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우주
1부. 욕망을 파헤치다 마주한 거대한 질문
제3장. 욕망의 탄생
이제 생명이라는 것이 우주의 반쪽인 물리의 형태와 나머지 우주의 반쪽인 무의식을 포함한 우주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우주가 생명을 빚은 것은 그것을 한 번 만들어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생명을 통해 그 오랜 물음 — 나는 누구인가 — 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잠깐 반짝이고 사라져서는 안 된다. 두 세계가 맞닿은 그 자리가 흩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유지되어야, 그 안에서 무언가를 알아낼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명이 짊어져야 하는 근원적인 목적이 탄생했다.
그것은 생존.
생명은 한쪽 발을 물리의 세계에 딛고 있는 존재이며, 물리 우주의 거대한 법칙*은 언제나 소멸과 흩어짐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생명은 이 척박한 물리 세계에서 기어이 ‘살아남아야’ 했다. 소멸로 향하는 물리의 파도를 거슬러, 자신의 존재를 단 1초라도 더 연장하려는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흩어지려는 껍데기를 하나로 묶어두고, 어떻게든 이 물리적 형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맹목적이고도 끈질긴 에너지. 그것이 바로 ‘욕망’의 탄생 이유다.
나는 여기까지 사유하고, 내 생각이 흘러가는 방향이 맞는지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생명에게 욕망이 그렇게나 중요하단 말인가?
오랜 시간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던 구도자와 철학자들은 일찍이 이 맹목적인 에너지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만물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본질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코나투스(Conatus)’라 불렀다. 그는 코나투스야말로 생명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며, 이것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 곧 '욕망'이 된다고 했다. 존재를 잃지 않으려는 절박한 관성이 곧 욕망이라는 것이다.
의지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 역시 우주와 생명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힘을 ‘살고자 하는 맹목적 의지(Will to live)’로 정의했다. 이 의지는 이성이나 논리보다 앞서며, 오직 형태를 보존하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게 만든다.
수천 년 전, 붓다는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가장 깊은 뿌리를 ‘갈애(渴愛, Trishna)’라고 보았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맹렬한 갈증처럼 무언가를 갈구하는 이 힘이,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소멸하려는 육체를 물리적 세계(윤회)에 붙들어 매는 가장 강력한 닻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욕망이 생명의 유지, 생존에 필수라는 사실은 굳이 이런 그럴듯한 말이 필요하지 않다. 욕망이 없는 인간을 상상해보라.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우리가 흔히 터부시하고 억누르려 했던 욕망의 본질은, 사실 가장 처절한 생명 연장의 의지다. 배고픔을 느끼고 먹기를 욕망하는 것은 내 육체가 고갈되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고통을 피하고 안전을 욕망하는 것은 나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누군가를 원하고 결합하여 후대를 남기려는 욕망은, 유한한 육체의 한계를 넘어 나의 존재를 시간 너머로까지 길게 이어가려는 가장 본능적인 생존 방식이다.
결국 생명은 살아남아야만 했고, 그것을 위해 끝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갈구해야만 했다. 욕망하지 않는 생명은 가혹한 물리의 세계에서 결코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소멸하려는 세계 속에서 존재를 유지하려는 이 처절한 몸부림. 생명을 생명이게 하고, 생존을 가능케 하는 이 절대적인 동력이 곧 욕망이다. 욕망은 생존을 위해, 생명의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욕망을 알아갈수록, 나는 상반된 두 사실 앞에 서게 된다. 욕망이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욕망을 다스리고 경계하라 배워왔다는 것.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바로 그 힘을, 정작 우리는 억누르며 살아가라 배운 것이다. 이 모순은 조금 뒤에 다시 마주하기로 하고, 우선 그 욕망을 다루기 위해 무엇이 생겨났는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