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공작원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유산

by루비하루


​삼우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족들은 내게 "그 강인한 생명력이 너에게도 흐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국가유공자 단체에서 조문을 왔다. 그제야 아버지의 숨겨진 과거가 공식적인 사실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20대 초반, 북파공작원으로서 사선을 넘나들던 분이었다. 함께 갔던 동료들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생존했다.
​그러나 사선에서 살아남은 대가는 혹독했다. 제대 후 아버지가 시도한 사업과 일들은 번번이 실패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서려 했던 40대 중반의 딱 1년, 당뇨 합병증이 찾아왔고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그렇게 가장으로서의 경제력을 상실한 채, 아버지는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긴 세월을 버텨내셨다.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얼룩져 있었다.
​우리 집에 세를 살던 친구 가족이 신축 빌라로 이사를 나갈 때, 우리 집은 있던 집을 팔고, 땅을 팔며 점점 더 가난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자라 자녀를 키우고 부동산 투자를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자산과 가난의 구조를 깨닫기 시작했다.
​친정에 갈 때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억지로는 안 된다. 욕심부리지 마라."
​그 시절의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고, 그의 인생에 관심이 없었다. 가난한 집, 경제력을 잃은 아버지라는 사실만이 내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것도 내가 이미 공무원이 된 후의 일이었기에, 그 명예조차 내 유년의 가난을 상쇄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뇌종양 수술과 장애라는 시련을 겪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배웅한 지금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삶이 재해석된다.
​젊은 날 사선을 넘어 생존했던 기억, 제대 후 이어진 실패, 다리를 잃은 후에도 의족을 맞추고 투석을 견디며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고집스러운 생명력. 아버지가 말한 "억지로 안 된다"는 경고는 어쩌면 사선과 가난의 풍파를 모두 겪어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삶의 수긍이자 통찰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가난을 원망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몸에 흘렀던 그 질긴 생명력과 버텨내는 힘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완치되지 못한 몸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아버지가 남긴 진짜 유산은 그 강인한 삶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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