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우주
1부. 욕망을 파헤치다 마주한 거대한 질문
제1장. 욕망은 생명의 본질인가
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 쓴 소설을 다시 써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쓰는 동안, 욕망 없는 인물이 얼마나 재미없고, 극적이지 않은가를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내가 받은 교육은 욕망에 휩싸이지 말라고, 욕망을 드러내지 말라고, 욕망을 감추거나 참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내가 쓴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 기어이 무언가를 욕망해야만 하는가. 욕망 없는 인간은 왜 이토록 큰 결함처럼, 텅 빈 껍데기처럼 느껴지는가.
나는 훌륭하다는 평을 가진 다른 소설들을 살펴보았다.
<마담 보바리>에서 평범하고 지루한 시골 의사의 아내인 보바리가 낭만적인 소설들을 읽으며 ‘더 화려하고 극적인 사랑과 삶’을 꿈꾼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가난했던 청년 개츠비가 ‘데이지’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부와 상류슬롯의 삶, 그리고 완벽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맹목적인 욕망을 보았다.
<싯다르타>에서는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연소시킴으로써 그 덧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강물 앞에서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과정을, <달과 6펜스>에서는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과 가정을 버리고 오직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거대한 예술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을 보았다.
각기 다른 모습이었으나, 모두가 욕망이었다. 어느 것도, 욕망 없이는 이야기가 되지 못했다.
문학에서 ‘욕망’은 이야기의 심장과도 같다고 한다. 역시 그러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분명 참으라 배웠던 그것이, 사람을 진짜 사람이게 만드는 그것이라는 말인가?
나는 이 모순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욕망에 대해 탐구해 보기로 했다.
욕망은 생명의 본질인가. 욕망 없는 생명은 가능한가. 그리고 도대체 왜 생명은 욕망에 뒤따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욕망을 욕망하는가.
이 물음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니, 나는 증명할 수 없는 영역까지 가게 되었다. 무의식이 우주적이라거나, 태초에 하나의 존재가 자신을 알기 위해 스스로를 깨뜨렸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현미경으로도 망원경으로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이 우주의 생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그럴듯한 이야기'라 불렀듯, 어떤 물음들은 증명이 아니라 사변으로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잠시 신화의 형식을 빌리려 한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더 멀리에 닿기 위한, 나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방식이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하나의 우주론적 신화이며, 동시에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꽤나 실제적인 진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