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 엄마의 예고 입시 관찰기
학창 시절, 나는 수학을 열렬히 사랑했다. 다른 교과 시간에도 선생님의 눈을 피해 바카라상 밑으로 수학 문제를 풀 만큼 지독한 몰입이었다. 아무도 풀지 못하는 꼬이고 꼬인 난제를 차근차근 풀어내 마침내 답을 찾아냈을 때의 쾌감. 그것은 뾰족하고 위태롭던 내 사춘기를 무사히 건너게 해 준 유일한 비상구였다. 숫자가 주는 명확함과 수식이 주는 배반 없는 안정감이 좋았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다 소름 돋는 평행이론을 발견했다. 남편 역시 학창 시절 수학을 꽤나 잘했고, 좋아했다는 것이다. '역시 유유상종이구나' 싶었다. 숫자가 세상에서 가장 명확하다고 믿었던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이과 계열을 전공했고, 졸업 후 20여 년이 넘는 시간을 엔지니어로 살았다. 도면과 수식,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한 세계가 우리 삶의 전부였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기억 속엔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않은, 결이 전혀 다른 비밀방이 하나씩 있었다.
사실 나는 어릴 적 미술을 참 좋아했다. 큰 대회 공모전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고, 중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은 내 감각이 아깝다며 예고 진학을 넌지시 권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예술이란 나와 거리가 먼 세계라 여겼고,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그 호기심의 방문을 닫았다.
놀랍게도 남편의 비밀방 역시 같은 색깔이었다. 남편은 나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미술을 하고 싶어 했고 소질도 상당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님을 일찍 여읜 탓에 형편상 감히 미술을 하고 싶다는 철없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고 했다. 홀어머니께 자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도리는 그저 취업이 잘되는 공대에 가 하루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남편은 그렇게 꿈을 꾹꾹 눌러 담아둔 채 공대생이 되었다.
각자의 꿈을 접어둔 채 성인이 된 후 조우한 우리 부부. 꽤나 닮은 꼴의 성향을 가진 우리 둘이 만나 예쁜 딸아이를 낳았다.
딸은 아주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조물조물 손으로 만지는 걸 잘했다. 소근육이 남다르게 발달했는지 작은 손으로 그림도 곧잘 그렸다. 옛날 달력을 크게 한 장 떼어 주면 온종일 그 넓고 하얀 뒷면을 빽빽하게 채울 정도로 그리고, 자르고, 만들었다.
아이의 재능은 시각에만 머물지 않고 청각으로도 흘러 넘쳤다.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우쿨렐레를 신청해 주었는데 단 3개월 만에 1년 반을 배운 친구들을 능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강사 선생님마저 "이 아이는 타고난 소질이 굉장하네요"라며 혀를 내둘렀다. 내 안의 닫힌 호기심의 방과 남편의 눌러 담은 방, 그 두 문이 열리며 부모의 숨겨진 유전자가 아이에게로 온전히 흘러간 것만 같았다.
아이는 자라며 몇 번의 장래희망을 바꾸더니, 어느 날 불쑥 선언했다.
"엄마, 나 미술 하고 싶어. 예고에 갈래."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흔히들 말하는 '예술 하면 밥 벌어먹기 힘들다'는 세간의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23년을 엔지니어로 살며 철저히 안정적인 궤도 안에서만 움직여온 나에게 예술이라는 정답 없는 세계는 본능적인 불안함을 엄습하게 했다. '왜 하필 이 험하고 불안정한 길을 가려 할까.' 걱정이 앞서는 나와 달리, 남편은 단박에 아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겠노라 말했다. 아마 제 가슴에 묻었던 오랜 꿈을 거침없이 꺼내 드는 딸의 용기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결국 아이는 미술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선택했던 명확한 수학의 세계 대신, 정답도 없고 끝도 없는 캔버스 위로 아이는 제 인생의 첫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내가 수학 문제의 답을 찾아낼 때 느꼈던 그 짜릿한 몰입의 쾌감을 이제 아이는 붓 끝에서 느끼며 제 삶을 채워나갈 것이다.
공대생 부부의 닫힌 문을 열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예술. 나는 이제 이 낯설고 매혹적인 세계에서 기꺼이 딸아이의 가장 현실적인 페이스메이커가 되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