪽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법칙은 아닙니다. 진보도 부패할 수 있고 보수도 얼마든지 분열합니다.


다만 정치세력이 왜 갈라지고, 한번 갈라진 세력은 왜 다시 또 갈라지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치라는 것은 원래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슬롯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현실정치에서는 오히려 정치 때문에 사람들이 갈라지는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던 사람들마저 권력을 잡고 나면 서로 싸우고, 같은 당에 있던 사람들이 또 갈라져 새로운 세력을 만들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정치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정치적 분열과 결합, 다시 분열하는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입니다.


조선 오백 년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훈구와 사림에서 시작해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끊임없이 갈라집니다.


처음에는 사람과 인사문제로 갈라졌던 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학문과 철학, 지역과 가문, 왕권과 신권 문제까지 얽히면서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발전합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그렇게 어렵게 외웠던 바로 그 ‘조선당쟁사’입니다.


이것만 외우려니까 학창 시절 당쟁사가 죽어라고 재미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외우지 마십시오.


왜 갈라졌고, 무엇을 놓고 싸웠으며, 그 싸움이 어떻게 조선정치의 흐름을 바꾸었는지를 사람 이야기하듯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 흐름만 잡고 나면 복잡하게만 보였던 조선 오백 년 당쟁사가 의외로 아주 쉽게 정리될 것입니다.


조선당쟁은 사람과 권력만의 싸움도 아니었고, 철학과 이념만의 싸움도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권력, 제도와 학문, 왕권과 신권, 가문과 지역이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진 정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합니다.


조선시대 붕당은 오늘날 정당과 똑같은 조직이 아닙니다. 당사도 없고 당대표도 없고 당원 명부도 없었습니다. 학맥과 혼맥, 지역적 기반, 정치적 이해와 사상적 입장이 결합된 정치집단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조선 당쟁은 오늘날 현실정치와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강의를 잘 들어두시면 요즘 현실정치도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식의 설명이 매우 강했습니다.


실제 붕당정치가 후기로 갈수록 극심한 정쟁과 보복으로 변질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붕당정치를 무조건 망국적 당쟁으로만 보는 시각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의 이른바 ‘당파성’을 강조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논리도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에는 붕당정치를 상호 견제와 공론정치의 측면에서도 함께 살펴봅니다.


그러니까 오늘 강의에서는 붕당을 처음부터 나쁜 것으로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름다운 정치라고 미화하지도 않겠습니다.


왜 생겼는가?

처음에는 어떤 기능을 했는가?

왜 점점 격렬해졌는가?


이 세 가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2. 훈구와 사림 ― 당쟁 이전 정치


조선초기 정치세력을 이해하려면 먼저 '훈구'와 '사림'을 알아야 합니다.


훈구라고 하면 흔히 한명회, 신숙주 같은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건국 이후 여러 공신 집단이 있었고, 특히 세조 집권을 거치면서 공신과 고위관료를 중심으로 막강한 정치세력이 형성됩니다. 후대 역사학에서는 이들을 대체로 훈구세력이라고 부릅니다.


조금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부터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정도전과 조준 등은 훗날 훈구세력으로 이어지는 계통의 선조 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정몽주를 비롯한 인물들과 그 학통을 이은 선비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방으로 내려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조선전기 지방 사림세력 성장의 한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리학을 공부하고 향촌에서 제자를 기르며 도덕과 명분을 중시했던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대표적입니다.


김종직은 세조 때부터 관직생활을 했지만 사림세력이 본격적으로 중앙정치 한 축으로 성장한 것은 성종 때입니다.


성종은 기존 훈구세력을 견제하면서 김종직 계열 신진사림을 등용했고, 이들은 주로 삼사와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기존 권력층을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기존 권력자가 볼 때 사림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맨날 임금 앞에서


“그것은 아니되옵니다.”


“대신의 처사가 옳지 않사옵니다.”


하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림 입장에서는 훈구가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공신이라는 이름으로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는 기득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충돌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네 차례 사화가 여기서 발생하게 됩니다.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


오늘은 당파이야기이니 사화이야기는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시절 김종직 조의제문 사건으로 일방적으로 사림이 피해를 봤습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폐모 된 윤씨에 대한 복수극이었습니다.

이때는 훈구파도 같이 피해를 봅니다. 대표적 훈구파 한명회가 부관참시당하죠.


기묘사화는 중종시절 조광조 개혁에 훈구파들 반격 성격이 짙습니다. 중종의 조광조 사랑에 대한 변심도 한몫했습니다.


을사사화는 대윤과 소윤이 인종 왕위 문제로 싸웁니다. 인종이 너무 일찍 죽어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인종의 외삼촌 윤임 중심의 대윤을 제거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림까지 희생된 사건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림은 여러 차례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림의 진짜 힘은 조정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향촌에는 학맥과 서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제거하면 또 다른 제자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할 무렵에는 오히려 사림이 중앙정계를 주도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훈구 대 사림이었습니다.


그런데 훈구가 약해지고 사림이 권력을 잡자 모두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느냐?


아닙니다.


이때부터 진짜 당쟁이 시작됩니다.


3. 동인과 서인 ― 작은 인사문제가 거대한 분열로


조선당쟁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흔히 이야기하는 것이 동서분당입니다. 발단은 놀랍게도 엄청난 국가정바카라이 아니었습니다.


이조전랑, 어찌 보면 지금 서기관급 인사문제였습니다.


이조전랑은 품계만 보면 높은 벼슬이 아닙니다.


이조전랑은 청요직에 진출할 사람을 추천하는 ‘통청권’과 자기 후임자를 추천하는 ‘자대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품계는 낮았지만 인사권은 막강했고, 이 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동서분당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청요직은 오늘날로 치면 젊고 유능한 엘리트 관료들이 가는 핵심 보직이었습니다. 특히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삼사와 이조전랑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심의겸이 반대합니다. 김효원이 과거 윤원형 집안을 드나들었다는 점 등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 뒤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전랑 후보가 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합니다.


심의겸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친동생으로, 명종의 처남이자 대표적인 외척이었습니다. 선조 초에도 대비의 동생이라는 배경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컸습니다.


“외척 집안사람이 이런 중요한 인사자리를 맡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갈등이 커집니다.


그러면서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사류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류가 갈라졌고, 1575년 무렵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이 뚜렷해집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에 있어 '동인',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서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참 이름 정하기 쉽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야당 거물정치인 김대중과 김영삼 지지세력을 그들이 사는 동네 이름을 따서 '동교동계', '상도동계' 그랬으니 크게 이상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단순한 인사싸움처럼 보였던 이 갈등이 시간이 흐르면서 학맥과 정치철학까지 결합합니다.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 계열 학자들이 많이 참여했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 계열 인사들이 많이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조선정치가 복잡해집니다.

이제 사람싸움 뒤에 학문, 철학이 붙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4. 잠깐 철학시간 ― 이(理)와 기(氣)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사단칠정'과 '이기론'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오늘 박사논문 쓸 것 아닙니다.

딱 이것만 이해하면 됩니다.


성리학에서 '이'(理)는 세상과 인간이 따라야 할 원리와 질서에 가깝습니다.


'기'(氣)는 실제 세상과 인간을 이루고 움직이게 하는 현실적 요소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단칠정'이 나옵니다.


사단은 맹자가 말한 네 가지 도덕적 마음입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불쌍한 사람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마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본래 존재하는 도덕성의 실마리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성선설에 가깝죠.


칠정은 희·노·애·구·애·오·욕.


즉 기쁨과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 같은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을 가리킵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은 바로 이것을 가지고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합니다.


쉽게 풀면 이런 질문입니다.


“사람 마음속 선한 도덕감정과 일반적인 감정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그 작동방식을 구별해야 하는가?”


이황은 사단에서 이의 발현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기대승은 사단 역시 인간의 전체 감정인 칠정과 완전히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이이가 기대승 쪽의 문제의식을 일부 이어받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킵니다.


그래서 흔히 이황을 ‘주리적’, 이이를 ‘주기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주의점이 하나 있습니다.


퇴계는 '이기이원론',

율곡은 '이기일원론'이라고 두 칸으로 딱 나눠 외우면 이해는 쉽지만 실제 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와 기를 인정했습니다. 차이는 인간과 세상을 설명할 때 어디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동인과 서인이 이 철학 때문에 처음 갈라진 것도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먼저 갈라졌고, 그 뒤 학맥과 철학적 전통이 결합하면서 각 붕당 정체성이 더욱 강해졌다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 한 문장을 기억하십시오.


<조선당쟁은 철학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정치와 학맥에 철학이 결합하면서 점점 더 강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5. 기축옥사 ― 정치싸움에 피가 흐르기 시작하다


처음 동인과 서인의 경쟁은 서로 다른 붕당이 공존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 갈등은 더욱 심해집니다.


사실 율곡 이이는 살아생전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재하려 애썼습니다. 정철과 이발도 따로 불러 술자리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정철과 이발은 정치적으로도 대립했지만 개인적인 감정도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서 이발이 정철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뒤에는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기록까지 전해집니다.


훗날 기축옥사에서 이발뿐 아니라 그의 노모와 어린 자식들까지 참혹하게 희생되자, 후대에는 정철이 개인적인 원한까지 섞어 보복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다만 정철에게 모든 바카라임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이발 집안의 전승도 있습니다.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 때 고기를 도마에 다지면서 칼질 소리에 맞춰 ‘정철, 정철’ 하고 되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기축옥사가 이발 집안에 얼마나 깊은 한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589년 엄청난 사건이 터집니다.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입니다.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왔고 조사가 시작됩니다.

당시 서인 영수 정철은 위관, 즉 옥사를 조사하는 바카라임자가 됐습니다.


사건은 약 2년 반 동안 이어졌고 1,000명 안팎의 인사가 죽거나 정치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동인과 호남지역 인사들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함평 출신 이발 가문이 큰 피해를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심해서 봐야 합니다.


오랫동안 기축옥사는 ‘정철이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대숙청’으로 설명되기도 했습니다. 반면 최근 연구에서는 선조가 커진 동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했다는 해석도 제기됩니다. 또 정여립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역모를 계획했는지 고변 내용 가운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확대·왜곡됐는지를 놓고도 지금까지 견해가 엇갈립니다.


따라서


“모두 정철이 했다.”


또는 반대로


“정철은 아무 바카라임도 없고 모두 선조가 했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정철이 위관으로서 옥사를 이끈 바카라임이 있었고, 동시에 최종적인 국문과 처벌에는 국왕선조 판단과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결국 국왕 정치적 판단과 서인정권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사건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것입니다.


여기서 당쟁의 성격이 바뀝니다.


상대방이 정권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잘못하면 죽습니다.

정치에서 패배가 곧 생존문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정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가 나를 살려둘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권력을 잡았을 때 상대를 제거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보복이 다시 보복을 낳습니다.


6. 정철, 세자건저 문제로 실각


성미가 급했던 정철은 이번에는 세자건저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됩니다. 기축옥사 뒤 동인이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1591년 세자바카라봉, 즉 ‘건저 문제’가 터지면서 상황이 다시 뒤집혔습니다.


당시 선조에게는 왕비가 낳은 적자가 없었습니다.


정철은 유성룡 등을 비롯한 대신들과 광해군을 왕세자로 바카라봉 필요성을 논의했고, 이산해에게도 이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조에게 건저문제를 주청 하는 과정에서 이산해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산해 쪽에서는 선조가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 등을 통해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뒤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해치려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전달됐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바카라봉해야 한다고 강하게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크게 노했습니다.


정철은 유성룡 등과 함께 세자바카라봉을 건의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선조 앞에서는 유성룡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미가 급하고 곧은 정철만 앞장서 건의한 모양이 되었고, 선조 노여움도 정철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정철 혼자 ‘독박’을 쓴 셈이었습니다.


결국 정철은 물러나 유배됐고 윤두수 등 서인계 인사들도 잇따라 탄핵을 받았습니다.


서인이 물러나고 동인이 다시 정권을 잡습니다. 결과적으로 선조는 기축옥사 이후 지나치게 커졌던 서인세력을 한꺼번에 눌렀습니다. 최영경 죽음 문제까지 다시 거론되면서 정철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선조는 정철은 독철, 간철로 부르며 증오합니다


그런데 동인이 다시 권력을 잡자 이번에는 정철의 처벌 문제를 놓고 동인 내부가 갈라집니다.


정철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쪽은 북인으로, 비교적 온건하게 처리하자는 쪽은 남인으로 나뉩니다.


북인에는 정인홍 등이 있었고 남인에는 유성룡 등이 중심이 됐습니다. 유성룡도 세자건저 주청시 아무 말 안 한 게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선조입니다.


기축옥사 때는 동인이 크게 약화됐고, 건저문제 때는 서인이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이것을 모두 선조가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선조가 붕당 간 경쟁을 이용하면서 어느 한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견제했던 것은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 선조를 정치력이 약한 왕이라고만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조선당쟁사를 보면 정철·이산해·유성룡 같은 신하들의 이름은 크게 남아 있는 반면, 정작 그들을 임명하고 파직하며 최종 결정을 내렸던 국왕은 뒤로 숨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쟁은 신하들끼리만 벌인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에는 붕당을 이용하고 조정하면서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국왕 정치도 있었습니다.


7. 북인,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다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물러나면서 북인이 정국 주도권을 잡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권력을 잡은 북인도 곧 내부에서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1599년 홍여순 대사헌 임명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커지면서 정인홍·이산해 등을 중심으로 한 '대북'과 유영경·남이공 등을 중심으로 한 '소북'으로 갈라집니다.


처음에는 인사문제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왕위계승 문제가 붙으면서 갈등이 훨씬 커졌습니다.


선조 말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왕위계승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소북 유영경 등은 어린 영창대군 쪽으로 기울었고, 대북 정인홍· 이이첨 등은 임진왜란 당시 이미 세자로 바카라봉돼 나라를 이끌었던 광해군을 지지합니다.


선조 말에는 소북이 우세해 대북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밀려나거나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대북이 정권 중심으로 올라왔고,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세력은 몰락합니다.


광해군시대의 핵심 정치세력은 대북이었습니다.


결국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고, 다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졌습니다.


조선 붕당은 상대 붕당과 싸우다가도 권력을 잡고 나면 내부에서 다시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당쟁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친명, 친청하면서 현재 정치도 그러하고 있지 않나요?


8. 광해군과 인조반정 ― 북인의 몰락과 서인의 귀환


광해군시대에는 대북이 정국을 주도합니다.


오늘날 광해군은 명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충돌을 피하려 했던 현실적인 외교정바카라 때문에 재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외교와 국내정치는 따로 봐야 합니다.


광해군에게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고, 선조 적자인 영창대군이 있었으며, 선조 정비 인목대비도 살아 있었습니다.


광해군 즉위 얼마 안 되어서 임해군은 유배된 뒤 죽었고, 1613년 '계축옥사'를 거치면서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이듬해 살해됩니다.


인목대비 역시 결국 서궁에 유폐됩니다.


이 과정에서 대북 강경세력이 정국을 장악했고 반대세력을 계속 제거했습니다.


의외인 인물도 있습니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입니다. 허균은 말년에 대북정권과 가까워지면서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혁적 사상가 허균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에 거열형을 당해 죽습니다. 참 야릇한 역사 한 장면입니다.


또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궁궐을 복구하고 여러 궁궐을 새로 짓는 대규모 공사가 계속되면서 백성 부담도 커졌습니다.


결국 1623년 서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인조로 즉위시킵니다.


대북은 이때 사실상 중앙정치에서 몰락합니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이 명나라와 의리를 저버리고 후금과 가까이했다는 중립 외교정바카라을 핵심적인 반정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여기에 폐모살제와 대북정권의 정치적 전횡 등을 더해 광해군을 몰아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현재 역사학자들의 광해군 제1의 치적으로 보는 중립외교를 반정 핵심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개인적으로 이점에서 분노하고 인조반정을 최악의 쿠데타로 보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단순히 인조반정 하나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조정권의 친명배금정바카라과 모문룡 지원 등이 후금과의 갈등을 심화시킨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백성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저는 이전 역사글에서도 인조반정 이후의 정치와 외교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평가보다 당정흐름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하나 생깁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국의 중심이 되지만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았습니다.


남인의 대표적인 원로였던 이원익도 다시 정승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오리정승’으로 유명한 이원익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정치사에서 정말 중요하게 볼 만한 인물입니다. 광해군 때 대동법이 처음 시행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고, 무엇보다 청렴한 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 뒤에는 김육이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사실 저는 당쟁 이야기보다 이원익과 김육, 이 두 사람 이야기를 더 길게 하고 싶습니다만 오늘은 당쟁사가 중심이니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즉 한동안은 서인과 남인이 경쟁하면서도 공존하는 붕당정치가 운영됩니다.

이 시기에는 한 정치세력이 모든 것을 완전히 독점하기보다는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구조가 어느 정도 작동합니다. 그러나 이런 공존도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왕위계승의 정통성과 예법문제가 정치권력과 결합하면서 또 한 번 거대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바로 예송입니다.


9. 예송논쟁 ― 상복이 아니라 왕의 정통성을 놓고 싸우다


1659년 효종이 죽습니다.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니, 상복 몇 년 입는 걸 가지고 나라 대신들이 왜 그렇게 싸워?”


그런데 조선은 성리학 국가입니다. 왕실 상례는 그냥 장례절차가 아닙니다.


누가 적통인가?


왕은 일반 사대부와 어떤 관계인가?


종법을 왕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모든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1659년 제1차 '기해예송'에서 송시열 등 서인은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종법상의 위치를 중요하게 본 것입니다.


반면 허목·윤휴 등 남인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왕위를 계승해 종통을 이었으므로 장자와 같은 예를 적용해야 한다며 3년복을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1년복이 채택됐고 정국은 서인이 계속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1674년 또 문제가 생깁니다.


이번에는 효종 왕비 인선왕후가 죽습니다. 자의대비가 며느리인 인선왕후를 위해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서인은 9개월인 대공복을 주장했고 남인 쪽에서는 1년인 기년복을 주장했습니다.


이번에는 현종이 1년복으로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현종이 죽고 14세 숙종이 즉위하면서 서인세력이 대거 밀려나고 남인이 정국을 장악합니다.


따라서 예송을 단순하게


“서인은 신권이고 남인은 왕권이다.”


라고만 외우면 부족합니다.


서인이 왕도 예법의 질서 속에 있다고 본 측면과 남인이 왕위계승으로 형성된 종통을 더욱 강조한 차이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핵심에는 효종의 왕위계승 정통성, 왕실 종법과 예법 해석, 그리고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주도권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송시열과 서인의 예론은 효종을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종법적 질서에서 바라본 것이지만 왕실 입장에서는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을 가볍게 보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습니다.


1차 예송 때는 현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오랫동안 정국을 주도해 온 서인 힘도 막강했습니다. 결국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2차 예송이 벌어진 15년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현종은 어느 정도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었고, 효종을 계속 ‘차자’의 예로 다루려는 서인 주장을 왕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현종은 이번에는 서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고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힘이 강했다면, 2차 예송에서는 현종이 왕권을 바탕으로 서인을 강하게 견제한 것입니다.


이제 붕당은 단순히 사람끼리 모인 집단이 아닙니다. 학문과 예법이 곧 정치논리가 됩니다.


그리고 숙종시대가 되면 또 하나의 변화가 생깁니다.


현종은 2차 예송에서 남인의 손을 들어준 뒤 불과 한 달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열네 살의 어린 숙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숙종의 왕위 정통성은 매우 확고했습니다.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로서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왕조에서 이렇게 적통이 분명한 왕위 계승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비록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왕권에 대한 의식은 강했습니다. 즉위 직후 아버지 현종의 결정을 이어받아 서인과 송시열을 더욱 강하게 압박했고, 결국 송시열을 유배시키고 서인을 조정에서 몰아내면서 남인 중심으로 재편했습니다


국왕이 붕당을 훨씬 적극적으로 교체하면서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입니다.


10. 숙종의 환국정치와 회니시비 ―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죄인이 되다


숙종시대에는 정권이 갑자기 뒤집히는 환국이 반복됩니다.


대표적으로 세 번만 기억하십시오.


<1680년 경신환국.>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합니다. 발단은 이른바 ‘유악사건’이었습니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이 집안 잔치를 열던 날 비가 내렸습니다. 숙종은 왕실에서 사용하던 기름 먹인 천막, 즉 유악을 허적에게 보내주려 했는데 알아보니 허적이 왕의 허락도 받기 전에 이미 가져다 쓰고 있었습니다.

이에 숙종은 크게 노했습니다.

그러나 천막 하나 때문에 정권이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숙종은 이미 세력이 너무 커진 남인을 견제하고 있었습니다. 유악사건을 계기로 남인이 장악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 쪽으로 넘깁니다.

그리고 곧 더 큰 사건이 터집니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왕실 종친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이른바 ‘삼복’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을 ‘삼복의 변’이라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허적과 윤휴를 비롯한 남인세력이 대거 처벌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습니다.


이것이 '경신환국'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기억하면 됩니다.


‘허적의 유악사건이 불을 붙였고, 삼복의 변이 결정타가 되어 남인정권이 무너졌다'



<1689년 기사환국>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를 원자로 바카라봉하는 문제를 놓고 숙종과 서인이 충돌합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세력이 원자바카라봉에 반대하자 숙종은 서인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을 불러들입니다.

송시열은 유배됐다가 사사됐고 인현왕후도 폐위됐습니다.

장씨는 왕비가 됩니다.


드라마에서 많이 봤죠?


그러나 이것을 장희빈 때문에 생긴 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숙종의 눈에는 서인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조정을 자기들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숙종의 왕권은 상당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나쁜 남자 숙종은 여인들을 이용해 필요하면 서인을 과감하게 밀어내고 다른 세력을 끌어올리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직접 쥐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5년 뒤인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납니다.


이 부분은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론계 김춘택과 소론계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즉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합니다. 집권 남인의 민암 등은 이 움직임을 조사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숙종 변덕 또 시작됩니다. 이미 인현왕후 폐위를 후회하기 시작했던 숙종은 오히려 민암 등 남인 지도부를 내칩니다.

그리고 서인계 인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정권을 교체합니다.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됩니다.


이것이 갑술환국입니다.


갑술환국을 단순히 숙종이 장희빈에게 싫증 나서 인현왕후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드라마에서는 사랑과 질투가 중심이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왕위계승 문제와 남인·서인의 권력투쟁, 그리고 국왕 숙종의 정국운영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숙종 변덕도 한몫하고요.


희빈 장씨가 사사되는 것은 갑술환국 때가 아닙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무고옥이 일어나면서 사사됩니다.


이것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일이 벌어집니다.


서인도 갈라집니다.

바로 '노론'과 '소론'입니다.


흔히 갑술환국 때 노론과 소론이 갈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 앞섭니다.


1680년 경신환국 뒤 남인 처리 문제와 훈척정치, 김익훈 문제 등을 놓고 서인의 노장파와 소장파가 충돌하기 시작했고 1683~1684년 무렵 노론과 소론의 분화가 뚜렷해집니다.

그리고 이 분열을 더욱 깊게 만든 사건이 있습니다.


'회니시비'입니다.


‘회’는 송시열이 살던 회덕.

‘니’는 윤증이 살던 니산, 지금의 논산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시비를 회니시비라고 합니다.


송시열과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김장생 문하에서 공부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학문적으로 갈라선 윤휴와도 관계를 계속 유지했습니다. 송시열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윤선거가 죽은 뒤 아들 윤증은 스승이기도 했던 평소 가까웠던 송시열에게 아버지 묘갈명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송시열이 써준 글에는 윤선거에게 평생 가장 아픈 기억이었던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사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강화도가 함락될 당시 윤선거 주변의 가족과 지인들은 청군에게 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윤선거는 아들 윤증을 데리고 살아서 강화도를 빠져나왔습니다.


윤선거와 윤증 부자에게 이 일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자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송시열이 아버지의 삶을 기리는 묘갈명에서 바로 그 아픈 지점을 다시 건드린 것입니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평생 죄바카라감으로 안고 살았던 강화도 일을 굳이 언급하면서도 윤선거에 대한 자신의 적극적인 평가를 피했습니다. 특히 ‘나는 전해 적을 뿐 새로 짓지 않는다’는 표현이 윤증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습니다.


윤증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단순히 글 한 편을 고쳐달라는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와 평생의 상처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결국 이 묘갈명 문제는 송시열과 윤증의 오랜 관계가 무너지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결국 윤증은 1681년 송시열의 학문과 처신을 비판하는 편지를 씁니다.


바로 ‘신유의서’입니다.


다만 실제로 스승에게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가 주변 사람을 통해 알려집니다.


1684년 송시열의 제자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했다’며 공격하면서 개인적인 사제갈등이 조정 전체의 정치논쟁으로 번집니다.


이것이 '회니시비'입니다.


송시열을 따르는 쪽이 노론의 중심이 되고 윤증을 따르는 쪽이 소론의 중심이 됩니다.


그렇다고 노론과 소론이 단순히

‘늙은 사람들의 당’과 ‘젊은 사람들의 당’이었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초기에는 노장파와 소장파의 성격이 있었지만 남인 처리문제와 훈척정치에 대한 입장, 송시열과 윤증의 학문적 갈등 등이 함께 얽히면서 독립된 붕당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윤휴 문제도 빠질 수 없습니다. 윤휴는 주자 해석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학자였습니다.


송시열은 이런 윤휴 학문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고 ‘사문난적’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윤휴 죽음을 단순히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였다라고 말하면 지나칩니다.


윤휴는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정권이 몰락하는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사사됐습니다.


다만 송시열과 윤휴 오랜 학문적·정치적 대립이 그 배경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결국 회니시비는 친구였던 송시열과 윤선거 갈등에서 시작해 스승 송시열과 제자 윤증 갈등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서인 전체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됐습니다.


개인관계와 학문이 정치가 되고, 정치가 다시 붕당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당쟁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11. 노론·소론 그리고 호락논쟁 ― 같은 노론 안에서도 또 갈라진 철학


이제 당쟁에 다시 철학이 등장합니다.


조선후기 노론 내부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철학논쟁이 '호락논쟁'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과 동물 본성은 근본적으로 같은가, 다른가?” 하는 문제입니다.


권상하 문하 한원진은 인간과 사물 본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강조했고, 이간은 근본적인 본성은 같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했습니다.


한원진 쪽 학자들이 주로 충청도, 즉 호서지역에 있어 '호론'이라 불렸고, 이간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서울과 경기지역에 많아 '낙론'이라고 불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여러분들이 물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랑 짐승 본성이 같은지가 정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바로 그 질문이 중요합니다.


성리학자들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해석은 단순한 철학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문명인이고 누가 오랑캐인가?


다른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인간이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런 현실인식과도 연결됐습니다.


호론 쪽에서는 화이론적 질서와 조선중화 의식을 강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낙론 쪽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보편적인 본성을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보다 개방적인 사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나타났습니다.


후대에 낙론계 인맥 일부가 '북학파'와 연결되고 호론계의 강한 화이론이 '위정척사사상'과 통하는 측면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도


‘호론=쇄국과 위정척사’


‘낙론=개화와 북학’


이렇게 1대 1로 연결하면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후대 북학과 위정척사 같은 흐름에 영향을 준 여러 사상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면 됩니다.


즉 처음 이황과 기대승이 인간의 마음을 놓고 벌였던 철학논쟁이 조선후기로 가면서 더욱 세분화되고 정치적 학맥과 결합해 새로운 논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12. 영조와 정조의 탕평 ― 당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니라 당을 다스리다


숙종시대까지 붕당 갈등이 너무 심해지자 영조는 탕평을 내세웁니다.


탕평은 쉽게 말하면 어느 한 당파에 정권을 완전히 맡기지 않고 여러 정치세력을 조정하면서 국왕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려는 것입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함께 등용했고 이조전랑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특권도 축소했습니다. 그래서 영조의 탕평을 단순히 ‘보여주기식 정치’라고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붕당의 극단적인 대립을 완화하려는 여러 제도적·정치적 시도가 있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노론의 우세가 커졌고 탕평정치에도 분명한 한계가 나타났습니다.


정조는 또 다른 방식의 탕평을 추구합니다.


규장각을 키우고 초계문신을 양성하며 여러 정치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려 합니다.


남인 채제공을 정승에 등용하면서 노론 중심의 정치에 균형을 맞추려 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시대에는 정치세력이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뉩니다.


이것도 노론과 남인처럼 오랫동안 이어진 독립된 붕당이라기보다는 사도세자 문제와 정조 정치노선을 둘러싸고 기존 붕당 사람들이 새롭게 결합하면서 나타난 정치구도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시파'는 대체로 정조의 정치와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에 비교적 우호적인 세력이었고, '벽파'는 이에 비판적이거나 신중한 입장을 가진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파 안에도 노론과 남인이 있었고 벽파 역시 단순히 하나의 학파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대표적인 시파계 인물이 훗날 정조와 사돈관계를 맺는 김조순입니다.


그리고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죽은 뒤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정치는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갑니다.


붕당이 갈라져 싸우던 정치에서 몇몇 외척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조선당쟁사는 사실상 마지막 단계에 들어갑니다.


13. 정조 이후 세도정치 ― 붕당정치가 무너진 자리에 가문이 들어서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합니다.


처음에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노론 벽파가 정국을 주도합니다.


이후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노론 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김씨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집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세도정치라고 부르는 정치형태가 점차 자리 잡습니다.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세도정치를 단순히 ‘노론 일당독재’라고만 부르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는 오히려 전통적인 붕당정치 자체가 힘을 잃고 특정 외척가문이 핵심관직을 장악하는 정치로 성격이 바뀝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같은 세도가문 중심 정치입니다.


이것은 이전 붕당정치와도 다릅니다.


붕당정치에서는 최소한 학문과 공론, 서로 다른 정치세력의 경쟁이라는 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도정치에서는 특정 가문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이런 견제구조가 크게 약화됩니다.


19세기에는 삼정의 문란과 농민 부담이 심각해지고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이어집니다.


결국 조선정치가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당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권력을 견제할 경쟁과 공론의 구조가 무너졌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조선당쟁사를 단순히

‘옛날 사람들이 맨날 싸웠던 역사’

라고만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속에는 사람과 권력도 있고 철학도 있으며 이상과 현실도 있고 견제와 독점이라는 정치의 오래된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조선 선비들은 우리가 학창 시절 졸면서 외웠던 것처럼 아무 이유 없이 사단칠정이나 예송을 붙들고 싸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왕은 어떤 존재인가?’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가?’


‘권력은 어떤 원리에 따라 행사되어야 하는가?’


라는 현실적인 정치문제였습니다.


지금의 정치에서도 형태는 달라도 권력과 견제, 분열과 통합이라는 문제는 계속 반복됩니다.


그래서 조선당쟁사를 제대로 이해하면 조선의 정치사가 한꺼번에 보입니다.


그리고 현대사 현실정치가 보입니다.


지금 당장 민주당과 국민의 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 제 강의 동안 이 흐름만 정확하게 잡으셨다면 이제 사극을 보다가


“동인이 뭐였지?”


“서인이 뭐였지?”


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남인이 나오면


‘아, 동인에서 갈라졌지.’


북인이 나오면


‘동인에서 남인과 함께 갈라졌다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지.’


노론이 나오면


‘서인이 다시 갈라졌지.’


이 정도는 바로 떠오르실 겁니다.


거기에 예송과 환국, 탕평, 세도정치가 차례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제 강의 목적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 조선당쟁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 아는 체하셔도 됩니다.


오늘 강의 들으셨는데 그 정도 특권은 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ㅡ 초롱 박철홍 ㅡ


마지막으로 오늘 내용을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훈구 ↔ 사림


↓ 사림 집권


동인 ↔ 서인


↓ 동인 분열


남인 ↔ 북인


↓ 북인 분열


대북 ↔ 소북


↓ 인조반정 이후


서인 ↔ 남인


↓ 서인 분열


노론 ↔ 소론


↓ 숙종 환국정치


↓ 영조·정조 탕평정치


↓ 정조 사후


세도정치


즉, 조선 당쟁사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림이 권력을 잡았고 → 붕당이 생겼고 → 붕당이 다시 갈라졌으며 → 경쟁과 견제가 보복정치로 격화됐고 → 국왕이 이를 조정하려 했으며 → 결국 붕당 자체가 약해진 자리에 세도가문이 들어섰습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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