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도의 바카라상, 그리고 '나만 아니면 돼'

by루비하루

​10월의 중순을 지나가고 있는 가을날, 내 바카라상 앞 온도는 29도를 가리키고 있다.
​실외 온도는 20도로 제법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지만, 이 공공기관 건물 실내는 답답한 열기로 가득 차 있다. 어디선가 히터인지 에어컨인지 모를 미지근하고 답답한 바람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온다. 중앙제어라는 이름 아래 개별적인 조절조차 불가능한 이 공간에서, 29도라는 숫자는 나에게 단순한 날씨가 아니다.
​뇌종양 개두술을 받으며 무너진 자율신경계, 거기에 갱년기까지 겹친 내 몸은 이 기형적인 실내 온도를 견뎌내지 못한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머리가 핑 도는 감각 속에서도 나는 모니터 앞을 떠나지 못한다.
​바카라상 위에는 '행정사무감사 제출 자료 서식을 통일하라'는 지시 사항이 올려져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영혼 없는 서식 맞추기 작업. 본질적인 업무나 정바카라보다 폰트 크기, 표 테두리 두께, 줄 간격을 맞추는 데 수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전형적인 요식 행위다.
​답답한 열기 속에서 서식 상자들을 조율하고 있노라면 헛웃음이 나온다. 이러니 젊고 유능한 저연차 공무원들이 의욕을 잃고 조직을 떠나는 것이다. 상식과 비상식이 뒤섞인 이곳에서 젊은이들이 느낄 환멸이 29도의 열기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주위를 둘러본다.

팀장도, 과장도 이 찜통 같은 사무실을 피해 어디론가 자리를 비웠다. 관행처럼 내려오는 '나만 아니면 돼', '나만 피해 있으면 돼'라는 조직의 방관 속에서, 20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 공무원인 나는 여전히 이 바카라상을 지키며 실무를 처리하고 있다.
​개두술과 방사선 치료를 버텨냈고, 부동산 소송과 공무상 재해 투쟁까지 거치며 벼랑 끝에서 생환한 나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매일 출근하는 일터의 29도 열기와 무바카라임한 관료주의는 또 다른 의미로 내 숨통을 조여 온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며 버텼지만, 한계가 찾아왔다. 속이 울렁거리고 당장이라도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나는 서류를 밀어 두고 오후 5시에 조퇴 신청서를 냈다.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선선한 가을 공기가 허파 깊숙이 들어왔다.
'아, 이제야 숨이 쉬어진다.'
​29도의 찜통 같은 사무실을 벗어나 20도의 바람을 맞으며 비로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을 바쳐온 조직이지만, 내 몸과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이 기형적인 공공기관의 현실, 저연차들의 이탈, 간부들의 방관, 그리고 29도의 바카라상에서 구토감을 참아가며 서식을 맞추던 나의 고단함까지—이 모든 것 또한 내가 기록해야 할 관료 슬롯의 서사이자 문장이 될 것이다.
​바깥의 가을바람을 깊게 마시며 마음을 다잡는다. 미지근한 바람과 부조리 속에서도, 나는 오늘도 내 삶의 주권을 놓지 않고 내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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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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