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라 쓰고 가족이라 읽는 중
나는 사람이다. 하지만 절친은 사람보다 고양이에 가깝다.
특별히 어느 종을 사랑하는 방식은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은 내게 함께라는 시간과 공간을 나눠주었고 우리는 늘 함께가 되었다. 거창한 선언도, 특별한 계약도 없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다친 아기고양이가 첫째가 되었다. 그렇게 그릇이 하나둘 늘었다. 조그만 발이 제법 단단해졌다. 발자국이 하나둘 덧입히고 그들의 자리가 늘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보다 고양이가 많은 우리가 되었다.
세월은 그렇게 나에게 여덟 마리의 절친을 챙겨주었다. 한집에서 자라도 다 같은 성격이 아니듯, 나는 그들의 목소리, 행동, 표정을 일일이 기억한다. 여덟 개의 시선이 집안에 겹친다. 말없이 통하는 세계. 긴 시간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았다.
그중 한 녀석을 작년에 무지개 너머로 보냈다.
집안의 공기는 조금 달라졌고 하나의 밥그릇이 치워졌다. 마음이 그 빈 공간을 어루만진다. 가끔은 산바카라하듯 이름을 불러본다. 조용히 누운 자리엔 남은 절친들의 등이 다가온다.
나는 안다. 그 존재만으로 내가 안정된다는 것을. 그것은 조용한 위로이며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보여주는 행동이다. 아무 경계심 없이 자신의 등을 보이는 것은 무한한 신뢰이자 나를 향한 애정이다.
내가 어떤 상태이든 그들은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으로 나를 위로한다.
조금 가까이 더 가까이 등을 대고 눕는다. 나는 그들의 세상을 안는다.
규칙과 바카라임의 기준이 다소 높은 내게, 관계와 만남은 피로를 만들기 일쑤였고, 나는 자주 지쳤다. 그런 나를 잡아주는 것이 이 말 없는 행동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힘, 그 말 없는 자세가 나를 세운다. 나는 그들에게 안정을 배운다. 그들은 눈빛으로 말한다. 그들은 작은 철학자이며 나의 스승이 된다.
우리의 역할은 자주 이렇게 전환된다.
삶은 때때로 다름을 오해한다. 이해받기 위해 설명해야 하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 슬롯적 울타리에도 잠시 머물러야 한다. 나는 그것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절차와 기준대로, 사적인 자리에서도 나의 기준이 있다. 이런 사람은 감정을 나누는 방식에서 조금 모자라다. 그래서 나는 모자란 사람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차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몇몇일 뿐, 대부분의 관계에서 나는 피곤하다. 나를 소모하지 않고 오롯이 나를 위해 쓰는 시간에서만 신이 난다.
높은 곳에 올라가도 굳이 아래를 내려보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편한 자리에 앉는다. 누군가를 이기려 하지 않고, 비교하지도 않는다. 배가 부르면 그만 먹고, 졸리면 잔다. 싫으면 돌아선다. 좋으면 다가온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깊다.
평소와 같은 속도로 걸어오고, 평소와 같은 자리에서 몸을 웅크린다. 이들은 자기 기준이 분명하다. 그 기준은 타인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지킨다. 나는 그 일관성을 오래 지켜본다.
고양이와 살다 보면,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누군가에게 유용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그저 숨 쉬는 순간이 허락되는 공간. 나는 그 곁에서 비로소 내가 된다.
말 대신 시선이 오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다.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렇게 눈빛으로 소통한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이런 단순한 교감은 더 선명해진다.
아침의 사료 소리, 햇살 아래 몰려오는 졸음, 밤의 우다다까지. 계절이 바뀌어도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를 통과한다. 나와 그들은 서로에게 등을 보인다.
시간은 우리에게 하나씩 잊힘을 안겨 줄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통과의례일 뿐 그마저도 삶의 일부다.
나는 조용히 남아서 그들의 등을 볼 것이다. 곁에 존재함으로써 위로가 되는 모습으로.
나는 고양이와 산다.
그리고 그 덕분에, 조금 더 나답게 산다.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