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시선 제69화

이의리의 투구

야구의 시선

- 157km의 함정, 고척에서 무너진 KIA의 9회


야구에서 5점 차는 크다. 더구나 8회까지 7대2라면 승리는 거의 손에 들어온 듯 보인다.


그러나 야구에는 ‘거의’라는 말이 없다.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기 전까지 경기는 끝난 것이 아니다.


8월 23일 일요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가 그 사실을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줬다.


KIA는 8회까지 7대2로 앞섰다. 선발 제임스 네일은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고, 김도영과 김태군은 홈런을 터뜨렸다. 전날 키움 에이스 안우진에게 막혀 1대3으로 패했던 KIA로서는 이날 승리로 분위기를 되돌려야 했다.


그러나 9회말 모든 것이 뒤집혔다.


결과는 7대8. 키움 김재현의 2사 만루 끝내기 홈런이었다. KIA는 9회말에만 무려 6점을 내주며 믿기 어려운 역전패를 당했다. 키움은 이 승리로 주말 3연전 위닝시리즈를 가져갔고, KIA는 60승 50패 2무가 됐다.



- 7대2, 그리고 시작된 불길한 9회


KIA는 9회말 이태양을 마운드에 올렸다.


하지만 빗맞은 안타까지 이어지면서 주자가 쌓였고 결국 만루 위기를 맞았다. 다 잡은 경기라고 생각했던 벤치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최근 KIA 불펜에서 가장 강력한 공을 던지고 있던 이의리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 이의리는 3경기 연속 세이브를 기록하며 KIA의 상승세를 지켜냈다. 19일 한화전에서도 세이브를 올리며 팀의 4연승을 완성했다.


그런 이의리에게 5점의 리드를 지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야구는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의리는 키움의 데이비슨에게 적시타를 허용했고 점수는 7대4까지 좁혀졌다. 안치홍에게 볼넷을 내주면서 위기는 계속됐다. 이후 삼진을 잡으며 아웃카운트 두 개까지 만들었다.


이제 하나만 잡으면 됐다.


타석에는 김재현.


그리고 카운트는 2볼 2스트라이크.


이 순간 이의리가 선택한 공은 다시 직구였다.


김재현의 방망이가 돌아갔다.


공은 담장을 넘어갔다.


끝내기 만루홈런.


7대2가 7대8이 되는 데는 9회말 한 이닝이면 충분했다.


- 157km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이날 패배를 단순히 “이의리가 홈런을 맞았다” 정도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어떻게 맞았느냐’이다.


이의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누가 뭐래도 직구다.


시속 152~157km를 오가는 좌완의 강속구는 분명 위력적이다. 타자가 처음 상대하면 배트가 공의 속도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


그러나 프로야구 1군 타자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처음에는 헛스윙을 하더라도 두 번째에는 파울을 만든다. 세 번째에는 타이밍을 맞춘다. 계속 같은 계열의 공이 들어온다는 확신이 생기면 155km도 결국 ‘예측 가능한 공’이 된다.


빠른 공의 위력은 속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느린 공이 있기 때문에 빠른 공이 더 빠르게 보인다.


변화구가 있기 때문에 직구가 살아난다.


높은 공과 낮은 공, 몸쪽과 바깥쪽이 섞여야 가운데 직구가 더 위력적이 된다.


그런데 이날 결정적인 승부에서 이의리의 투구는 지나치게 직구에 의존했다.


타자들이 파울을 만들어내면서 직구 타이밍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면 한 번쯤 변화구로 타자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체인지업이든 슬라이더든 커브든 상관없다.


스트라이크를 잡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직구만 기다릴 수는 없다.”


타자에게 그 생각 하나만 심어줘도 다음 직구의 위력은 달라진다.


그 점에서 이날 승부는 이의리 혼자만의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포수 김태군과의 볼 배합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험 많은 포수라면 투수의 가장 좋은 공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 강속구 투수가 빠지기 쉬운 함정


강속구 투수에게는 특별한 유혹이 있다.


‘내 공을 알고도 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이다.


150km 후반의 공을 던지는 투수라면 그런 생각을 할 만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타자를 힘으로 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감과 과신 사이에는 아주 얇은 경계선이 있다.


특히 1군 무대에서는 상대 타자의 이름값으로 승부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리그 최하위 팀이든, 유명한 중심타자든, 출전 기회가 많지 않은 타자든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 똑같은 프로야구 1군 타자다.


김재현은 바로 그 사실을 한 방으로 증명했다.


키움의 김재현

KIA 입장에서 보면 가장 뼈아픈 것은 홈런 하나가 아니다.


‘이 정도 직구라면 정면 승부해도 된다’는 생각이 불러온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이다.


야구에서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곧 자신의 무기를 더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네일의 10승도, 김도영의 홈런도 사라졌다


그래서 이날 패배가 더욱 아프다.


선발 네일은 6이닝 2실점으로 제 몫을 다했다. 그러나 시즌 10승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김도영의 홈런도, 김태군의 홈런도 승리의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


야구에서 선발투수의 호투와 중심타자의 홈런은 보통 승리의 공식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9회 한 이닝에 날려버렸다.


이런 패배는 단순한 ‘1패’보다 무섭다.


선수들의 머릿속에 남기 때문이다.


“5점 차도 안전하지 않다.”


그 생각이 불펜투수들에게 생기면 공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지고, 야수들에게 번지면 경기 후반의 플레이가 경직될 수 있다.


반대로 상대팀에는 정반대의 기억이 생긴다.


“끝까지 하면 뒤집을 수 있다.”


그래서 야구에서 흐름이라는 것을 무시하기 어렵다.


- 문제는 다음 경기다


KIA는 이제 이날 패배를 빨리 정리해야 한다.


시즌 막판 순위 싸움에서는 한 경기의 가치가 4월이나 5월과 다르다. 더구나 하위권 팀을 상대로 7대2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위닝시리즈까지 내줬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다.


문제는 이 충격이 다음 주까지 이어지느냐이다.


야구는 묘하다.


한 경기에서 무너진 불펜이 며칠 동안 흔들릴 수도 있고, 한 번 식어버린 타선이 연쇄적으로 침묵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KIA가 해야 할 일은 이날 패배의 바카라임자를 찾는 것이 아니다.


‘왜 7대2가 7대8이 되었는가’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마무리 운용은 적절했는가.


이태양의 교체 시점은 어땠는가.


이의리에게 지나치게 직구 승부를 주문하지는 않았는가.


타자가 직구 타이밍에 적응하고 있다는 신호를 배터리가 읽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의리가 결정적인 순간 사용할 수 있는 변화구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 이의리에게는 오히려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날 경기가 이의리의 야구 인생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남았으면 한다.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자신의 약점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57km는 대단하다.


좌완투수가 그 정도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자산이다.


하지만 157km보다 더 무서운 투수는 타자가 157km를 기다리고 있을 때 130km대 변화구를 던질 수 있는 투수다.


그리고 그 변화구를 의식하는 순간 다시 155km의 직구를 꽂아 넣는 투수다.


그때 비로소 ‘빠른 투수’가 아니라 ‘무서운 투수’가 된다.


이의리는 일본 연수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지적받았던 제구가 상당히 안정됐고, 구속 역시 더욱 강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직구를 더 빠르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직구를 더 무섭게 만드는 투구를 배워야 한다.


변화구 하나를 확실하게 장착하고 타자의 시선과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다면 157km는 지금보다 훨씬 위력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 ‘고척 참사’를 교훈으로 바꿀 수 있을까


KIA 팬들에게 이날 경기는 또 하나의 ‘고척 참사’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8회까지 7대2.


9회말 2아웃.


그리고 7대8.


이보다 극적인 추락도 흔치 않다.


하지만 긴 시즌을 치르다 보면 이런 경기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참사를 당하지 않는 팀이 되는 것이 아니다. 프로야구에서 그런 팀은 없다.


중요한 것은 참사를 ‘교훈’으로 바꾸는 팀이 되는 것이다.


이의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 맞은 끝내기 만루홈런을 잊어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오래 기억했으면 한다.


타자는 157km에도 적응한다는 것.


빠른 공 하나만으로는 최고의 마무리가 될 수 없다는 것.


이름 없는 타자도 1군 타석에 서는 순간 결코 얕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최고의 직구는 최고의 변화구와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말이다.


야구는 때로 승리보다 패배에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8월 23일 고척의 9회말.


KIA에는 참사였지만, 이의리에게는 더 큰 투수가 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이닝이 될 수도 있다.


오늘의 157km는 담장을 넘어갔다.


그러나 그 한 방을 통해 이의리가 ‘속도’가 아니라 ‘투구’를 배우게 된다면, 오늘의 패배가 그의 야구 인생에서 반드시 나쁜 기억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 고척 참사를 바라보는 ‘야구의 시선’이다.


이의리는 확실한 변화구를 장착해야 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