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어런스(Clearance).
그 단어를 가만히 혀끝에 올려두면, 무언가를 말끔히 치워낸 자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공허와 동시에, 비로소 허락된 여백이 주는 기묘한 해방감이 전해진다. 우리는 대개 이 단어를 계절의 매듭에서, 혹은 어느 상품의 생애 주기가 다한 매대 위에서 마주한다. 주인이 밀어낸 재고들이 붉은 가격표를 달고 퇴장을 준비하는 풍경이다. 거기서 클리어런스는 과거의 잔상을 지워내고 새로운 계절의 자리를 마련하는, 지극히 효율적이고도 냉정한 비움의 행위이다. 먼지 쌓인 상자들이 창고 밖으로 밀려나고, 비워진 공간에는 다시금 낯선 신상들이 들어찰 준비를 한다. 이처럼 일상의 문법 안에서 클리어런스는 '쓸모가 다한 것'을 향한 작별 인사와도 같다.
그러나 이 단어의 쓰임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층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하늘을 부유하던 거대한 여객기가 활주로에 발을 내딛기 전, 관제탑으로부터 간절히 기다리는 ‘클리어드(Cleared)’라는 승인은 단순한 기계적 신호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허락이다.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었으며 이제는 안전하게 내려앉아도 좋다는 안도의 선언인 셈이다.
우리의 몸 안에서도 이 정화의 과정은 소리 없이 흐른다. 신장은 혈액 속의 노폐물을 걸러내며 매 순간 ‘클리어런스’를 단행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독소를 밀어내지 못하면 육체는 자신의 무게에 잠식당하고 마는데, 여기서의 비움은 선택이 아닌 필사적인 방어 기제이다. 비워내지 않으면 채울 수 없고, 밀어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명의 명령이 이 단어 속에 깃들어 있다.
IT의 세계와 기계의 정교한 메커니즘 속에서도 이 비움의 미학은 서늘하게 유효하다. 서버의 부하를 견디기 위해 켜켜이 쌓인 로그 파일을 지워내 공간을 확보하고, 톱니바퀴 사이에 아주 미세한 유격(Clearance)을 두어 마찰로 인한 파열을 막는 일이다. 너무 꽉 짜인 시스템은 작은 열기에도 숨이 막혀 멈춰버리고 만다. 0과 1 사이의 여백, 부품과 부품 사이의 그 미세한 틈이 있어야만 거대한 시스템도, 우리의 일상도 비로소 부드럽게 숨을 쉬며 돌아갈 수 있다는 역설을 이 기술적 용어는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너무 밀착된 관계보다는 서로를 숨 쉬게 하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과도 닮아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클리어런스는 초록빛 그라운드 위, 하얀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비장한 사투에 있다. 바로 ‘골라인 클리어런스(Goal-line Clearance)’이다. 골키퍼마저 무너지고 공격수의 발을 떠난 공이 빈 골문을 향해 무력하게 굴러가는 찰나를 응시한다. 모두가 실점을 예감하며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어디선가 전력으로 질주해 온 수비수가 몸을 던진다. 이미 반쯤은 선을 넘은 듯 보이는 그 절박한 경계에서 발끝으로 공을 걷어내는 장면은, 스포츠의 문법을 넘어선 생의 날것 그대로인 의지이다.
대개 축구의 환희는 공이 그물을 흔드는 순간 폭발한다. 화려한 골세리머니를 펼치는 공격수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지만, 골라인 클리어런스를 해낸 수비수의 뒷모습에는 그에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비장한 감동이 서려 있다. 공격수의 한 골이 ‘성취’라면, 수비수의 클리어런스는 ‘사수’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일보다, 무너져가는 유(有)를 지켜내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일은 때로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관객들은 득점의 순간에 열광하지만, 골라인 바로 위에서 공을 걷어내는 수비수를 향해선 경외에 가까운 찬사를 보낸다. 그것은 패배의 운명을 거부하는 인간의 숭고한 저항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 비장한 장면 위로 황새의 부리에 머리가 박힌 채 잡아먹히기 직전인 개구리의 삽화가 겹쳐진다. 마지막 힘을 다해 황새의 목을 조르며 ‘절대 포기하지 마라(Never, Ever Give Up)’라고 웅변하던 그 가느다란 팔뚝의 떨림. 골라인 클리어런스는 바로 그 개구리의 뒷심이 그라운드 위에 구현된 기적과도 같다. 2019년의 어느 경기에서 수비수 존 스톤스가 걷어낸 공이 골라인을 넘지 않은 거리는 단 11.7mm였다. 손가락 한 마디조차 되지 않는 그 미세한 틈이 축구의 역사를 바꾸고 승패의 향방을 가른다. 11.7mm,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만 허락된 신의 클리어런스이다.
이 11.7mm의 공간은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 심리적인 한계선을 상징한다. 공격수가 쏘아 올린 공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의 성벽을 허물려 할 때, 우리는 종종 '이미 늦었다'는 판단을 내리곤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뇌의 판단보다 앞서 근육의 기억을 깨운다. 한 번 걷어낸 공이 다시 적의 발 앞에 떨어지고, 두 번 세 번 파상공세가 이어져도 기어이 몸으로 벽을 세우는 그 처절함. 그것은 단순히 승리를 탐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할 마지막 경계선에 대한 예우이다.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눈을 감지 않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마법, 그것이 바로 클리어런스가 지닌 진정한 가치이다.
우리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련들 앞에 매 순간 골문을 위협받는다. 무거운 바카라임감, 예상치 못한 실패의 기록들, 혹은 스스로의 자만이 만들어낸 사각지대에서 절망은 예고 없이 우리 생의 골라인을 향해 굴러온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포기를 떠올리며 뒷걸음질 치곤 한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고, 내 힘으로 막기에는 공이 너무 무겁고 빠르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작은 순간들, 예컨대 사랑니를 뽑아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혹은 밤새워 서버의 오류를 수정하며 손가락 끝의 감각이 마비되어 갈 때도, 우리는 저마다의 골라인 클리어런스를 수행하고 있다.
골라인 클리어런스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큰 위로는 ‘이미 굴러간 공’이 아니라 ‘아직 넘지 않은 선’에 집중하게 한다는 점이다. 11.7mm가 남았다면 그것은 아직 실점이 아니며, 우리의 생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뜨거운 고백이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공격수가 쏜 공이 골문을 통과하기 직전이라 할지라도, 아직 발끝을 뻗을 공간이 남아 있다면 기회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비록 일상의 문법이 냉정한 클리어런스 세일처럼 우리에게 효율과 비움을 강요할지라도,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만큼은 끝까지 사수해야 할 골라인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절망이 내 삶의 문턱을 넘으려 할 때, 사력을 다해 그 공을 밀어내는 행위는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렬한 저항이다. 그것은 마치 흙의 속살을 간직한 석기가 뜨거운 가마 속에서 제 몸을 견뎌내며 단단해지는 과정과도 같다. 부서진 조각을 다시 붙이려 애쓰던 실패의 기록마저도, 결국은 그 자리에 머물며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무모해 보이는 몰입, 빗방울을 세거나 선풍기 날개를 쫓던 그 ‘쓸데없는 짓’들이 실은 우리의 생을 지키는 단단한 근육이 되어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비록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따를지라도, 그 찰나의 클리어런스를 해낼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기르며 살아가고 싶다. 나에게도 그런 클리어런스를 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그라운드 위의 수비수가 보여준 그 불굴의 의지를 때로는 기억하고 싶다. 그는 화려한 골을 넣지는 못했어도, 패배라는 어둠으로부터 팀을 구해낸 빛나는 수호자였다. 우리 역시 삶의 매 순간을 그렇게 지켜내고 있는 이름 없는 수비수들이다.
공은 끊임없이 굴러오고 나는 여전히 그 선 위에 서 있다. 포기라는 쉬운 길 대신, 몸을 던져 공을 밀어내는 어려운 길을 택하겠다는 결연함. 11.7mm의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끝까지 공을 응시하는 나의 눈동자 속에 머물고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선언과 함께, 나는 다시금 나의 골라인 앞에 선다. 굴러오는 모든 절망을 향해, 나의 온 생애를 던져 가장 아름다운 클리어런스를 해내겠노라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