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ㅡ신숙주와 사육신, 그리고 인간의 선택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8
ㅡ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ㅡ
(신숙주와 사육신, 그리고 인간의 선택)
앞 편에서 나는 ‘계유정난’과 ‘세조’, ‘사육신’ 그리고 ‘신숙주’ 이야기를 꽤 길게 했다.
글을 쓰면서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사람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성삼문’과 ‘박팽년’ 등 사육신은 죽었다. 그것도 편안한 죽음이 아니었다. 모진 국문을 당했고 결국 처형되었다. 그 화는 자신들에게서 끝나지 않고 가족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반면 '신숙주'와 '한명회'는 살아남았다.
신숙주는 세조를 거쳐 예종과 성종 때까지 높은 벼슬을 지냈고, 한명회 역시 세조정권 최고 권력자로 올라 오랫동안 권세를 누렸다.
그렇다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시대에 내가 태어나 그 위치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
성삼문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었을까?
아니면 신숙주나 한명회처럼 현실권력 속에서 살아남는 길을 택했을까?
앞 글에서도 몇 번 던졌던 질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면 조금 엉뚱하면서도 근본적인 의문과 마주치게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정말 자신의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옛사람들이 말한 운명, 팔자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점을 보러 다니지도 않고 사주팔자를 믿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태어날 것인지, 부모가 누구일 것인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날 것인지 부잣집에서 태어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없다. 전쟁의 시대에 태어나는 것도 태평성대에 태어나는 것도 자신이 고를 수 없다. 요즘 말하는 ‘금수저’와 ‘흙수저’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에서 시작된다.
그런 것을 넓은 의미에서 ‘운명’이라고 한다면 인간 삶에는 분명 운명이라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과 죽는 방법까지 모두 정해져 있다는 식의 ‘사주팔자’와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조선역사 연재에서 잠시 옆길로 빠져 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2013년 개봉했던 영화 <관상>도 바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수양대군’과 ‘계유정난’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
관상쟁이 눈으로만 본다면 누가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일까?
한명회와 신숙주는 권력 중심에서 오래 살았다. 반면 성삼문과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은 처참하게 죽었다.
현실에서 누린 편안함과 부귀영화만 놓고 본다면 한명회와 신숙주는 ‘좋은 팔자’이고 사육신은 ‘나쁜 팔자’였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은 삶’과 ‘나쁜 삶’은 도대체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역사글을 쓰면서 내가 자주 느끼는 것이 있다.
우리 역사 속 지배층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참 많았다. 특히 조선사에서 그렇다.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많은 바카라을 읽었고 높은 학문을 갖추었으며 정치와 외교에도 능했다.
그런데 나라가 큰 위기에 빠질 때면 그 뛰어난 사람들이 보여주는 선택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입으로는 충과 효, 의리와 명분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서는 자신의 당파와 가문, 권력과 생존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히 ‘나쁜 인간들이어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의 욕망과 성향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살았던 슬롯 구조와 분위기 역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학문적 의리와 정치권력이 지나치게 결합할 때였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당파와 학통, 가문의 이해가 정치와 밀접하게 얽히면서 나라와 백성보다 자신이 속한 세력 이해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도 반복해서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오늘 이야기의 출발점인 ‘운명’으로 돌아가보자.
조선사대부들은 학문적으로 관상이나 사주팔자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실제생활에서 길흉과 운명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관상과 사주, 풍수는 오랫동안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좋은 묏자리를 쓰면 후손이 잘된다는 믿음, 혼례날을 고르는 풍습, 아이가 태어나면 사주를 보는 일 등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지금도 색은 많이 바랬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불교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내세의 해탈뿐 아니라 현실에서 복을 구하는 현세구복 신앙과 강하게 결합했다.
기독교 역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건강과 성공, 가족의 복을 기원하는 현세적인 모습이 강해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정치권은 이런 문화가 더 심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는 이른바 무속에 관한 일들이 오랫동안 정치적 논란이 되었고, 2026년 법원 판단에서도 무속인들에게 중요한 시기에 조언을 받아온 사실이 인정됐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어떤 후보가 어느 묏자리를 써서 대통령이 되었다더라.’
‘이번에는 두꺼비상이 대통령이 될 상이라더라.’
심지어 노태우 대통령을 두고는 십 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불상과 연결된 이야기까지 전해졌다.
사실 여부를 떠나 대통령선거처럼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마다 관상과 풍수, 사주와 길흉에 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슬롯에 이런 믿음이 얼마나 깊게 남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사람들은 누구나 현실에서 오래 살고 싶고 건강하고 싶으며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
권력자라고 다르겠는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역사글을 쓰다 보면 불편한 장면과 계속 마주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던진 사람 가운데는 젊은 나이에 죽고 가족까지 고통받은 사람이 많다.
반대로 역사적으로 큰 바카라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개인 욕망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는 선택을 해서 후대에 엄청난 욕을 먹는 사람 가운데 현실에서는 부와 권세를 누리고 천수를 누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구한말 이완용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과정에 앞장선 대표적인 친일 매국 민족반역자로서 역사에 남았지만, 독립운동가들처럼 젊은 나이에 형장에서 죽지 않았고 상당한 부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두고 ‘좋은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든다.
전두환은 2021년 향년 90세로 사망했고 노태우도 같은 해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전인 2026년 9월 12일, 신군부 핵심인물 정호용도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 묘한 일이다.
국민 대다수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현실 삶에서는 오래도 살았다. 계유정난 뒤 권력과 장수를 누렸던 한명회와 신숙주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사람이 현실에서 부와 권세를 얼마나 누렸는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와 역사가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특히 친일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독립운동가들 현실 삶을 비교하면 이 질문은 더욱 무거워진다.
그래서 나는 역사글을 쓰면서 운명을 자꾸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오히려 고단하게 살았던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백범 김구 이야기를 꺼내본다.
김구는 젊은 시절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관상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자신의 얼굴을 관상서에 비춰보았더니 부귀할 좋은 상은 찾아보기 어렵고 가난하고 천하게 살 상만 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관상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글을 접하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나는 이 글귀를 참 좋아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를 아름답게만 끝내고 싶지는 않다.
김구 역시 해방된 조국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또 우리 민족 영웅 한 사람!
'안중근'도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에 일제에 의해 사형당했다.
성삼문과 박팽년 역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했지만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인가?
예전에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장난 삼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나라를 팔았다는 오명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더라도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더라도 안중근처럼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인가?’
의외로 여러 사람이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몇몇은 솔직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이완용처럼 오래 편안하게 사는 쪽을 택하겠다.’
나는 그 대답을 무조건 비난하기 어렵다. 나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보아도 쉽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중근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내 자식에게도 ‘안중근처럼 살아라. 서른 살에 죽더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져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이 어려워진다.
죽음은 무섭고 가난은 고통스럽다.
가족은 소중하고 누구나 살아남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할수록 사람을 너무 쉽게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신숙주는 왜 그 길을 택했는가?
성삼문은 왜 죽음을 알면서도 다른 길을 걸었는가?
한명회는 왜 그토록 권력을 좇았고 김시습은 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는가?
그렇다고 모든 선택이 똑같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자신의 선택 하나가 수많은 사람의 삶과 한 나라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바카라임은 훨씬 더 무거워야 한다.
그런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골라 권력을 맡길 것인가 역시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 인물들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왕조시대에는 어쩌면 오늘 이야기 주제인 ‘운명’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슬롯에서는 다르다. 결국 유권자가 그 선택에 직접 참여한다.
그래서 유권자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때로는 한 사람 운명이 아니라 한 나라 운명까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오늘 이야기로 돌아가자.
솔직히 나는 아직도 인간에게 어느 정도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도 시대도 태어난 나라도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다.
재능과 외모, 건강도 상당 부분 주어진 것이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기회를 가지고 시작하고 누군가는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수많은 장애물을 안고 시작한다.
그것까지 모두 의지와 노력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나는 운명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운명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김구는 자신의 얼굴을 바꿀 수 없었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었다.
안중근 역시 나라가 국권을 빼앗기는 시대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시대는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대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결국 자신들이 선택했다.
그 선택이 그들에게 부귀와 장수를 가져다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고난과 죽음을 가져왔다.
그래서 더욱 묻게 된다.
'좋은 팔자란 과연 무엇일까?'
'오래 살고 돈이 많으며 권력을 누리는 삶일까?'
'아니면 비록 고단하고 짧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일까?'
솔직히 나는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조금 알 것 같다.
태어난 팔자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팔자를 살아가는 사람까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운명과 선택.'
아마 인간의 삶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역사를 쓰면서 앞으로도 바로 그 지점을 계속 들여다보고 싶다.
다음 편은 세조가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오른 젊은 임금.
‘예종’ 이야기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