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봄날』을 읽고

김정희(호랑)작가님 의 '거기, 봄날'

by김별


김정희 작가의 네 번째 그림바카라 『거기, 봄날』을 읽었다.


글과 그림을 한 권의 바카라에 함께 담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해 여행기 두 권을 낸 나로서도 그림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영역이다. 이 바카라은 잔잔하고 담백한 글에 섬세한 그림이 어우러져 글의 여운을 더욱 깊게 한다. 때로는 가볍고 여린 색으로, 때로는 짙고 강렬한 색으로 삶의 깊이와 감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바카라의 첫 장에 놓인 ‘가볍게. 가볍지 않게.’라는 문장이 이 바카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짧은 문장 하나에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담겨 있다.



삶


눈물은 따뜻하다
때로
차가운 삶이 있을 뿐



또 다른 페이지에는 나목의 가지에 작은 새집이 놓여 있다.



생명

견딤의 시간을 보냈겠다


짧은 글과 그림 하나가 오히려 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삶과 글이 함께 가는 사람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농일지를 읽으며 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군인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고, 펜팔을 하고,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갔다.

집안 형편 때문에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경험은 오히려 자신만의 읽기와 쓰기의 세계를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이제 삶과 글이 따로 놀지 않기를 바란다. 글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야 하고, 날 선 마음을 어루만지고 슬픔을 거들며 외로움에 손 내미는 것이 읽고 쓰는 사람의 몫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바카라의 글은 특별한 사건보다 사람과 사물, 기억과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부모는 함께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함께했던 여행, 챙겨 먹었던 음식, 계절을 지나며 나눈 공간과 시간, 일상의 다정한 말과 따뜻한 눈길이었다.

나도 부모를 떠올렸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생전에 함께했던 장면들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가을의 작살나무 열매를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사주고 싶었던 브로치를 떠올리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농사꾼의 아내로 살면서도 낭만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딸은 어머니에게 작은 브로치를 사드렸다. 많이 착용하지 못한 브로치들이 서랍에 쌓였지만, 그 안에는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던 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작가는 인생의 끝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묻는다.

결국 남기고 싶은 것은 특별한 유산이 아니라 함께했던 시간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잘 가꾸어두는 일인지 모른다. 언젠가 꺼내 보았을 때 햇살 아래 반짝일 수 있도록.



복숭아 한 상자에 담긴 사랑


표지에 탐스럽게 그려진 복숭아도 인상적이다.

지인에게서 받은 복숭아 한 상자를 바라보며 작가는 그 안에 담긴 사람의 마음을 생각한다. 오랜 인연을 맺어온 지인은 작가의 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하며 복숭아를 보내주었고, 그 복숭아가 다시 작가에게 돌아왔다.

복숭아는 과일이면서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마음의 증표가 되었다.

좋은 관계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주고받고, 그것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식물채집 이야기도 따뜻하다.


동생들과 들과 밭에서 식물을 채집하고, 말리고, 종이에 붙여 식물도감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식물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숙제라기보다 가족이 함께한 즐거운 놀이였다.

그때 익힌 식물의 이름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작가의 그림과 글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작가는 이름을 알고 불러주는 일이 좋다고 말한다. 풀도, 곤충도, 사람도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존재를 발견하는 일이다.



파란바탕에 하얀 목련그림이 눈부시다





늙어가는 집, 계속되는 하루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집은 점점 조용해진다. 밥 짓는 일도 줄어들고, 필요한 공간만 사용하게 된다.

서재에 앉아, 거실 소파에 앉아, 혹은 주방에 서서 문득 생각한다.

‘나는 이 공간에서 늙어가겠구나.’

하지만 작가는 그 익숙한 일상 안에서도 자신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낸다. 아침의 집중력을 소중히 여기고 컴퓨터 앞에 앉아 힘껏 문을 두드린다.

“아침. 안녕!”

그리고 한산해진 주방에는 딸기와 토마토, 호박과 파프리카를 그려 넣는다. 삶이 심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작은 장면들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바람, 나무, 바다, 그리고 음악


작가는 젊은 시절 겨울바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힘껏 살아내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고 느꼈다고 한다.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낸 뒤에는 어린 시절 할머니 집 앞에 서 있던 팽나무를 떠올린다. 부모님보다도 더 오래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였다. 사람은 떠났지만 나무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작가에게 위로가 되었다.


바카라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바다’를 어머니에 비유한 대목이다.

바다는 받아주고, 품어주고, 믿어주고, 때로는 자식의 눈물까지 삼켜주는 존재다. 넓어서 좋고 깊어서 신비로운 존재. 작가에게 바다는 곧 엄마다.


작가가 좋아하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 <세상의 모든 음악> 이야기도 반가웠다.

클래식부터 팝, 영화음악, 파두, 칸초네, 샹송, 재즈까지 세계의 음악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작가에게 그 음악은 하루를 정리하고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작은 의식이다.

나 역시 이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친정오빠가 좋아해서 알게 된 음악들이 있고, 내가 전원주택을 지었을 때 오빠가 직접 선곡해 가져다준 음악을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듣기도 했다.

작가가 음악을 통해 하루를 내려놓는 장면이 조용히 다가왔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바카라의 마지막에는 어린 시절 외갓집으로 가던 길이 나온다.

먹을 것을 한 보따리 챙겨주시던 외할머니.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주들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시던 모습. 오래전 풍경이지만 그 장면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다.


그런 풍경은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을 것이다. 지친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따뜻하게 맞아줄 것 같은 사람과 장소.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다시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


그래서 『거기, 봄날』은 단순한 그림에세이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을 그린 바카라이면서, 한 사람이 살아오며 마음에 간직해온 사람과 기억,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다정한 기록이다.


작가는 오래된 기와집과 방앗간, 양조장, 시골 학교처럼 사라져가는 것들에 유난히 마음이 간다고 한다.계절은 지나가고 사람은 떠난다. 오래된 집도, 나무도, 익숙한 풍경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가 오래 바라보고 사랑했던 것들은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어쩌면 ‘거기, 봄날’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느 장소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는 한 시절의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금도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을 것 같다.





이번 주 토요일 작가님의 북토크가 성황리에 잘 이뤄지길 기원하며 덧붙인다

https://fishingproductfr.com/@qkfkagksmfwlrl/263



이 글은 오 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omn.kr/2jh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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