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1 ㅡ 귀성군 이준과 남이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0
ㅡ 예종 1 ㅡ
(귀성군 이준과 남이)
오늘 쓰는 역사 이야기는 내가 온라인카지노 공모에 제출한 소설 <조선의 아이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사실상 절정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물론 실제 역사 기록과 소설 내용은 다르다. 소설은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기록이 침묵하고 있는 틈에는 작가의 상상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소설 <조선의 아이돌> 역시 가능한 한 실제 역사 기록을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기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물들의 관계와 선택, 정치적 움직임 사이에는 소설적 상상력을 보태 새롭게 이야기를 구성했다.
사실 조선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 기억에 유난히 희미하게 남아 있는 왕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왕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예종'과 '인종'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 모두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예종' 재위 기간은 불과 1년 2개월 남짓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예종'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깊이 배우지도 않았고, 기억하지도 못한다. 나 역시 초중고 학창 시절 국사 배우면서 '예종'이라는 왕을 특별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이'라는 이름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스물일곱을 전후한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올랐다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인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 기억 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남아 있다.
'유자광이 남이를 모함했다.'
'유자광 고변으로 남이가 억울하게 죽었다.'
그 한 많은 죽음 때문인지 '남이'는 후대 무속신앙에서 '장군신' 으로까지 모셔졌다.
그런데 '남이'가 언제 죽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조선시대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남이'가 죽은 것은 바로 '예종' 즉위년인 1468년이었다.
'세조'가 병세가 깊어지자 왕위를 물려주고 젊은 '예종'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렇다면 '남이' 죽음은 단순히 '유자광' 한 사람 모함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이었을까?
실록을 따라가 보면 사건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세조'는 말년에 '남이'와 '귀성군 이준'을 각별히 총애했다.
당시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기존 공신들(구공신) 영향력이 막강했던 상황에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며 새롭게 공을 세운 '귀성군 이준'과 '남이'가(신공신) 파격적으로 성장했다.
그 결과 조선 역사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면이 만들어졌다.
이십 대 '귀성군 이준'이 영의정에 오르고, 역시 이십 대였던 '남이'가 병조판서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세조' 말기의 이런 인사 흐름은 '예종'이 즉위하면서 급격히 달라진다.
'예종'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날, '남이'는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 의산군 겸 사복장이 되었다.
당시 형조판서 '강희맹'이 평소 '남이'의 사람됨이 병사를 맡기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 것을 '한계희'가 임금에게 아뢰었고, 그 결과 '박중선'이 다시 병조판서가 되고 '남이'는 겸사복장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자광' 고변이 터졌다.
'예종'은 '남이'를 직접 국문했고 사건 처리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세조' 말까지 승승장구하던 젊은 무장이 '예종' 즉위와 거의 동시에 군권 중심에서 밀려나고, 한 달여 뒤 역모 사건 주인공으로 몰려 죽음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역사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예종은 왜 남이를 그토록 경계했을까?'
후대 '중종실록'에도 '예종'이 평소 '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취지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질문이 이어졌다.
당시 조정에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비롯한 '세조' 시대 구공신들이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조' 정비 '정희왕후'도 살아 있었다.
의경세자 부인 '수빈 한씨', 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소혜왕후' 역시 어린 두 아들 '월산군'과 '자을산군', 훗날 '성종'을 두고 궁중 정치 한복판에 있었다.
이들이 실제로 '남이' 죽음에 직접 개입했다는 기록은 없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기록에는 없다. 그러나 당시 권력 구조와 인물들 이해관계를 들여다보면 여러 가능성을 상상해 볼 틈은 남아 있다.
젊은 왕 '예종'과 '세조' 시대 구공신들은 '남이'라는 젊고 강력한 무장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정희왕후'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리고 훗날 자신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수빈 한씨', 즉 '소혜왕후'는 급변하는 왕실 권력 구도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물론 '소혜왕후'가 '남이' 죽음 뒤에 있었다는 기록도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점을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바로 그 기록의 침묵, 역사적 사실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틈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들어가 본 것이다.
'혹시 남이의 죽음 뒤에는 유자광 한 사람만이 아니라 더 복잡한 권력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예종과 구공신들은 남이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정희왕후와 수빈 한씨는 급변하는 권력 속에서 어떤 판단을 하고 있었을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을 단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정치 상황과 인물 관계를 토대로 기록 밖의 가능성을 상상해 본 것이다.
바로 그 질문에서 내 소설 <조선의 아이돌>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아이돌> 주요 인물은 '의경세자', '귀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그리고 소설적 인물 '이몽룡'이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형제의'(兄弟義)를 맺고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낸다.
여기에 의경세자 친동생 '해양대군', 훗날 '예종'이 되는 인물이 또 하나 중요한 축으로 등장한다.
젊은 시절 함께 시대를 건너온 사람들이 세월이 흐르고 권력이 바뀌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이야기다.
특히 '예종' 즉위와 '남이' 죽음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절정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에 와서도 이 짧은 '예종' 시대를 매우 중요하게 바라본다.
단순히 '남이' 한 사람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이 시기는 '세조' 시대 강력한 왕권과 공신 정치가 '성종'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성종' 시대에 들어가면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들이 중앙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종'의 짧은 재위는 단순히 '1년 남짓 왕위에 있다 죽은 왕'의 시대로만 보기는 어렵다.
'세조'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정치 질서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서 있던 시대였다.
<조선의 아이돌>에서는 이 시대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풀었다.
그러나 오늘 쓰는 글은 다르다.
오늘은 소설 속 '예종'이 아니라 실제 역사 기록 속 '예종'을 3편으로 나누어 만나보려고 한다.
'남이'는 왜 죽었는가?
'유자광'은 정말 혼자서 이 사건을 만들었는가?
'예종'은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리고 불과 1년 2개월 남짓 왕위에 있었던 이 젊은 왕 시대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선의 아이돌>은 온라인카지노에 공개되어 있지만 아직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어서 소설과 역사를 함께 비교해 읽기에는 조금 아쉽다.
그래도 오늘은 소설을 잠시 내려놓고 실록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이제 오늘 역사 이야기 주인공,
'예종' 시대로 깊이 들어가 보자.
조선 역사를 보다 보면 뭔가 큰일을 해낼 것 같았던 왕이나 세자, 인물들이 여러 이유로 너무 일찍 죽는 경우가 있다.
오늘 글 주인공들인 '예종', '귀성군 이준', '남이'도 그런 인물들이다.
'예종' 재위 기간은 불과 1년 2개월 남짓이었다.
실록은 '예종'을 이렇게 평가한다.
['성품이 영명과단(英明果斷, 총명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음)하고 공검면묵(恭儉淵默, 공손하고 검소하며 속이 깊고 말이 적음)하며, 서바카라에 뜻을 두어 시학자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씩 진강 하게 하고, 비록 몹시 춥거나 더울 때도 그만두지 않았다.']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학문에도 열심이었던 왕이라는 것이다.
병세가 깊어져 죽음을 예감한 '세조'는 1468년 9월 7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예종' 나이 열아홉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세조'는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나름 여러 정바카라을 추진했지만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 짧은 재위 중 벌어진 '남이의 옥'만큼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세조' 말 조정에는 기존 구공신 세력과 '이시애의 난'을 통해 급부상한 신공신들이 함께 존재했다.
'세조'가 의도적으로 젊은 세력을 길러 구공신을 견제하려 했다고까지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조' 말기에는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기존 공신들 옆에 '귀성군 이준', '남이' 같은 젊은 신공신들이 빠르게 성장하며 새로운 권력구도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인물이 '귀성군 이준'과 '남이'였다.
'귀성군 이준'은 '세종대왕' 넷째 아들 '임영대군' 아들이었다.
'세조'에게는 친조카였고 '예종'에게는 사촌 형이었다.
왕실 혈통에 매우 가까운 종친이었다. 게다가 '이시애의 난'에서 총지휘관으로 큰 공을 세운 뒤 이십 대에 영의정까지 올랐다.
실제로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무척 아꼈다.
'남이'가 궁중에서 열린 활쏘기 경연에서 술에 취해
"성상께서 귀성군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그윽이 그르게 여깁니다."
라고 말하자 '세조'는 이렇게 대꾸했다.
"귀성은 지친이고 또 큰 공이 있으니, 귀성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누구를 사랑하겠느냐?"
그리고 남이를 하루동안 옥에 가두었다.
그만큼 귀성군에 대한 '세조'의 총애가 컸다.
그리고 여기서 내 소설 <조선의 아이돌>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실제 사건 하나가 나온다.
'세조' 후궁 소용박씨 '덕중' 이야기다.
실록에는 소용박씨 '덕중'이 언문으로 편지를 써 환관들을 통해 '귀성군 이준'에게 보내며 연모하는 뜻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왕의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연정을 품어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귀성군 이준'은 그 편지를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 '임영대군' 에게 알렸고, 부자가 함께 '세조'에게 보고했다.
'세조'는 편지를 전달한 환관들을 목을 베는 등 처벌했고 결국 '덕중'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실록 기록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덕중'이라는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왕의 후궁이라는 신분을 넘어 한 남자를 연모했고, 자신의 마음을 글로 써서 보낼 만큼 강렬했던 한 여인.
실제 결과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설 <조선의 아이돌>에서는 바로 이 역사적 사건 위에 상상력을 더했다.
'귀성군 이준'과 '덕중'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애틋한 사랑으로 그렸고, '덕중'도 죽이지 않고 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역사와 소설의 차이다.
역사 기록 속 '귀성군 이준'은 자신의 행실에 상당히 신중했던 인물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연모해 편지까지 보낸 여인의 마음을 곧바로 아버지와 임금에게 알림으로써 결국 '덕중'을 죽음으로 내몬 조금은 매정하고 쩨쩨한 남자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선의 아이돌>에서 이 장면을 정반대로 그렸다.
'덕중'의 사랑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왕의 후궁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 마음조차 마음대로 품을 수 없었던 여인. 나는 적어도 소설 속에서만큼은 그런 '덕중'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아이돌>에서는 '귀성군 이준'을 아주 극적 로맨티시스트로 바꾸어 놓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것으로 그렸고, '덕중'도 죽이지 않고 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맺었다.
역사는 바꿀 수 없지만 소설에서는 한 번쯤 다른 운명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다만 실제 역사 속 '귀성군 이준'은 이런 사건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판단할 만큼 신중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그는 종친과 대신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처신을 잘했고, 쉽게 적을 만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예종'은 즉위 직후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했지만 '귀성군 이준'은 한동안 그대로 영의정 자리에 두었다.
'남이의 옥'이 벌어진 뒤에도 '귀성군 이준'은 남이 역모를 진압한 익대공신에 바카라봉될 정도였다.
<조선의 아이돌> 소설 속에서 '귀성군 이준'과 '남이'는 친형제처럼 지내며 서로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사이로 나온다.
그러나 '남이'가 역모에 몰렸을 때 '귀성군'은 끝내 그를 구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건 뒤에는 공신에까지 바카라봉된다. 그 일은 '귀성군'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 형제처럼 지냈던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바카라감, 그리고 그 죽음 뒤 자신은 살아남아 공신이 되었다는 부끄러움은 죽는 날까지 그의 가슴속 깊은 한으로 남아 따라다닌다.
현실에서 귀성군은 왕실 종친 이면서 젊고 명망과 군공까지 갖춘 그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종'이 급사하고 어린 '성종'이 즉위한 뒤 일이 터진다.
1470년 '최세호', '권맹희' 등이 '귀성군'은 장년이고 현명해 왕위를 감당할 만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사건이 불거졌다.
말을 한 사람들은 중죄를 받았고 '귀성군 이준' 역시 한양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대신들 주장에 따라 경상도 영해로 유배됐다.
실제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 것이다.
왕실 정치가 얼마나 냉혹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귀성군 이준'은 끝내 정치 무대로 돌아오지 못했고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귀양지 영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예종' 시대의 더 큰 비극은 '남이'에게서 벌어졌다.
'남이'는 조선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 증손자였다.
할아버지 '남휘'의 부인이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였으니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 이기도 했다.
또한 좌의정 '권람'의 사위였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남이는 금수저 정도가 아니라 왕실과 최고 권력층이 얽힌 대단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남이'는 십 대에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 총애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무예가 뛰어났고 성품도 강직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귀성군 이준', '강순' 등과 함께 출전해 큰 공을 세웠고 적개공신 1등에 바카라록 되었다. 이어 건주위 여진 정벌에도 참여해 큰 무공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세조'는 이 젊은 무장에게 병조판서라는 막강한 자리를 맡겼다.
이십 대 병조판서였다.
당시에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남이'는 '귀성군 이준'과는 성격이 달랐다. 귀성군처럼 자신을 낮추고 감추기보다는 기개와 자부심을 드러내는 쪽에 가까웠다. 실록에도 '남이'가 스스로 대장이라 자부하고 다른 무사들을 가볍게 여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무엇보다 후대에 남이 그런 모습을 상징하는 시가 전한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 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지금 읽어도 대단한 호기와 기개다. 그러나 권력 한복판에서는 이런 넘치는 자신감이 때로 위험하게 읽힐 수도 있었다.
더구나 '예종' 즉위와 함께 분위기가 달라졌다. 즉위 당일 '남이'는 병조판서에서 의산군 겸 사복장으로 옮겨졌다.
겸사복은 왕을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정예 군사였지만 병조판서와는 정치적 위상이 달랐다. '남이'가 군권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분명했다.
이때쯤 '유자광'이라는 인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조선의 아이돌> 속 '유자광'은 '남이'와 형제의를 맺고 친형제처럼 지내며 함께 전장을 누빈다. '유자광'은 '남이'보다 무예가 뛰어나고 전장에서 '남이' 목숨까지 구해준다. 그러나 얼자 출신이라는 신분 한계를 가슴 깊숙이 한으로 품고 살아간다.
<조선의 아이돌> 소설에서는 바로 그 상처를 권력자들이 파고들면서 결국 형제 같은 '남이'를 고변하고, 그 죄바카라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인물로 그렸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 '유자광'은 훨씬 복잡한 인물이다. 후대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희대의 간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되어 왔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같은 큰 정치 사건에도 깊숙이 등장하고, '중종반정'에도 참여했다.
그래서 '유자광' 이야기는 뒤에서 따로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실제 '유자광'은 무예가 뛰어났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스스로 출전하겠다는 글을 올려 '세조' 눈에 들었다. 그리고 실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런 공으로 얼자출신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신분장벽을 뚫고 중앙정치 무대로 올라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신분 때문에 언제든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남이의 옥'은 결정적인 정치적 전환점이 된다.
어느 날 궁궐에서 숙직하던 '남이'가 혜성을 보며 말을 했다.
'유자광'은 그 말을 역모와 연결해 임금에게 고변했다.
실록에 따르면 '유자광'은 '남이'가 나라에 큰 상사가 있어 인심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간신이 난을 일으키면 자신들이 먼저 죽을 것이라며 '미리 선수를 치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고했다.
'예종'은 즉시 '남이'를 붙잡아 직접 국문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또 하나 이야기가 있다.
'남이' 시 가운데
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이라는 구절을 '유자광'이
男兒二十未得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으로 바꾸어 역모 증거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나 역시 <조선의 아이돌>에서 남이 시를 중요한 장치로 사용했다.
다만 이 대목은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 고변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예종실록' 남이 국문 기사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역사 글에서는 후대에 널리 전해진 이야기로 보는 것이 맞다.
소설에서는 바로 그 전승을 가져와 극적인 장치로 활용했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실제 국문 과정 역시 충분히 충격적이다.
고문이 이어지며 여러 사람들이 붙잡혀 오는 과정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나온다. 이건 실록에 실린 이야기이다.
남이가 어머니와 '강상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강상죄는 여기서 밝히기 그렇다. 여러분들이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고문에 이런 모욕까지 견디지 못한 '남이'는 자포자기해서 자신이 역모를 꾀했다고 자백하면서 변방을 같이 다녔던 늙은 장수 '강순'까지 끌어들였다.
강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
'강순'은 처음에는 강하게 부인했다.
'내가 어찌 너와 더불어 모의하였느냐?'
그러자 '남이'가 말했다.
"영공은 내가 이토록 고문을 당하고 모욕을 당해도 나에 대해 변명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그런 만큼 나와 같이 죽는 것이 옳다. 또 영공은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늙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나, 나 같은 것은 나이가 겨우 스물여섯인데 진실로 애석하다."
그러자 강순이 탄식했다.
"나야 나이가 있으니 죽어도 되지만 역모죄가 나 하나로 끝나더냐?
'영웅의 재주를 잘못 썼구나!'
결국 '강순' 역시 곤장을 견디지 못하고 자복했다. 그러면서 또 이런 말까지 했다.
"신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들어서 역모를 같이 했다고 하여도 믿겠습니까?"
이 말들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읽으면 섬뜩하다. 고문 속 자백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다.
결국 '남이', '강순' 등은 저자에서 환열형을 받고 목이 내걸렸다.
'예종'은 사건 직후 여러 신하를 익대공신으로 바카라봉했다.
'유자광'은 단숨에 익대공신 1등에 올랐다.
'남이'의 몰락과 '유자광'의 급부상은 불과 며칠 사이에 벌어졌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유자광'을 두고 '남이'를 모함해 출세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게 한 줄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유자광'은 이후 권력 싸움과 사화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 죽음에 관여한 인물로 기록된다.
그래서 오랫동안 간신 대명사처럼 남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 한계를 평생 짊어졌고, 때로는 노비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정바카라을 주장하다 정치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고향 남원 일대에는 '유자광'을 중앙 정치 기록과는 다르게 백성들의 영웅으로 기억하는 전승들도 남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희대의 간신 유자광'이라는 한마디만으로는 이 인물 전체를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그런 점이 역사에서 가장 재미있다.
한쪽 기록에서는 영웅이고 다른 쪽 기록에서는 역적이다.
한 사람은 젊은 나이에 처형되어 후대에 영웅이 되고 신령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살아남아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지만 후세에는 간신으로 기억되었다.
'남이'와 '유자광'이다.
그러나 역사 뒷면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는 역사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또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 뒷면을 계속 들여다보고 싶다.
기록에 적힌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이 침묵한 부분은 침묵한 부분대로.
그리고 그 틈에서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을 했을지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역사 글과 역사소설을 함께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 편에서는 '남이의 옥' 이후 '예종'이 어떤 정치를 펼쳤는지, 그리고 스무 살의 젊은 왕이 왜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지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한다.
'예종 2'가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세 번째 사진은 무속신앙 속 '남이장군'.
('남이'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비극적으로 죽었다. 무속에서는 억울하거나 한을 품은 채 죽은 인물이 강한 영험을 지닌 신령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있다. 후대 민간에서 '남이'의 죽음을 억울하고 안타깝게 기억하고 신격화했다는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죽은 '남이'를 그림에서는 너무 나이 든 장군처럼 그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