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우주
1부. 욕망을 파헤치다 마주한 거대한 질문
제2정. 그렇다면 생명이란
흔히 욕망을 생존의 도구라 말한다. 먹기를 욕망해야 하루의 삶이 유지되고, 안전을 욕망해야 일생의 삶이 유지되며, 결합을 욕망해야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이 문장을 적고 가만히 들여다 보니,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욕망은 생명 이후의 것이며,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욕망보다 먼저 존재하는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욕망보다 더 앞으로 가야 했다. 생명보다도 앞, 시간이라는 것이 시작되기도 전으로.
태초에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자기 바깥이 없어 자신을 비춰볼 거울조차 갖지 못한 존재. 그것은 너무 완전해서, 오히려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윤곽조차 가질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 존재의 안에서 단 하나의 균열이 일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
이 물음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답하려면 자기를 마주 볼 또 다른 자기가 있어야 했는데, 그 존재에게는 바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답을 찾는 대신, 자기 자신을 깨뜨리기로 했다. 하나였던 것을 둘로 쪼개어, 한쪽이 다른 쪽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보통 나를 찾는 일을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에 비유하는 연유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빅뱅이라 부르는 사건은 그 깨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빅뱅의 순간에 두 개의 세계가 함께 태어났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물리적인 물질로 펼쳐지는 세계 — 입자와 빛, 훗날의 별과 은하가 될 거대한 거울. 다른 하나는 물리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미지의 세계. 이 글은 앞의 것을 물리의 세계라, 뒤의 것을 무의식의 세계라 부르려 한다.
이는 단순한 나의 몽상이나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인류가 남긴 과거의 신화와 고대 우주론들을 들여다보면, 우주를 그저 텅 빈 물리적 공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와 연결된 곳으로 보았던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므로.
고대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자 형태가 없는 근원의 존재인 '브라만(Brahman)'을 이야기한다. 문헌에 따르면 이 절대자는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해 "내가 여럿이 되리라, 번성하리라"라고 욕망하며 스스로를 나누어 만물과 생명을 창조했다. 완벽하고 바깥이 없던 존재가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분열을 택했다는 것이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철학인 『도덕경』의 우주론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형태도 이름도 없는 절대적인 '도(道)'에서 하나가 나오고, 그 하나가 다시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세계로 쪼개지며 만물을 형성했다는 사상이다. 만질 수 없는 근원의 세계(무의식)와 형체를 가진 현상의 세계(물리)가 동시에 탄생하여 맞물려 돌아간다는 앎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류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양의 신화도 예외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 오르페우스교 신화에 등장하는 '우주란(Cosmic Egg)' 이야기나,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에서 무한한 존재(엔 소프)가 스스로를 수축시켜 물질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동시에 빚어냈다는 개념 모두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완전한 하나가 스스로의 껍질을 깨뜨려 두 개의 세계가 되었다'는 본질적인 서사를 공유한다.
결국 최초의 존재가 자신을 알기 위해 스스로를 깨뜨렸고, 그로 인해 물리와 무의식의 세계가 나뉘었다는 나의 상상은 수천 년 전 별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기원을 묻던 인류의 가장 오래된 대답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는 우주의 인지되지 않는 반쪽,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우주의 반쪽을 이야기하며 일반적인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된 본능'으로서의 무의식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밝힌다.
결국에는 같은 이야기로 수렴할 테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물리의 세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립자가 원소가 되고, 원소가 뭉쳐 별이 되고, 별이 모여 은하가 되었다. 무의식의 세계 역시 그만큼의 시간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장엄함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자신이 깨어진 이유 — 그 물음의 답 — 에는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했다.
왜 그러했을까? 그리고 그것이 생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주가 그토록 찬란한 별과 은하를 빚어내고도 자신의 기원에 답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두 세계가 영겁의 시간 동안 서로를 마주 보기만 할 뿐 끝내 맞닿지는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빛나는 항성도, 궤도를 도는 행성도,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모두 물리 법칙에 완벽하게 순응하였고, 그와 평행한 무의식의 세계도 그것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 것이다. 서로를 알고 함께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변하지 못하는 관계.
따라서 우주에게는 또 다른 거울이 필요했다. 그저 서로를 반사하기만 하는 두 개의 세계, 즉 죽은 거울이 아니라, 반사된 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스스로 움직이는 살아있는 거울. 즉, 쪼개지기 이전의 온전했던 ‘초우주’의 상태를 축소해 놓은 듯한 존재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변화하고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존재가, 다시 필요했다. 물리적인 형태를 띠고 현상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그 내면에는 무의식의 세계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존재. 두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마찰하고 상호작용하는 경이로운 교차점.
우주는 이 두 세계를 다시 이어 붙일 새로운 개념을 고안해냈고, 그것이 바로 ‘생명’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