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우주
1부. 욕망을 파헤치다 마주한 거대한 질문
제5장. 자아의 진화, 그리고 그 대가
자아는 물리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참으로 훌륭한 도구였다. 하지만 도구가 제 일을 너무 잘 해낸 끝에 주인의 자리마저 차지하는 일 — 자아에게도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초기의 자아는 그저 생존을 위해 굶어 죽지 않고, 포식자의 발톱을 피하는 일과 같은 것에 집중했다. 욕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그러다가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물리적인 생존의 위협이 줄어들자, 자아는 멈추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생존’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당장 오늘 먹을 것이 충족되어도 내일의 기아를 염려하도록 욕망을 이용했고, 비바람을 피할 동굴을 구하고 나면 남들보다 더 거대하고 견고한 성벽을 원하도록 만들었다.
요즘은 어떠한가?
처음에 생존을 위한 욕망이 있었고, 그 욕망을 다루기 위해 자아가 탄생했으나, 지금의 자아는 과연 생존을 위해 욕망을 지휘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이제 불을 길들이고, 씨앗을 심고, 강을 막아 물을 가둔다. 추위를 막을 집을 짓고, 병을 다스릴 약을 만들고, 죽음을 한 해 한 해 뒤로 미루고 있다. 한때 인간을 떨게 했던 맹수도, 굶주림도, 어둠도 이제 대부분 정복되었다.
그런 생존의 방해물들이 많은 영역에서 정복된 지금, 자아는 어디에 욕망을 사용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시대의 욕망은 타인과의 비교, 슬롯적 지위, 권력과 부의 축적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아는 물리적 세계에서 ‘나’라는 개체를 남들보다 더 돋보이고,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끝없이 연산하고 팽창하며 비대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욕망들이 예전과 같은 진정한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가?
이제 욕망은 처음의 목적인 생존을 잃고 타락한 것일까?
나는 이것을 타락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이다. 자아가 지금처럼 비대해진 것은 그것이 나쁘게 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너무 잘 작동했기 때문이다. 잘 드는 칼이 결국 모든 것을 베려 들듯, 유능한 도구는 본성적으로 모든 자원을 자기 목적으로 끌어모은다. 자아에게 주어진 명령은 단 하나, 욕망을 활용하여 '살아남아라'였다. 그리고 그 명령에는 끝이 없었다. 자아에게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라는 신호가 없다. 얼마나 살아남아야 충분히 살아남은 것인지, 그 설계도에는 적혀 있지 않다. 그래서 진짜 위협이 사라진 뒤에도 자아는 멈추지 못한다. 위협을 찾도록 만들어진 기관은, 위협이 없으면 위협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욕망은 타락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껍질을 추가하였을 뿐이다. 최초의 목적이었던 생존이라는 욕망 이외에, 자아가 만들어 낸 새로운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짜 욕망인 껍질을. 죽음을 멀찍이 미뤄두고도, 남보다 뒤처지는 것을 마치 죽음처럼 두려워하는 것. 실질적인 위협은 없으나, 진짜 생존과 똑같은 공포와 절박함으로 타오르는 위기. 이것은 가짜 생존 욕구이며 욕망이 끝없이 작동해야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욕망에 대해 묻게 만들었던 그 소설 속 인물들이 바로 그러했다.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가졌으면서도 더 화려한 사랑을 갈망하다 스스로를 무너뜨린 보바리. 살아남았고 부유해졌으면서도 데이지라는 환영을 좇다 끝내 스러져간 개츠비. 그들은 생존 때문에 욕망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뒤에도 멈추지 못하는 엔진이, 새로운 표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비극은 도무지 꺼지지 않는 자아라는 엔진이, 본래의 임무를 완수하고도 꺼지는 법을 몰라, 끝내 넘쳐버린 힘이 스스로를 불태워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오늘의 풍요는 우리를 물리적으로 평온하게는 해주었지만, 의식의 측면에서는 더 깊은 위협과 불안을 찾아 헤매게 만들었다. 막아야 할 진짜 맹수가 사라진 자리에서, 위협을 감지하도록 만들어진 자아는 감도를 한껏 끌어올려 사방에서 적을 찾아내야 했으니까.
나의 이미지, 나의 쓸모, 나와 남의 끝없는 비교.
우리는 더 이상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척하기 위해, 살아남았다는 감각을 위조하기 위해 매일의 기력을 태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쉼 없는 추격 속에서, 가장 깊은 곳의 것이 점점 더 깊이 묻혀갔다.
태초의 우주가 품었던 그 물음, 나는 누구인가. 그것을 간직한 무의식은 본래 우리 안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자아에게, 그 물음은 너무나 한가하고 너무나 쓸모없는 것이었다. 잠시 멈추어 그 물음에 귀를 기울이려 하면, 자아는 즉시 새로운 위협을, 새로운 결핍을, 새로운 가짜 생존의 과제를 들이밀었다.
어떠한가? 자아의 진화로 인해 그저 생명으로 탄생한 인간이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 결론이. 그럴듯한가?
그렇다면 생명이 탄생하게 된 태초의 질문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그 태초의 질문을 기억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